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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정의길의 세계 그리고] 트럼프 때문에 내가 친미주의자가 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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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하고 언제부터인가 나는 정말로 미국을 걱정하며 잘되기를 바라는 친미주의자가 됐다. 물론 트럼프가 한국을 배려하고, 국제사회의 질서와 우의를 돈독히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망치는 미국사회, 그로 인해 흐트러지는 국제사회를 보면서, 미국이 만들고 주도하는 가치와 질서가 옳든 그르든 간에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세계가 그에 기반하고 있음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그는 취임 뒤 멕시코 국경 분리장벽 설치, 무슬림 국가 국민의 미국 입국 제한 및 무슬림 혐오 동영상 전파, 파리기후변화협정 탈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 철회 및 북미자유무역협정(나프타) 등 다자무역협정 파기 위협, 이란의 국제핵협정 파기 위협, 그리고 최근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라는 인정 선언 등을 터뜨렸다.

이 모두가 미국이 만들고 주도했던 가치와 질서를 스스로 파괴하는 행위들이다. 멕시코 장벽과 무슬림 차별은 이민과 반인종주의를, 파리기후변화협정 탈퇴는 환경보호를, 다자무역협정 파기는 자유무역 질서를, 이란핵협정 파기 위협은 핵비확산 체제를, 예루살렘 선언은 중재자로서 미국의 위상을 허물고 있다.

‘자유주의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이런 가치와 질서들은 물론 미국의 이해에 기초했다. 세계에서 미국의 패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미국의 주류들은 이런 가치와 질서에 바탕한 미국 패권을 흔히 ‘어진 패권’(benign hegemony)이라고 묘사한다. 다른 나라를 점령하고 식민화하던 과거 패권국가와는 달리 다른 나라들도 배려하면서 자신의 이익도 챙겼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주도한 세계는 명암이 있지만, 전례없이 성장과 자유가 신장된 시기였다. 마셜 플랜으로 인한 유럽의 부흥이나 한국의 경제성장은 분명 미국의 배려가 필수조건이었다.

미국이 상대적으로 ‘어진 패권’ 국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지정학적 조건이 컸다. 아메리카 대륙을 독점적인 영향권으로 하여 안보의 위협이 없던 미국으로선 유라시아 대륙에서 압도적인 패권국가의 부상만 막으면 자신의 패권을 보장할 수 있었다. 주변 국가로부터 안보 위협이 부재한 미국은 해외로 투사할 국력이 충분했다. 이런 국력은 소련이나 중국의 부상을 막기 위해, 유럽이나 동북아 등의 주변 국가들을 강화하는 데 소요됐다. 동맹국들을 강화해 가상 적국의 부상을 막고, 전세계를 자신의 시장으로 만들고 영향력을 키우는 과정이었다. 미국은 하나를 주고 그 이상을 얻는 장사를 해왔다.

하지만 트럼프와 그 지지층은 미국이 다른 나라와 국제사회를 포섭하려고 던져주는 그 미끼조차도 내줄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엔 물론 그동안 미국 주류 보수세력들의 실정이 크게 작용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큰 빈부격차, 갈수록 쇠락하는 내륙의 전통산업 등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오히려 이런 현상들을 조장하는 정책을 펴왔다. 부자들의 세금을 더 깎아주고, 복지체계를 갈수록 빈약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반작용이 트럼프와 그 지지층이다. 문제는 이들이 미국과 국제사회의 공통 이익을 침해하는 한편 그 이해관계를 더 엇갈리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경쟁력을 잃은 석탄산업 등 전통 굴뚝산업을 되살리려고, 청정에너지산업 진흥과 환경보호를 가로막고 있다. 인종주의를 조장하고 이민을 반대해 미국 첨단산업의 엔진인 신선한 이민 노동력을 위축시키고 있다. 미국 시장을 보호한다고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협상에서 철수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의 입지만 강화시켰다.

미국 언론인 토머스 프리드먼은 트럼프가 이스라엘로부터 아무런 양보도 얻지 않고 예루살렘을 그 수도로 인정하고,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에서 철수한 것을 두고 “그렇게 아무 대가 없이, 그렇게 많은 것을,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양보하는 대통령은 본 적이 없다”며 “트럼프는 미국의 대통령이 아니라, 그 지지층의 대통령일 뿐이다”라고 개탄했다.

미국의 장기적 국익을 그렇게 훼손하는 트럼프에게 한반도 문제에서 이성적으로 대처하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뉴욕 타임스>도 8일치 사설에서 “북한에 대한 트럼프의 공포 전술이 우리를 공포스럽게 한다”고 개탄했다.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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