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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고조선 수도는 평양 아닌 요동…고고학계 100년 통설에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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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석의 시사문화재]

지난달 고고학대회서 왕검성=평양 통설 뒤집는 설 나와

고조선 도성 입증 유물 평양에선 100년간 안 나와

왕검성은 요동에 존재 한제국이 낙랑군 새 치소로 평양 설정

문헌과 정면 배치…역사학계 당혹 재야학계는 쾌재

논란 핵심 평양 유적 접근 불가능 통일고고학의 과제로


한겨레

평북 위원 용연동 유적에서 출토된 고조선 시기의 청동기와 철기류. 농기구류로 추정되는데, 중국 전국시대 연나라의 명도전(왼쪽 아래 칼 모양 화폐)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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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에 맥 못 추던 고고학계가 반란을 일으켰다!”

요즘 국내 역사학계에서는 이런 말이 농반진반으로 나돈다. 지난달 초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국고고학회의 41회 고고학전국대회가 전례 없는 논란거리를 던진 까닭이다.

20세기 한반도에 근대역사학이 정립된 이래 철벽처럼 군림해온 학설 중 하나가 한민족의 첫 국가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은 평양이란 통설이다. 정확히는 대동강 북쪽 평양 일대에 있다가, 한 제국이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멸망시킨 뒤 강 남쪽으로 거점(낙랑군 치소)을 옮겼다는 식민지시대 일본 학자들의 추정이 100여년간 건재해왔다. 1960년대 이후 남북한 학계에서는 요동이 중심지였다가 기원전 3세기 연나라 장군 진개의 침공에 따라 평양으로 이동했다는 설도 나왔지만, 최종 입지가 평양이란 결론은 굳건했다. 그런데 고고학대회에서 왕검성은 평양에 애초 없었고 고조선 종말까지 요동에 있었다는 학설이 처음 공론화한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 ‘조선열전’과 5세기 중국지리서 <수경주>의 왕검성 고증 기록에 기대어 고조선을 연구해온 문헌사학자들은 당혹감에 빠졌다. 반면, 왕검성 요동설을 주장해온 재야 학자들은 “강단사학이 양심선언을 했다”며 반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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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대동군 대동강변 남쪽 기슭에 있는 낙랑군치지 성벽. 한 제국이 고조선을 멸망시킨 뒤 설치한 낙랑군의 통치 거점 터로 추정되는 유적이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 일본 학자들이 자취를 발견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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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문을 연 이는 정인성 영남대 교수다. 일본 도쿄대에서 일제강점기 평양 출토 낙랑 유물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도쿄대 소장품 분석 성과와 요동·요서의 고조선계 청동기, 토기에 대한 현장 조사를 토대로 논문 ‘고고학으로 본 위만조선 왕검성과 낙랑’을 발표했다. 요지는 ‘한나라가 요동 왕검성을 무너뜨린 뒤 평양에 낙랑군 치소를 따로 설치했을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논문의 주장은 도발적이다. 기존 왕검성 대동강 북안설과 요동요서를 포함한 고조선 강역 논란 등을 검토하고, 최신 고고자료를 종합한 결과 평양성은 왕검성이 들어설 수 없는 공간”이라고 단정했다. 근대 발굴이 시작된 이래 100여년이 지났는데도, 지금껏 평양에서 고고학적 물증이 안 나왔다는 게 근거다. “1905년 경의선 부설로 평양역 부근을 굴착한 이래 대성산성, 청암리토성 등 대동강 북안의 조사가 진행됐으나, 왕성으로 볼 만한 어떤 유적, 유물도 확보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잣대는 왕성 성곽의 자취다. 고조선과 비슷한 시기 한나라에 복속된 남월국(베트남)도 왕성 성곽이 중국 문물들과 발견된다는 점에서 고조선도 성곽 중심으로 실체를 검증해야 한다는 견해다. 정 교수는 나아가, 위만조선이 연나라 제나라 망명자들의 나라이므로 연, 제의 유물문화가 확인되는 요동 유적 일대에서 성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고고학적 견지에서, ‘왕검성 대동강북안설’은 폐기해야 하며, 왕검성은 요동에 존속하다 한나라 군현 설치 뒤 중심지가 대동강변으로 이전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이다.

문헌사학계는 불편한 기색이다. 한나라가 서쪽에서 바다 건너 왕검성을 공격했다는 <사기> 기록과 고구려인이 왕검성을 평양성 일대로 묘사한 전언을 담은 <수경주> 내용을 정 교수의 설이 깡그리 부정하는 양상이 되기 때문이다. 윤선태 동국대 교수는 “청암리 토성 등 발굴하지 않은 평양 성곽들이 남아 있는데, 물증이 없다고 단정하는 건 거친 해석”이라며 “요동에 왕검성이 속했다면, 역사적으로 확증된 한나라 요동·요서군 위치도 수정해야 하는데, 근거를 댈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했다. 오영찬 이화여대 교수도 대회 토론문에서 “요동 왕검성을 함락시켰다면, 왜 수천리 떨어진 평양에 굳이 낙랑군을 두었는지 납득할 만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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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의주 미송리에서 출토된 미송리형 토기. 요녕식 비파형 동검, 고인돌과 더불어 고조선 문화를 대표하는 유물로 인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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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녕식 비파형 동검. 중국 요서·요동지방과 한반도 전역에서 확인되는 청동무기로 고조선 문화를 상징하는 유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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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랴오닝성 조양 십이대영자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거울. ‘다뉴뇌문경’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고조선 문화의 표지유물 중 하나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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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계에서 그동안 고조선은 ‘그림 속의 떡’이었다. 분단 이후로 현지 유적을 가지 못하고, 해방 뒤 입수하거나 축적된 자료도 별로 없어 일제강점기 전래 유물 위주의 편년이나, 낙랑군과 한반도 남부 금속기 문화의 교류관계를 가늠하는 정도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정 교수의 학설은 이런 한계를 딛고 2000년대 이후 점차 공개되고 있는 중국, 일본의 관련 유적·사료들을 총체적으로 파고들어 내놓은 고고학계 차원의 첫 문제제기란 점을 평가할 만하다.

사실 논란을 매듭지을 최선의 해법은 북한 주석궁 근처에 있다는 옛 평양성벽 등을 절개해 집중발굴하는 조사일 것이다. 하지만 핵 위기와 남북관계 경색으로 공동조사는 꿈도 꾸지 못하는 실정이다. 결국 왕검성 수수께끼를 풀 열쇠 찾기는 ‘통일고고학’의 몫으로 남길 수밖에 없는 셈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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