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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취재파일] '자비 출전' 박상영이 16강 탈락에도 웃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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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우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박상영이 지난 주말(17~18일) 이탈리아 레냐노에서 열린 국제펜싱연맹 에페 월드컵 16강에서 탈락했습니다. 지난해 이 대회 우승자로서 2년 연속 우승이자, 지난달 스위스 베른 월드컵에 이어 정상 사수를 노렸지만 10위에 그쳤습니다. 그런데도 20일 귀국한 박상영의 목소리에선 특유의 밝은 에너지가 느껴졌습니다.

“희망을 봤어요. 다음 대회가 기대됩니다.”


● 지독한 슬럼프, 터널 끝에서 본 한줄기 희망

리우올림픽에서 깜짝 금메달을 따내며 ‘할 수 있다’ 신드롬을 일으킨 박상영은 이후 지독한 슬럼프에 빠졌습니다. 지난해 11월 세계랭킹 1위에 오른 뒤 국제대회에서 번번이 미끄러졌습니다. 올해 2월 밴쿠버 월드컵과 3월 부다페스트 그랑프리에선 연거푸 64강에서 탈락했고, 지난 7월 라이프찌히 세계선수권에서도 64강 첫 경기에서 당시 세계랭킹 127위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급기야 국내 8위까지 달 수 있는 태극마크까지 잃었습니다. 국가대표 탈락 직후였던 지난 8월에 만난 박상영은 깊은 수렁 속에 빠져있었습니다.


▶[취재파일] '할 수 있다' 박상영과 '메이저 퀸' 김인경, 그들의 지독한 슬럼프

“‘흘린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고 정말 필사적으로 훈련을 했는데...뭐가 문제인지 정말 모르겠어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겠어요.”

얼굴은 어두웠고, 목소리에 힘이 없어 인터뷰를 이어가기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이 슬럼프는 꽤 길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난달 개인 자격으로 자비를 털어 출전한 베른 월드컵에서 박상영은 보란 듯이 다시 정상에 섰습니다. 11개월 만의 국제대회 우승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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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오랜만에 정상에 선 기분이 어땠어요?

A. 엄청 좋았죠. 하지만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아직은 완전히 터널을 빠져 나온 기분은 아니에요. 멀리 빛이 보이는 정도인 듯해요.

Q. 대표 탈락 후 두 달 정도 지났는데,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죠?

A.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제 자신과 대화를 참 많이 했어요. 바둑기사 조훈현 9단의 책 ‘고수의 생각법(2015)’도 도움이 많이 됐어요. 복기(復棋)의 중요성을 배웠죠. 올림픽 전 저는 펜싱이 마냥 즐거웠던 선수였는데, 올림픽 후엔 다른 사람이 됐어요. 주변 사람들의 기대, 많은 사람들의 그런 눈빛, 그 압박감과 부담감에 대회에 나갈 때마다 금메달을 따야 한다는 마음만 가득했어요. 펜싱의 즐거움은 사라지고 절박함만 남았던 거죠. 대표 탈락 후 심리 상담을 받는데, 박사님께서 ‘내가 알던 박상영이 아니다’고 하시더라고요. 제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어요.

Q. 그럼 이제 자신을 찾은 건가요?

A. 마음가짐을 바꿨어요. 그냥 제 경기, 박상영 다운 펜싱을 하려고요.

Q. 박상영 다운 펜싱이 뭔가요?

A. 되게 어려운 질문인 것 같아요. 그걸 찾아가는 과정이에요. 정말 펜싱을 즐기고, 그런 가운데서 폭발력이 터져 나오는 그런 펜싱이 아닌가 싶어요. 올림픽 때는 정말 재밌게 경기를 했어요.

Q. 기술적으로 설명을 한다면?

A. 올림픽 뒤 완벽하게 경기를 하려다보니 허점이 더 많아졌어요. 동작이 커졌고 몸에 힘도 많이 들어갔고, 연결 동작은 부자연스러워졌죠. 이번에는 생각 자체를 좀 줄이고, 제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냥 내키는 대로 경기를 해보려 했어요.

Q. 국가대표가 아닌 개인 자격으로 출전하면 불편한 점이 있나요?

A. 대표팀 형들이랑 같은 호텔에서 지내서 크게 불편한 건 없어요. 사실 좋은 점도 있어요. 대표팀에선 막내로서 해야 하는 게 있거든요. 대표팀 밖에 있다 보니 같은 공간에 있어도 오롯이 제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장점도 있어요. 하하.

Q. 국가대표가 아닌 개인 자격 선수로서 시상대에서 듣는 애국가는 좀 다르던가요?

A. 아니요. 국가대표 선수가 아니어도 여전히 대한민국 국민이기 때문에 전 세계 사람들 앞에서 태극기를 올리고 애국가를 울려 퍼트리는 건 정말 자부심이 느껴지고 자랑스러운 일 같아요.

‘국가 대표로서 애국가를 다시 듣고 싶어지지 않았을까’ 짐작했던 기자를 머쓱하게 한 성숙한 답변이었습니다. 막힘없이 답하던 박상영은 이어서 목표를 묻자 뜸을 들이며 입을 뗐습니다.

“음...지금 솔직히...제 나이에, 이 시기에는... 제가 그렇게 절박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아요. 좀 더 펜싱의 매력을 찾고, 그것을 즐기는 게, 지금 제 나이에 제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다소 머뭇거린 건 으레 다부진 각오를 기대하는 제 눈빛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를 슬럼프로 몰아넣은 그 눈빛이죠. 제가 또 머쓱해졌습니다. 그의 나이 이제 스물 둘입니다.

● "자비 출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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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국가대표에서 탈락한 박상영은 이번 시즌 개인 자격으로 국제대회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국가대표 선수라면 지원 받는 항공료, 숙박료, 대회 출전료 등 참가비용 일체를 스스로 부담해야 합니다. 대회 장소와 기간에 따라 비용이 조금씩 다르지만 한 번 출전할 때 마다 400~500만 원 정도가 듭니다. 대학생 신분으로 부모님께 의지하는 박상영 선수에겐 큰 돈 입니다. 그렇지만 레냐노 월드컵 출전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세계 랭킹 포인트 때문입니다. 지난해 이 대회 우승자였던 박상영이 대회에 불참할 경우, 지난해 우승으로 쌓은 점수를 모두 잃게 됩니다. 대회 직전 오른 손목 염좌로 한때 검을 들기도 힘든 통증을 참고 출전을 강행한 이유입니다.

또 하나는 내년 아시안게임에 대한 기대입니다. 국가대표에서 탈락한 박상영이 계속해서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낸다면 대한펜싱협회가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평가전을 열어 마지막 기회를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명확한 개최 기준이 있는 게 아니라 없을지도 모를 평가전을 위해 계속 국제대회 참가를 강행하기도 쉽지는 않죠. 남은 시즌 국제대회 일정을 모두 소화하기 위해선 3,000만 원 이상이 듭니다. 그래서 이번 레냐노 대회에서 부진할 경우, 남은 시즌 국제대회와 아시안게임을 포기하고, 국내에서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게 현실적인 대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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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은 ‘태극마크 못 따도 고!(Go)'입니다. 박상영은 다음달 도하 그랑프리에 이어 내년 상반기까지 자비로 출전을 이어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번엔 8강에도 못 갔지만 재밌었어요. 지금 기량이면 조금 더 해봐도 괜찮을 것 같아요. 비용을 내주시는 부모님께는 고맙고, 또 죄송하지만 자신이 생겼어요.”

여전히 갈 길이 멉니다. 기존 국가대표보다 낫다는 걸 분명히 증명해 내야 하고, 대한펜싱협회 마음을 움직여 평가전을 열어야 하고, 그 평가전에서 승리해야 아시안게임에 나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박상영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리우올림픽 결승전, 14대 10으로 벼랑 끝에 몰리고도 ‘할 수 있다’를 외치며 펜싱을 즐기던 그때 모습을 서서히 되찾고 있으니까요.



[이정찬 기자 jayce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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