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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히잡 안쓰고 쇼핑, 아빠와 운전연습… 사우디 여성들 "꿈만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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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변하는 중동] 사우디에 부는 변화의 바람… 노석조 기자 현지 르포

빈살만 왕세자, 개방정책 추진… 건국 85년만에 첫 음악공연

'남녀칠세부동석' 규정도 풀어, 여성들 공연 중 일어나 열광

35년 만에 영화관 다시 짓고 내년 6월부터 여성 운전도 허용

사우디아라비아 회계사 아브라 빈후세인(여·29)은 그동안 좋아하는 그리스 뉴에이지 음악가 야니의 공연을 보기 위해 아랍에미리트(UAE)의 토후국(土侯國) 샤르자로 '원정'을 가야 했다. 사우디에선 코란(이슬람교 경전) 낭송 대회 같은 일부 종교 행사를 제외하고는 대중 공연이 일절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관도 없다. 그는 샤르자에서 리야드로 돌아오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음악 공연을 하면 참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지난 3일(현지 시각) 오후 9시 그의 바람이 현실로 이뤄졌다. 이날 리야드의 누라빈트압둘라흐맨 공주 대학 강당에서 1932년 건국 이래 85년 만에 처음으로 음악 공연(야니 콘서트)이 열린 것이다. 공연장에서 만난 그는 "변화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 몰랐다"면서 "꿈만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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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인 회계사 아브라 빈후세인이 지난 4일(현지 시각) 사우디 수도 리야드 한 카페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노석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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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공연장에는 사우디 남녀가 나란히 줄을 서 공연장에 같이 들어가 합석(合席)했다. 이슬람 종주국인 사우디는 원리주의 영향을 받아 남녀가 어른이 되면 같은 자리에 있지 못하는 '남녀칠세부동석'을 법으로 정해놓고 있다. 관공서는 물론 카페와 식당에도 남자용과 여자(가족)용 입구가 따로 있고, 내부 공간도 칸막이로 나뉘어 있다. 이를 어기면 '하이아(또는 무타와)'라는 종교 경찰의 단속에 걸려 고액 과태료를 물거나 심할 경우 태형에 처할 수 있다. 심지어 딸 졸업식에 아버지가 참석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안타까운 일도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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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난 3일 세계적인 음악가 야니의 콘서트를 보러 온 사우디아라비아의 남녀들이 나란히 줄을 서 공연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입구쪽 벽에 사우디 왕세자 무함마드 ·초대국왕 압둘아지즈·현 국왕 살만의 사진이 걸려있다. (아래)사우디에서는 공공장소에서 남녀의 합석이 엄격히 금지돼있지만 무함마드 살만 왕세자의 특별 조치로 지난 3일 ‘야니 콘서트’에서는 남녀 관객들이 자유롭게 어울려 앉아 콘서트를 즐겼다. 사진은 공연 도중 관중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하는 모습이다. /노석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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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야니 공연장에서 벌어진 모습은 '미스터 에브리싱'(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이라는 사우디 왕세자 무함마드 빈살만(32)이 '야니 콘서트'를 위해 예외적으로 '남녀 합석'을 허용하는 조치를 내리면서 가능했다.

공연 시작 전만 해도 남녀 관객들은 자리에 앉아 휴대폰만 매만지는 등 어색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잠시 뒤 야니가 웅장한 연주 소리와 함께 무대로 뛰어나와 피아노 건반을 치기 시작하자 여성 관중은 벌떡 일어나 양팔을 쭉 뻗고 "아이 러브 유(사랑해요)!"를 외쳤다. 히잡(머리카락을 가리는 이슬람식 스카프)이 풀어지는지도 모르고 껑충껑충 뛰며 환호하는 이도 있었다.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중장년 남성들은 휴대폰 카메라로 야니 공연을 찍거나 손뼉을 쳤다. 야니는 "이렇게 뜨거운 열기는 음악 인생 30여년 만에 처음"이라면서 "앞으로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미국인 관람객은 "록밴드 메탈리카의 전성기 콘서트를 방불케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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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나라로 손꼽히는 사우디에는 변화 바람이 불고 있었다. 빈살만이 지난 6월 왕세자에 오르면서 개혁·개방 정책 '비전 2030'이 빠르게 추진되고 있다.

변화의 바람은 사우디 여성에게 가장 크게 불고 있다. 지난 4일 찾은 리야드 도심의 고층 빌딩 '킹덤 타워'에서 일부 여성은 아바야(몸매가 잘 드러나지 않는 검은색의 이슬람식 원피스)만 입고 히잡은 쓰지 않은 채 머리카락을 드러내놓고 쇼핑을 했다. 한 여성은 "빈살만 왕세자의 개혁 정책 덕분에 종교 경찰들이 단속을 별로 하지 않아 외출하기가 편해졌다"며 "언젠가 아바야 대신 청바지를 입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내년 6월부터 여성 운전이 허용되면서 요즘 사우디 여성 사이에선 '운전 조기 교육' 붐이 일고 있다. 빈후세인은 최근 오전 6시면 집을 나선다. 아버지로부터 운전을 배우기 위해서다. 아직 여성 운전이 허용되지 않고 있지만, 차 보조석에 아버지를 태우고 집 근처 골목길을 돌며 '도로 주행 연습'을 하고 있다. 그는 "아버지가 유턴을 제대로 못 한다고 구박을 많이 한다"며 "내년에 면허증을 단번에 따 친구를 내 차에 태우고 시내 카페에 갈 것"이라고 했다. 대학원생인 샤하드 압둘아지즈 투르키스타니는 "사우디에서 '금녀의 벽'이 하나둘 무너지고 있다"며 "앞으로 여성의 사회 진출이 더욱 활발해질 것"이라고 했다.

사우디 정부는 내년 초 약 35년 만에 처음으로 영화관을 개설하고, 2030년까지 영화관 수를 300개까지 늘릴 계획을 11일 발표했다. 사우디는 1979년 이란에서 이슬람 공화국 혁명이 일어나 사우디 왕정 체제를 위협하자 영화 상영을 중단하는 등 각종 문화 활동을 축소해왔다.

[노석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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