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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항일 변호사, '법률 건국' 주역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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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 김병로' 펴낸 한인섭 교수]

법률가로서의 생애에 초점, 사법부 독립·법관 윤리 강조

민법 등 기본법률 입법에도 힘써

"김상옥 사건 공판의 변론-유조리(有條理) 최열렬(最熱烈)한 김병로씨의 주장…변호사 김병로씨가 일어나서 변론이 시작됐는데 그는 목청을 돋우어 가지고 법정이 떠나갈 만치 소리를 질러 말하되 조선 독립을 희망하는 사상은 조선인 전체가 가진 것이라…."(조선일보 1923년 5월 14일자)

일제 치하에서 항일 변호사로, 광복 후에는 미군정 사법부장과 초대 대법원장으로 우리나라 사법부의 토대를 놓은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1887~1964) 선생의 일대기를 정리한 '가인 김병로'(박영사)가 출간됐다. 한인섭(58)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집필한 이 책은 식민지에서 독립을 위한 학문적 기초 닦기로 법률을 배웠고 이후 폭넓은 경험을 바탕으로 나라를 되찾은 뒤 '법률 건국'의 주역이 된 김병로의 생애를 9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에 꼼꼼하게 담았다.

전라북도 순창의 유림 집안 출생, 의병 활동과 신학문 습득, 세 차례 일본 유학을 통한 법학 공부, 법학교수·판사·변호사로서의 정력적인 활동, 일제 말기의 은둔과 수절(守節), 미군정 참여와 대법원장 취임, 반민특위특별재판부장·법전편찬위원장으로서의 활약, 퇴임 후의 민주 수호를 위한 정치 참여가 차례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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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8월 초대 대법원장 취임 직후 집무실에 앉은 김병로. 그는 1957년 12월 만 70세로 정년퇴임할 때까지 9년 4개월간 재임하며 사법부를 이끌었다. /박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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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명인 김병로는 한국 법조사에서 비견할 인물이 없는 독보적 존재다. 한인섭 교수는 "누구나 수긍하는 이력과 실력을 갖춘 김병로가 첫 번째 대법원장이 아니었다면 행정·입법부에 비해 약할 수밖에 없는 신생국의 사법부가 독립을 지킬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발췌개헌, 4사5입 개헌 등 이승만 대통령의 헌법 파괴에 과감히 맞섰고, 대법원장 퇴임 후에도 국가보안법 파동, 경향신문 폐간 등 민주주의 유린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는 또 사법부 독립을 위해서는 법관이 '선공후사(先公後私)를 넘어 '지공무사(至公無私)'의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 교수는 "청렴강직의 표상이었던 김병로는 우리 법조인과 공직자의 영원한 귀감"이라고 말했다.

또 하나 한인섭 교수가 강조하는 것은 그동안 주목받지 않았던 '입법자(立法者)로서의 김병로'이다. 그는 민법·형법·형사소송법 등 기본법률을 직접 기초했다. 일제 치하에서 피고인의 인권 유린을 절실히 경험한 그는 선진국에는 없는 구속 기간 제한을 설정해 인권 보장의 초석을 놓았다. 다른 나라 민법에 없는 '권리 남용 금지' '신의 성실 원칙'도 그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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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섭 교수는 “우리 법제와 사법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법의 거인’ 김병로를 조명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장련성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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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교수는 "김병로는 일본 유학 중이던 1914년 '이상적 형법의 개론'을 첫 논설로 발표한 뒤 30년 넘게 미래의 법률에 대한 꿈을 꾸었고 이런 고민이 그가 만든 법률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김병로는 일제 치하 최대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했고, 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 간부를 지냈으며, 만년에는 선거에 출마하고 정당을 창당하는 등 정치·사회 활동도 활발했다. 그는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좌·우파를 막론하고 교유의 폭이 넓었으며 통합을 추구했다. 하지만 '가인 김병로'는 그의 정치 활동을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한인섭 교수는 "김병로는 권력을 추구하지 않았고 정치 참여도 민주주의와 헌법 수호를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10년이 걸려 공들여 쓴 책에 '평전'이란 단어를 붙이지 않은 한인섭 교수는 "따지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적 이해와 대화를 통해 존경하는 인물을 안개를 걷어내고 제대로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선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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