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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Why] 아홉살 때 전신火傷으로 죽다 살아난 남자, 사지 멀쩡한데 뭐가 걱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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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돈규 기자의 2사 만루]

"화재 사고는 내 인생의 선물"… 베스트셀러'온 파이어'쓴 세계적 강연가 존 오리어리

"人生 길, 늘 선택할 순 없지만 걷는 방식은 고를 수 있어"

병원서 5개월, 일어서는 데 5년

수술·손가락 절단·피부 이식… 나와 가족이 시련 극복한 과정

남들에게도 가치있다고 생각… 해마다 10만여명에 '삶'을 강연

조선일보

존 오리어리는 아홉 살 때 전신 화상(火傷)으로 손가락을 모두 잃었다. 세계적인 강연가 겸 베스트셀러 저자가 된 그는 미국 세인트루이스 사무실에서 “사람들이 내 경험담을 ‘구명 튜브’로 삼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뒤로 보이는 벽에 ‘온 파이어’ 독자들이 보낸 감사 편지들이 붙어 있다./세인트루이스(미국)=박돈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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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수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다. 상대는 손가락이 없었다. 그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뭉툭한 촉감이 전해졌다. 손가락 세 마디 중에 가장 안쪽 마디만 남아 있었다. 존 오리어리(39)는 '뭐 대수냐는 듯' 해맑게 웃었다. 왼쪽 얼굴에 화상(火傷) 흉터가 보였다.

아홉 살 소년 존은 1987년 1월 자기 집 차고에서 불장난을 하다 쓰러졌다. 전신 화상을 입었고 그중 87%는 3도 화상이었다. 생존 확률은 1%도 안 됐다. 병원에서 간신히 의식을 찾은 소년은 겁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나 이제 죽는 거야?" 어머니가 답했다. "존,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래도 돼."

수술과 손가락 절단, 피부 이식 등 치료와 재활을 거쳐 소년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기신기신 사는 게 아니다. 세계적인 강연가로 해마다 청중 10만여명을 만나고, 경험담을 쓴 책 '온 파이어(On Fire)'는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국내 번역 출간을 앞두고 지난 9일 그가 사는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만난 오리어리는 "내가 겪은 화재는 슬프거나 나쁜 일이 아니라 일종의 선물(gift)이었다"고 했다.

"그건 네 선택이야"

오리어리는 결혼했고 사 남매를 뒀다. 그의 사무실에는 독자들이 보내온 감사 편지가 벽 한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날짜와 장소, 청중 숫자가 적힌 화이트보드도 눈에 들어왔다. 11월에만 멤피스·올랜도·보스턴·오마하 등에서 보름이나 강연이 잡혀 있었다.

―죽음의 문턱에 놓였던 당신이 이젠 삶에 대해 가르치느라 바쁘군요.

"그날의 화재는 두 갈래 이야기를 남겼어요. 저와 가족이 그것을 극복한 과정이 하나, 남들에게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공유하기 시작한 게 다른 하나지요."

―사고 직후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어머니에게 어떤 말을 듣고 싶었나요?

"요즘 북한 때문에 위기감에 휩싸인 한국 사람들이 아마 그렇겠지요. 저도 안심시켜주길 바랐어요. 모든 게 잘 풀리고 곧 따뜻한 집에 갈 수 있을 거라고 말이지요."

―어머니가 야멸차게 답하신 거 아닌가요.

"그날은 저도 서러웠어요. 하지만 안심시키는 말이나 행동보다는 진실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있는 그대로 진실을 보여주려면 용기가 필요한데, 엄마는 감추지 않고 말했던 거예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니? 그래도 돼. 그건 네가 선택하는 거야(It's your choice).'"

―그 말을 듣고는 '살고 싶다' 했지요?

"네. 3도 화상이 뭔지, 앞으로 어떤 수술과 치료를 받게 될지, 손가락을 절단해야 하는지도 몰랐어요. 우리 가족이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내일 당장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어요. 그래서 '오늘'에 집중하게 됐지요. 내 삶을 남이 대신 살아줄 수 없고 내가 소유하는 거라는 사실을 천천히 깨닫게 됐습니다."

―회복까지 얼마나 걸렸나요.

"병원에서 다섯 달을 보냈어요. 불에 타 오그라들고 굳어진 몸을 펴기까지, 다시 두 발로 일어서기까지 5년이 필요했습니다. 심리적인 회복까진 더 긴 시간이 걸렸지요. 돌아보면 고마운 일이에요. 그 고통이 결과적으론 건강한 고통이었고, 그 덕에 더 나은 내가 되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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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화재로 5개월 입원했다가 집에 돌아온 존의 모습. 그의 부모가 쓴 책 표지에 실렸던 사진이다./존 오리어리 제공


―이식받을 피부는 본인 피부여야 한다고 들었는데, 화재 당시 온전한 건 두피(頭皮)뿐이었다고요.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제 피부는 모두 (머리를 가리키며) 여기에서 왔습니다. 그 화재를 당하고도 천만다행으로 두피는 괜찮았어요. 의사가 면도기로 제 머리털을 밀고 나서 한 꺼풀씩 벗겨 냈지요. 두피를 가슴으로 등으로 다리로 팔로 옮겨 붙였어요. 어떤 사람들은 저를 보곤 '불쌍한 존'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거울 속 저를 보며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넌 참 복 받았구나.'"

―온몸이 두피로 뒤덮인 사람은 처음 봅니다. 머리털은 가발 아니고 진짜인가요?

"그럼요(웃음)!"

누구에게나 '흉터'가 있다

퇴원해 집으로 돌아온 날 저녁 식탁에서 존은 울음을 터뜨렸다. 손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 있는 상태였다. 어머니는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포크 집어서 먹어." 글러브를 낀 복싱 선수처럼 사투를 벌였지만 포크는 계속 바닥에 떨어졌다.

―왜 울었나요.

“부당하다고 생각했어요. 병원에서 5개월을 견디고 귀가한 날이었습니다. 음식이 푸짐했지요. 그런데 집을 수가 없는 겁니다. 보다 못해 누이가 감자그라탱을 먹여주려 했는데 엄마가 폭군처럼 막았습니다.”

―어떤 의도였을까요.

“삶의 주인이 되라는 충고였습니다. 제가 불편한 몸을 핑계 삼아 타인이 나서서 도와주길 기다리지 않도록 말이지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일러줬던 거예요. 죽지 않는 쪽을 선택하는 것과 진짜 삶을 선택하는 것은 사뭇 다르니까요.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잘 때까지 오늘도 어제처럼, 마치 죽지 못해 사는 것 같은 사람이 사실 많잖아요.”

―온·오프 스위치처럼요?

“네. 제가 보기에 그건 죽지만 않았을 뿐 살아 있는 게 아녜요. 드라마 ‘워킹 데드(Walking Dead)’의 좀비와 같습니다. 늦잠을 자고 허겁지겁 출근해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 돌아옵니다. 산송장에 가깝죠. 저는 그날 포크로 집어 먹기까지 두 시간이 걸렸어요. 음식은 이미 차갑게 식었죠. 끔찍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은 덜 끔찍해졌고 그다음 날은 그보다 또 덜 끔찍해졌지요. 그렇게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어떤 변화였나요.

“궤도 수정입니다. ‘누군가 나를 구원해주겠지’ 막연히 바라며 하루하루 견디는 게 아니라 삶의 시련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는 쪽으로요. 오늘도 아침에 동트는 것을 눈에 담으며 일기를 썼고, 가족을 위해 와플을 구웠고, 사무실까지 운전해왔고, 당신을 만나 악수했습니다. 저는 기저귀도 갈고, 야구공도 던질 수 있고, 피아노도 쳐요. 폭군 같았던 엄마 덕입니다.”

―이 책은 직접 타이핑해 썼나요?

“(자판 두드리는 것을 보여주며) 빠르죠? 강연 초청받아 해외에 갈 때 비행기에서 타이핑을 하면 옆 승객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되죠. 제가 깊은 얘기를 꺼내면 그(그녀)도 그렇게 됩니다. 착륙할 땐 친구가 돼 있어요(웃음).”

―‘온 파이어’가 왜 사랑받았다고 생각하나요.

“제 이야기를 떠벌리려고 쓴 책은 아닙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이런저런 흉터가 생겨요. 독자에게 말을 걸고 용기를 북돋우고 싶었어요. 마치 거울 앞에 서듯이저마다 자신의 그늘진 과거와 만나고 남에게도 꺼내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흉터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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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어리의 가족사진. 부인 베스와 큰아들 잭 등 사 남매가 보인다. /오리어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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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과 북한의 차이

오리어리는 이 대목에서 한국 이야기를 꺼냈다. 한반도에서 6·25전쟁은 이를테면 전신 화상과 같았다는 것이다. 그는 “남한은 그럼에도 번영했는데 북한은 6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했다.

―왜 그런 차이가 생겼을까요.

“다른 요인도 있겠지만 관점이 중요한 것 같아요. 전쟁이든 화재든 치명상을 입은 다음에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말입니다. 불행한 과거에 갇혀 끌려 다닌 나라와 딛고 일어나 미래를 향해 나아간 나라의 차이 아닐까요. 사람이 인생에서 걸어가는 길을 늘 선택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걷는 방식’은 언제나 고를 수 있습니다.”

―끝이라고 생각할 때 끝은 아니군요.

“존 레넌도 말했지만 ‘인생이 아직 괜찮지 않다면 괜찮은 날이 올 겁니다.’ 어지러운 시대엔 우리가 하필 운 나쁘게 최악의 상황에 처했다고 원망하지요. 남한이 그랬듯이 북한도 재건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어요. 북한은 60년 넘게 화살을 밖으로 돌렸습니다. 피해자처럼 굴며 남을 괴롭히고 있죠. 남한이나 미국을 탓하면서요.”

―화재와 흉터에 대해 말하지 않고 살다 10년 전쯤부터 강연을 하기 시작한 계기가 있나요?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요. 그럼 그것들을 감춰야 했죠. 부모님이 2004년에 그 사고를 주제로 ‘엄청난 역경’이라는 책을 100부 만들어 고마운 분들께 선물했어요. 그런데 소문을 타 주문이 쇄도하더니 6만부가 팔린 겁니다. 퇴원 직후 휠체어에 앉아 있는 제 사진이 붙은 그 책 표지를 보고 새삼 충격을 받았어요. 미소와 눈빛이 우울하기는커녕 밝았거든요. 그 안에 뭔가 특별한 게 있다고 생각했죠.”

―여행을 많이 하겠네요.

“1년에 100일은 집을 떠나 있어요. 강연한 뒤 바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탑니다. 그 도시가 싫어서가 아녜요. 강연가나 저자이기 이전에 저는 가장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되고 싶은 건 좋은 남편, 좋은 아빠예요. 그러려면 빨리 귀가해 저녁 식탁에 앉아야죠.”

―청중 앞에서 어떤 말을 하나요?

“몇 년 전 하버드대 연구진이 조사했는데 뉴스 중 94%가 부정적인 내용이라고 합니다. 믿기지 않았어요. 제가 보는 삶은 그렇지 않았으니까요. 강연할 때마다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라. 역사상 이렇게 안전하고 자유롭고 부유한 적은 없었으며 최고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결핍이나 비관보다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 더 집중하고 감사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아침마다 기분 좋으시겠군요.

“24시간마다 ‘새로운 날(new day)’이 찾아오니 굿 뉴스지요. 매일 하나만 더 새로운 경험을 하려고 애씁니다.”

―누구에게 가장 고마운가요?

“먼저 신에게 고맙습니다. 그리고 부모님께 감사하죠. 두 분은 때로 부드럽고 때론 강인했어요. 제가 입원해 있는 동안 형제들은 고아처럼 살았고요. 병원에서는 얼굴도, 성별도, 인종도, 재산도 모르는 분들께 수혈을 받았어요. 화상엔 감염이 치명적인데 의료진은 물론 병원 청소부께도 감사해야죠. 지역사회가, 온 세상이 저를 구했어요. 저는 모두 힘을 합치면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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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오리어리는 남은 손가락 사이에 펜을 끼워 글을 썼다. /박돈규 기자


“너무 멋져! 너무 멋져!”

그는 ‘눈을 뜨라(Wake up)’는 말을 좋아한다. 보지 못하던 것들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뜨라는 말이다. 오리어리는 “간단히 말하면 그리워질 어떤 것, 지금 완벽하지 않은 어떤 것을 알아보는 기술”이라고 했다.

―그런 것들을 깨닫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요.

“당신은 여기서 비행기를 타면 시카고를 거쳐 서울로 돌아가지요? 비행기가 지연돼 시카고에서 하루를 보내야 할지도 모릅니다. 당장은 화가 나겠죠. 하지만 그 도시를 둘러볼 기회로 여긴다면 달라져요. 그렇게 우리는 나쁜 일도 좋은 일로 바꿀 수 있어요.”

―책에서 큰아들 잭(12)이 네 살 때 한 말을 읽고 놀랐습니다.

“거울 앞에서 면도하고 있었는데 제 배를 보고 잭이 말했어요. ‘아빠 배는 빨갛고 울퉁불퉁하고 산마루 같아요.’ 다음 말을 기다리면서 조마조마했어요.”

―왜요?

“인간은 자기 보호 본능이 작동하잖아요. 최악에 대비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잭은 ‘너무 멋져(I love it)! 너무 멋져!’ 환호했죠.

“아이들은 사물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줄 아는 눈을 가졌어요. 어른들처럼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지 않죠. 그 일화에는 내 배의 흉터뿐 아니라 그 시선이 담겨 있지요.”

―한국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면.

“(골똘히 생각하다) 창밖을 보며 문제를 지적하기는 쉬워요. 북핵 문제, 미국·중국과의 관계, 청년 실업…. 덜 쉽고, 덜 인기 있고, 덜 흔하지만 더 중요한 게 있어요. 한국은 지금보다 더 잘 살았던 적이 없고 수명도 2배 늘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가지지 않은 것에 휩쓸리지 말고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봐야죠. 전쟁이나 죽음을 바라는 사람이 있을까요? 한반도 문제에 대해 저는 낙관적입니다.”

―당신 삶에서 가장 큰 성공이라면.

“살아 있다는 겁니다. 정신적으로 터무니없이 부유해졌어요. 그것이야말로 성공이죠.”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그가 차를 운전해 배웅해줬다. 핸들을 잡고 급하게 좌회전할 땐 약간 겁이 났다. 도중에 세인트루이스 명물 ‘게이트웨이 아치’에 들렀다. 미국 동부에서 미시시피강을 건너 서부 개척 시대로 들어가는 관문을 상징한다. 운전하는 오리어리를 보면서 생각했다. 벼랑 끝에 몰렸던 삶도 나무처럼 여러 갈래로 가지를 뻗을 수 있구나. 사지 멀쩡한데 뭔 걱정이람.

[박돈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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