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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스케이트장 1개뿐인 나라에서… '빙판 히딩크' 전이경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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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쇼트트랙의 전설, 싱가포르 첫 동계올림픽 진출 이끌다]

자녀 교육 위해 갔다가 지도자로

시설 열악해 맨땅서 훈련하며 팀 맡은지 2년만에 쾌거 이뤄

"선수들 실력, 한국 초등생 수준… 연습하다 말고 자리 비운적도

평창 가는 게 지금도 꿈만 같아"

싱가포르는 1948년부터 하계올림픽에 두 차례 빼고 모두 출전했다. 하지만 동계올림픽엔 지금까지 한 번도 참가한 일이 없다. 1년 내내 기온이 23~31도인 '여름 나라' 싱가포르에 겨울 스포츠는 다른 나라 얘기였다. 이런 싱가포르가 동계올림픽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게 됐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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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6일은 훈련 연맹에선“일주일에 두 번만 훈련하면 된다”고 했지만 쇼트트랙 레전드 전이경에겐 성에 차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주 6일 강훈련으로 싱가포르 대표팀의 실력을 끌어올렸다. 그 결과가 싱가포르 역사상 첫 동계올림픽 출전으로 이어졌다. 전이경(회색 점퍼)이 싱가포르 대표팀 선수들에게 뭔가를 지도하는 모습. /싱가포르빙상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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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ISU(국제빙상경기연맹)가 발표한 평창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국가별 출전권 배분 결과에 따르면 싱가포르의 여자 대표팀 샤이엔 고(18)가 1500m 출전권을 따냈다. 한국 쇼트트랙은 한 나라가 얻을 수 있는 최대치인 출전권 20장을 확보했다. 싱가포르의 첫 동계올림픽 출전을 이끈 건 한국 쇼트트랙의 레전드 전이경(41)이었다. 1994 릴레함메르와 1998 나가노올림픽에서 연속 2관왕(1000m, 3000m 계주)에 오르며 금메달 4개를 차지한 전이경은 2015년 11월부터 싱가포르 쇼트트랙 대표팀의 유일한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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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에 있는 전이경과 전화 연결이 됐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열리는 동계올림픽에 싱가포르 역사상 처음으로 제가 가르친 선수가 나간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죠. 원래 한국 방송 해설위원으로 평창 동계올림픽을 찾기로 했는데, 이제 지도자로 올림픽 무대에 서게 됐네요."

전이경과 싱가포르 쇼트트랙 대표팀의 인연은 우연하게 시작됐다. 자녀 교육을 위해 싱가포르행을 택한 전이경에게 싱가포르 빙상연맹이 접촉해 왔다. "국가 지원이 적어 월급은 많이 못 주지만 대표팀을 꼭 맡아달라고 부탁하더라고요. 일주일에 두 번만 훈련하면 된다고. 가정 생활과 병행도 가능하고, 재능 나눔을 하고 싶어 수락했죠."

전이경 사전에 대충대충은 없었다. "처음엔 훈련하는데 선수들이 마음대로 자리를 뜨고…. 어휴, 한국에선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어요. 기강부터 바로잡았죠." 일주일에 두 번만 해도 된다는 훈련은 어느새 주 6일 훈련으로 바뀌었다. 전이경은 "금요일 빼고 내내 훈련했다"며 "싱가포르에서 잘한다는 선수 성적이 한국으로 따지면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였기 때문에 강훈련만이 답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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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사진)현역 시절 풋풋했던 모습 - 전이경이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1000m에서 우승하고 기뻐하는 모습. (오른쪽 사진)꿈나무들도 일일이 지도 - 지상 훈련을 통해 유망주들의 스케이팅 자세를 바로잡아주는 전이경 코치. /연합뉴스·싱가포르빙상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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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경은 싱가포르 생활을 "싱가포르판 쿨 러닝"이라고 표현했다. '쿨 러닝'은 열대 자메이카의 젊은이들이 봅슬레이에 도전, 19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싱가포르 전체에 국제 규격 스케이트장이 딱 하나예요. 그나마도 쇼핑몰 안에 있어서 쇼핑몰 열기 전 새벽과 문 닫고 난 뒤 밤에만 훈련할 수 있죠. 얼음이 녹는 일도 다반사였고요. 지원도 적고 대관료가 비싸 선수 부모들이 십시일반 부담했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 선수들은 전이경 집 근처 운동장에서 '지상 지옥 훈련'에 힘을 쏟았다. 대관 일정과 비용 문제로 빙상 훈련은 일주일에 두 번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마침 이날 행사 참가차 서울에 와 있던 세르미앙 응 싱가포르 IOC 집행위원은 모국의 평창올림픽 참가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역사적인 날입니다. 우리가 동계올림픽에 나갈 수 있으리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전이경 코치가 없었다면 이뤄내지 못했을 겁니다. 오랜 꿈을 이뤄줘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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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동계올림픽 첫 진출… 그 뒤엔 전이경이 있었다 - 동계스포츠 불모지 싱가포르가 역사상 처음으로 동계올림픽에 출전한다. 24일 ISU(국제빙상경기연맹)가 발표한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국가별 출전권 배분 결과에 따르면 싱가포르의 샤이엔 고(18)가 여자 1500m 출전권을 따냈다. 2년 전 싱가포르 대표팀을 맡은 한국 쇼트트랙 레전드 전이경 코치가 빚어낸 성과다. 사진은 전 코치가 싱가포르 선수들과 얼음판 위에서 포즈를 취한 모습. /싱가포르빙상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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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경은 싱가포르에서 대표팀 선수뿐 아니라 유소년도 30여 명 가르치고 있다. '전이경의 아이들'은 1년에 두 차례씩 한국 전지훈련을 한다. "제가 가르치는 어린 친구들이 성장한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기대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덜컥 평창에 나가게 됐죠. 평창올림픽이 싱가포르에서 쇼트트랙의 지위를 바꿔놓을 겁니다. 평창에서 뵙겠습니다."

[석남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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