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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말로는 ‘예루살렘 항의’…계산기 두드리는 중동 맹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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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이스라엘 수도' 선언에 반발하지만

전략적 이익 등 자국 득실 따지며 '행동' 미뤄

중앙일보

트럼프 대통령의 예루살렘 선언에 반발하는 팔레스타인 시위대가 7일(현지시간) 서안지구 라말라에서 돌을 던지며 시위를 하고 있다. 이스라엘군은 서안에 수백 명의 병력을 추가 배치했다.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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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예루살렘=이스라엘 수도’ 선언(이하 예루살렘 선언)의 파장이 세계 각국에 밀어닥치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충돌로 사상자가 발생했을뿐 아니라 주요 도시 주미 대사관 앞에선 분노에 찬 무슬림들의 항의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아랍연맹(중동 및 아프리카 아랍계 22개국)도 미국에 대해 예루살렘 선언 철회를 요구하고 나섰다. 10일(현지시간)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아랍연맹 긴급 외무장관 회의에선 미국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한 건 국제법 위반이며 역내 긴장과 폭력을 끌어올리는 그 결정을 철회하라는 성명이 채택됐다.

하지만 정작 미국산 제품 거부라든가 대미 협력 중단과 같은 ‘알맹이’는 빠졌다. “표현(레토릭)은 장황하지만 구체적 행동은 부족한 결의”(AP통신)라는 지적이다. 주요 중동 국가의 복잡한 득실 계산과 향후 대응을 전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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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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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권 대표 자리 노리는 에르도안
◆터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당사자인 팔레스타인을 제외하고 가장 강력한 어조로 이슬람권의 반발을 대표하고 있다. 트럼프의 공식 선언(6일) 전에는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끊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고 11일엔 "팔레스타인은 아무 잘못이 없는 피해자이고 이스라엘은 테러리스트 국가다. 우리는 아이들을 죽이는 국가에 예루살렘을 내주지 않을 것"이라고 이번 결정을 성토했다.

하지만 실제로 터키가 이스라엘과 단교할지는 미지수다. 2010년 이스라엘의 터키 민간 구호선 공격으로 냉각됐던 두 나라 관계는 지난해 회복됐고 가스전 개발 및 수출 등에서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그보다는 반미 정서의 이슬람주의를 독려함으로써 에르도안 자신이 ‘아랍·이슬람 국가 리더’ 이미지로 자리매김하려 한다는 분석이다. 에르도안은 13일 이스탄불에서 열리는 이슬람협력기구(OIC) 긴급 정상회의에서 이를 최대한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포함 57개 이슬람 국가로 구성된 OIC는 원래 사우디아라비아 주도로 창설됐지만 존재감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례적으로 강한 제스처가 “이란 제재법 위반 및 반체제 이슬람학자 페트라흐 귈렌 송환 스캔들로 대미 입지가 좁아진 에르도안의 국면 타개용”(전 지한통신 서울특파원 알파고 시나씨)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 4월 개헌으로 초장기 집권 기반을 마련한 에르도안은 트럼프 취임 때 기대했던 시너지를 내긴 커녕 오히려 트럼프의 러시아 스캔들에 휘말려들어가는 상황에 처했다.

앞서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은 로버트 뮬러 특검팀이 기소된 마이클 플린 전 국가안보보좌관과 터키 관료들 사이에서 귈렌 송환 등을 둘러싸고 금전 거래 논의가 오간 혐의를 포착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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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현지시간) 러시아 소치에서 열린 시리아 사태 중재 정상회의에서 손을 맞잡은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왼쪽부터). [타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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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스·헤즈볼라 측면 지원 명분으로
◆이란: 두말할 나위 없이 반이스라엘의 선봉에 서 있는 이란 정부는 군사적 경고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이란 정예군 혁명수비대의 알리 자파리 총사령관은 9일 "트럼프는 알쿠드스(예루살렘)의 알아크사 사원을 파괴하기 위해 그렇게 결정했다"면서 "알쿠드스는 시온주의자들의 가짜 정권에 무덤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강경 보수파 종교 지도자인 아야톨라 아흐마드 카타미는 전날 금요 예배에서 이란의 탄도미사일이 미국과 이스라엘 도시들을 파괴할 수 있다는 엄포를 놓았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도 10일 보리스 존슨 영국 외교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트럼프의 결정은 “부적절하다”면서 “지역의 불길에 기름을 붓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그렇다고 이란이 직접 예루살렘 문제에 개입할 가능성은 작다. 이제껏 하던대로 이스라엘 접경국가의 무장세력들, 즉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예멘의 후티 반군, 레바논의 헤즈볼라 등에게 공공연히 군사력을 지원하는 방식이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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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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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물밑 교류 속 反이란 목청만
◆사우디: 공식적으로는 아랍연맹과 더불어 예루살렘 선언에 강력한 반대 의사를 표시하고 있지만 ‘말’ 뿐이다. 오히려 라이벌 이란으로부터 “만약 사우디가 이스라엘과의 '잘못된 우정'을 끝내고 예멘에 대한 비인간적인 폭격을 멈춘다면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10일 로하니 대통령)는 비아냥까지 듣고 있다. 외교전문가들은 이슬람국가(IS) 몰락 이후 강력한 대이란 전선을 구축하려는 사우디가 이스라엘과 물밑 교류를 강화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사우디로선 예멘·시리아 사태에 군사 개입한 것만으로도 출혈이 적지 않은 상황이라 추가적인 외세 개입이 어렵다. 사우디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마흐무드 압바스 수반을 불러 트럼프의 ‘예루살렘 선언’에 준하는 계획을 미리 흘렸다는 관측 보도(뉴욕타임스 등)까지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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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중앙포토]


측근 비리 속 국내 정치 장악력 회복
◆이스라엘: 관련국 중 유일하게 트럼프의 예루살렘 선언을 지지하고 있지만 노골적인 환영은 자제하는 편이다. 아랍국가는 물론 영국·프랑스 등 주요 유럽연합(EU) 국가들이 “예루살렘 지위는 이·팔 평화협상을 통해 정해져야 한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럼프 취임 이후 세계 정상 가운데 가장 먼저 백악관으로 달려갔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이번 선언에 힘입어 확실한 국내 입지를 다진 것은 분명하다. 최근 네타냐후 총리는 군 장성 출신 측근들이 줄줄이 방산 비리로 체포된 데 이어 본인도 재벌·언론과의 향응 유착 혐의를 받아 왔다. 다만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시위 및 하마스의 공격이 계속돼 치안·안보가 불안해질 경우 책임론이 불거질 수 있다.

하마스보다도 존재감 약화된 압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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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사진 위키피디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이번 사태로 가장 사면초가에 놓인 것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마흐무드 압바스 수반이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연결된 파타 당의 수반이기도 한 압바스는 대이스라엘 평화협상이나 국가수립 계획이 좌초하면서 실질적인 통치력이 매우 떨어진 상태다. 트럼프의 선언이 있기 직전에도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지만 막지 못했다.

나아가 지난 10월 가까스로 합의한 파타와 하마스 간의 역사적 통합문도 휴지조각이 될 위기다. 파타는 이 합의에 따라 12월 1일부터 가자지구의 통치권을 이양받기로 돼 있었지만 하마스의 무장해제에 실패하면서 이스라엘과도 평화 협상에 착수하지 못했다. 트럼프가 이번 선언과 관련해 ‘충격 요법’을 통해 이·팔 간 협상을 이끌어내겠다고 한 것도 이같은 팔레스타인의 사분오열과 관련된다.

압바스 수반은 이달 말 중동을 방문하는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과 회담을 거부하는 등 강력한 반발 기조를 이어가고 있지만 아랍연맹 등 주변국가의 실질적 지원이 없이는 마땅히 맞설 카드가 없다. 가자지구를 장악한 하마스가 연일 군사 대응에 나서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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