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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누가 보수를 '쪽팔리게' 했나…"지금은 쪽팔리는 보수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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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300][보수의 몰락-①부끄러운 보수]이명박정부 때부터 예고됐던 '보수의 몰락']

머니투데이


#1. 지난 2015년 5월 21일.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이른 아침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아무래도 국무총리 지명자를 바꿔야겠다는 내용이었다. 청와대는 이날 오전 10시 황교안 법무부 장관을 새 국무총리로 지명한다고 발표할 예정이었다. 공식 발표를 불과 몇 시간 앞두고 대통령이 황교안 장관 대신 누구를 택하려 한 것일까.

박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최경환 경제부총리였다. 이 관계자는 참지 못하고 대통령에게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고 한다. 이미 총리 내정 절차를 다 끝내고 공식 발표만 남은 상태에서 변덕을 부리는 것은 당연히 이해할 수 없다. 이보다는 자신이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친박(친박근혜) 핵심 인사가 아니고선 총리로 쓰지 못하겠다는 속좁은 태도가 답답함을 더했다고 했다. 이 고위 관계자는 박 대통령에게 "이게 대통령이 할 일이냐"고 따졌고 박 대통령은 반박불가로 '최경환 총리 카드'를 집어넣어야 했다.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총리가 되지 못할 뻔한 것을 아느냐"며 이 에피소드를 전해준 옛 박근혜정권 인사는 "한마디로 창피한 노릇"이라고 말했다. '박근혜 청와대'에서 일한 또다른 전직 청와대 관계자도 청와대 시절을 회고하며 "어휴, *팔려"를 연발했다. 대통령으로부터 내려온 지시는 도무지 대통령답지 못한 것들 일색이었다는 설명이다.

그는 "추석이나 설 명절 선물 발송은 정무수석실 행정관 차원에서 주로 이뤄지는 업무다. 그런데 정무수석실에서 만든 명단을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첨삭해 자기 맘에 안 드는 인사들을 빼버렸다. 대외적으로 선물 발송 제외 인사들에 대한 이유를 만들어내느라 혼났다"고 말했다.

또다른 전직 청와대 고위관계자도 청와대에서 나온 후 주변 사람들이게 비슷한 취지의 얘기를 털어놨다고 한다. 대통령 외교나 안보, 경제, 사회 등 국가 아젠다에 관해 지시를 내리고 의논을 해야 하는 것인데 참모들에게 연락하는 용건이라는 것이 '왜 유승민 부친상에 화환을 보냈느냐'는 찌질한 것들 뿐이었다는 것이 그의 고백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탄핵 위기를 앞두고 "이러려고 대통령이 됐는지 자괴감이 든다"고 했지만 이미 탄핵 사태가 불거지기 이전부터 대통령을 '모시던' 청와대 참모들에게서조차 "이게 대통령이냐"는 자조와 부끄러움이 팽배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이 같은 부끄러움을 전국민적인 실망과 분노로 폭발시킨 촉발제였다. 국정 운영을 자신의 수발을 들던 사인(私人)에게 맡겼다는 사실은 그가 우리나라의 경제와 안보를 지킬 유일한 지도자라고 믿었던 수많은 지지자들의 자부심과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냈다.

#2. 지난해 10월 23일. 새누리당 한 관계자는 청와대 고위 관계자로부터 갑작스레 전화를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 하루 전날이었다. 이 관계자는 최순실이라는 비선실세의 존재가 곧 언론 보도를 타게 될 것이라면서 이를 덮기 위한 '정무적 해법'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그 해법이라는 것은 바로 개헌 공론화였다. 박 대통령이 '개헌 블랙홀'이라며 임기 내내 논의조차 막았던 주제다.

비선실세 문제에 대한 정면대응이 불가능하다는 시인이나 다름없었다. 정치권과 국민들의 시선을 돌릴 수 있는 폭발력있는 주제를 터뜨려 문제를 덮기 위해 개헌에 대한 입장을 하루아침에 바꾸겠다는 말이었다. 그러면서도 이 관계자는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수습불가의 상황을 만들었다며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었다.

이날의 전화통화를 잊을 수 없다며 들려준 이 인사는 "이후에도 사태가 최악으로 치닫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했다"며 "(박근혜정권 차원 의혹이) 아직도 더 나올 것들이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결과적으로 '박근혜 청와대'에 몸담았던 상당수와 친박 정치인들이 박 전 대통령처럼 수사를 받거나 수사 대상으로 떠오른 상태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덮으려고 한 방조자일뿐 아니라 대통령답지 못한 부끄러운 대통령 옆에서 자신들의 이득을 챙겨온 부끄러운 사실이 하나둘 드러나고 있다.

돌이켜보면 '최순실 국정논단 사태' 뿐이 아니었다. '국회법 파동', '배신의 정치' 논란, '진박(진짜 박근혜) 공천 파동' 등 박근혜정부 임기 내내 보수 정치권은 박 전 대통령을 보수의 '화신'으로 떠받들기에 급급했을 뿐이다. 보수의 가치를 지키기는커녕, 보수의 가치가 무엇인지 보여주지도 못했다.

최근 회고록을 낸 고건 전 국무총리는 "박근혜정부에서 보수가 스스로 궤멸했다"고 진단했다. 그 원인에 대해 "당사자(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제일 큰 책임이 있겠지만 그 사람을 뽑고 추동하면서 진영대결에 앞장선 사람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박 전 대통령 뿐 아니라 보수정당과 보수 지지기반 등 보수가 총체적인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는 평가다. 그러는 사이 부끄러움은 보수 지지층의 몫이 됐다.

#3. "지금은 쪽팔리는 보수의 시대다. 보수 내에서조차 보수를 보수라 부르지 못하는 현실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위기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영역뿐 아니라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보수에 대한 불만과 위기의식이 팽배하다."

놀랍게도 6년전인 이명박정부 당시 부끄러운 보수의 고백이 나왔다. 한나라당 소장파로 주목받았던 남경필 경기지사가 그 주인공이다. 당시 남 의원은 이명박정부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보수의 몰락'을 불러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미네르바' 구속, 광우병 취재 관련 이메일 공개, 국책 연구기관 연구원들의 언로 차단, 민간인 불법사찰 등 보수의 핵심 가치인 '자유주의'에 역행하면서 결국 보수 지지층, 나아가 40대 이하 신주류에게 외면받을 가능성을 우려한 결과다. 하지만 내부 혁신이나 개혁은 없었다. 보수정권이 이어지는 동안 보수의 부끄러움도 커져갔을 뿐이다. 남경필 지사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지자마자 새누리당 당적을 버렸다. 그가 '쪽팔리는 보수'를 버린 후 일성은 "보수라는 명칭에 얽매이지 말자"였다.

김태은 박소연 기자 taie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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