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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필동정담] 변동림 혹은 김향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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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지난달 말 열린 서울옥션 홍콩세일에서 김환기 화백의 1964년작 반(半)추상화 '모닝스타'가 우리돈 39억원을 기록해 국내 반추상 그림 중 최고 낙찰가를 기록했다. 응찰자 간 치열한 접전 끝에 한 아시아계 컬렉터가 외친 2800만홍콩달러로 따낸 것이다. 김 화백의 완전 추상인 '전면 점화'를 제외한 반추상 중에는 가장 높은 가격의 대우를 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김환기의 작품이 이렇게 대접을 받는 건 화가의 사후에 유작을 꼼꼼하게 관리한 부인 김향안 덕분이다. 김향안은 1992년 환기미술관을 설립해 김 화백을 대중에게 알리는 데 힘써왔다. 뉴욕과 한국을 오가며 89세까지 살다 2004년 타계했다. 김향안은 본래 일제 때 요절했던 시인 이상의 부인이었다. 이상의 절친인 꼽추 화가 구본웅의 계모인 변동숙의 이복동생으로 본명이 변동림이다. 이화여전 영문과를 중퇴한 신세대 문학여성으로서 만 스물 때인 1936년 이상과 결혼했지만 3개월 만에 이상이 폐병 치료를 위해 도쿄로 건너가 폐결핵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짧은 인연으로 끝났다. 그래도 이상의 임종을 지켜보며 "멜론이 먹고 싶소"라는 유명한 유언을 세상에 전한 주인공이다.

1944년 본처와 아이 셋을 둔 유부남 김환기와 재혼을 위해 본명을 버리고 필명으로 쓰던 김향안이라는 이름을 택한 뒤 새 인생을 시작했다. 김환기에게 김향안은 조각가 로댕에게 제자이자 연인이었던 카미유 클로델과 견줄 만하다. 쇼팽의 연인이었던 조르주 상드의 역할과도 비교될 수 있겠다.

김환기 하면 1970년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뽑힌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작품부터 떠오른다. 김광섭의 시 '저녁에'의 마지막 구절을 제목으로 가져다 썼다. 수많은 인연들을 밤하늘에 하나하나의 점으로 새겨 넣었는데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윤회를 담았다는 평가로 이어졌다.

지난 토요일 오후 서울 부암동 서울미술관에 갔다가 일곱 거장의 작품 몇 편을 만났다. 김환기, 김기창, 박수근, 이중섭, 천경자, 도상봉, 유영국 등이다. 한국적 기법으로 우리 고유의 정신을 담아낸 불후의 명작들에서 묘한 철학을 읽을 수 있다. 숱한 위작으로 논란에 휩싸이는 많은 작가들과 달리 김환기의 작품은 다른 대접을 받으니 행운이다. 로댕을 띄워 올린 클로델처럼 이상과 김환기의 여인 변동림 혹은 김향안을 다룬 드라마가 조만간 만들어질 법하다.

[윤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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