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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와병형’ ‘불신형’ ‘충심형’…‘국정농단’ 피고인 증언거부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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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박근혜 “건강 때문에…” 재판불출석

최순실 “특검 못믿어” 선택적 증언거부

정호성 “대통령 재판서 증언은 고통” 함구

‘삼성’, 증언거부 뒤 피고인신문서 진술번복

안종범, 최다증언으로 ‘출석 모범’



50여명의 피고인이 여러 혐의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국정농단’ 재판에서 오늘의 피고인이 내일이 증인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공범이거나 혐의가 묶여있지만, 시차를 두고 따로 기소되거나(‘삼성 뇌물’ 사건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지시·보고체계에 속해 있는 경우(미르·케이스포츠재단 설립에 관여한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 피고인석에서 뜨기 무섭게 다른 재판에서 증인소환장이 날아든다.

“증언을 거부하겠습니다.” 보통의 증인들과 달리, 자기 재판이 진행 중인 피고인들은 말을 고르는 데 있어 보다 신중하다. 옆 재판에서 한 말이 본인 재판에서 부메랑이 될 수 있는 탓이다. 단순히 “기억이 안난다”는 증언도 객관적 사실과 다를 경우 위증죄로 이어질 수 있다. 형사소송법도 기소나 유죄판결 가능성이 있는 경우 등에 한해 증언을 거부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다만, 막무가내식 증언 보이콧까지 허용되는 건 아니다. 정당한 이유 없는 소환 불응이나 증언 거부는 과태료 등 처분에 처해질 수 있다.

지난해 20일 최순실씨와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이 1호로 구속기소된 이래 1년간 숨가쁘게 달려온 ‘국정농단’ 법정에서 증언을 거부하는 피고인들의 속사정을 정리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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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 5월23일 왼쪽 옷깃에 수인번호 '503번'을 달고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첫 공판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최유진 기자 strongman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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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보이콧’이어 ‘재판 보이콧’… ‘불출석 돌려막기’ 박근혜

18개 혐의가 걸려 있는 박근혜(65) 전 대통령의 증언 회피 방법은 ‘재판 불출석’이다. 그는 5월31일 이영선 전 청와대 행정관과 7월19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에 건강을 이유로 연거푸 불출석했다. 두 재판부 모두 강제 구인장을 발부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검사가 한 시간 동안 설득했지만, 건강상태를 이유로 집행을 강하게 거부했다”고 했다.

증인이 정당한 이유 없이 소환에 응하지 않으면 재판부는 과태료(최대 500만원)를 매기거나 감치·구인할 수 있지만, 구인장 집행도 거부할 땐 별다른 강제규정이 없다. 재판부도 구인장을 재차 내줄 실익이 없다고 판단, 박 전 대통령을 다시 증인으로 부르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은 단 한 차례도 증인석에 앉은 적이 없다. 지난 16일 변호인단이 총사퇴하고, 박 전 대통령 자신도 자기 재판에 불출석하는 등 재판보이콧에 돌입한 터라 앞으로도 그가 증인 선서를 하는 모습을 기대하긴 어렵게 됐다. ‘삼성·롯데 뇌물’ 사건의 경우, 검찰은 박 전 대통령과 재벌 총수의 단독면담에서 부정한 청탁이 오간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대화 당사자가 함구해버리면 간접증거로 유죄를 입증할 수밖에 없다는 점 등을 노린 전략으로 보인다.

다만 증언보이콧이 이어질 경우 본인 재판에 자충수가 될 수도 있다. 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일정 수준의 증언 거부나 불출석은 증인의 정당한 권리지만, 재판부가 강제조치까지 했는데도 불출석으로 일관하면 사법절차를 무시하고 진실 규명을 방해하는 것으로 해석돼 추후 양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여지가 있다”고 했다.

피고인석에서나 증언석에서나 “검찰 불신, 대답 안해” 최순실

박 전 대통령에 버금가게 많은 혐의가 있는 최순실(61)씨도 여러 차례 증인으로 섰다. 본인 재판에서 피고인 발언권을 십분 활용해 검찰이나 증인을 공격했던 그는, 증인석에 서서도 자신에게 불리한 질문에 대해선 “의혹 제기 때문에 힘들기 때문에 엉뚱한 정치적 질문은 피해주셨으면 좋겠다”(3월17일 조카 장시호씨 재판), “광범위한 정치적 질문은 안받겠다”(11월13일 고영태씨 재판)라며 선택적으로 증언을 거부했다.



“증인 박근혜 전 대통령을 언제 어떻게 알게 됐나요?” (고씨 변호인)

“개인 정보라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최순실)

“증인 이름이 이 사건 공소사실에 들어가서 묻는 겁니다.” (변호인)

“증인은 박근혜 전 대통령 정계 입문 전부터 친분 유지해왔고, 입문 후에도 친분 유지했죠? (변호인)

“그게 이 사건과 무슨 관계있죠? 진술을 거부합니다.” (최씨)



최씨는 지난 7월26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에선 박영수 특별검사팀에 대한 ‘불신’을 증언 거부 사유로 들었다. 그에 앞서 12일 딸 정유라씨가 이 부회장 재판서 ‘깜짝 증언’한 것을 두고 특검이 정씨를 강제로 증언하게 만들었단 취지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저는 지난번 재판에 나와서 진술하려 했는데 갑자기 유라가 나와서 혼선을 빚었습니다. 걔를 새벽 2시부터 9시까지 어디 유치했는지 부모로서 당연히 물어봐야 할 사안인데, 검찰에서 얘기를 안합니다. (중략) 특검 조사 때 ‘박근혜 대통령과 경제공동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삼족을 멸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왜 유라를 강제로 데리고 나왔습니까. 지금 이 재판에서 특검한테 증언할 수 없습니다.” (최씨)



최씨가 이 부회장 재판이나 검사의 질문 내용과 동떨어진 발언을 계속 내놓자 재판부가 “이곳은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고 질문에 답변하는 자리”라며 제지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최씨는 “특검에서 여러 가지 갖다 붙여서 뇌물죄로 몰고 가고 있어서 대답하지 않겠다”고 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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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이 지난 1월10일 오후 서울 대치동 특검사무실에 소환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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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심’에 함구하고 ‘충심’을 증언한 정호성

정호성(48)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은 5차례 증언석에 섰지만, 한 차례 입을 굳게 닫았다. 지난 9월18일 박 전 대통령의 ‘공무상비밀누설’(민간인 최순실씨에게 청와대 비밀문건 47건 유출) 혐의 재판에서였다. 다만 박 전 대통령과 공범인 그가 자기 재판에 미칠 악영향 때문에 증언을 거부할 거라는 관측은 빗나갔다. “오랫동안 모셔온 대통령께서 재판을 받는 참담한 자리에서 (증언하는) 고통을 도저히 감내할 수 없다”는 게 정 전 비서관의 증언 거부 이유였다. 그는 검찰과 변호인의 거듭된 질문에도 “증언을 거부한다”는 답으로 일관했지만, 신문 말미엔 발언권을 얻고 7분간 박 전 대통령을 비호했다.



“대통령님께서는 가족도 없으시고, 정말 사심 없이 24시간 국정에만 올인하신 분입니다…. 문건유출사건 관련해서는 저는 오히려 이 사건이 사실 대통령님이 얼마나 정성 들여서 국정에 임하셨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대통령님께서 ‘최순실씨 의견도 한번 들어보는 게 어떻겠냐’는 취지의 말씀도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대통령님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지시하신 것도 아니고, 건건이 뭘 줬는지도 모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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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25일 오후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함께 기소된 장충기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전 차장이 출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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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증’ 피하고 ‘총수 비호’ 노린 삼성, 수확은 ‘글쎄’

증인과 피고인의 ‘말’이 갖는 무게감의 차이를 이용하는 이들도 있다. 이재용(49) 삼성전자 부회장과 최지성(66) 전 삼성그룹 미전실장 등은 지난 6~7월 박 전 대통령 재판에 나와 일관되게 증언을 거부했다. ‘뇌물’ 혐의 수수자로 묶인 박 전 대통령 재판에서 어떠한 발언을 내놔도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들의 신중한 태도는 한달께 뒤 자신들의 형사재판에선 급격히 달라졌다. 장충기(63) 전 미전실 차장은 지난 8월1일 피고인신문 때 삼성이 최씨의 ‘한국스포츠영재센터’를 후원한 경위에 대한 자신의 특검 진술을 번복했다. 특검에선 박 전 대통령과 단독면담을 마친 이 부회장으로부터 영재센터 사업계획서가 든 봉투를 전달받았다고 진술해놓고, 법정에선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줬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특검이 안 전 수석과 만난 장소와 시간을 캐묻자 “봉투를 전달받은 상황 자체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삼성 쪽의 특검 진술 뒤집기는 사흘간 이어진 피고인신문 내내 빈번히 연출됐다.

이를 두고 거짓말을 해도 형사상 문제가 불거질 염려가 없는 피고인신문 절차를 이용했단 분석이 나왔다. 증언이 아닌 만큼 위증죄가 적용될 위험이 없고, 심리의 최종 절차인 피고인신문을 활용해 이 부회장 비호에 총력전을 펼친 것이다. 하지만 ‘막판 진술 뒤집기’는 큰 수확은 거두지 못했다. 1심 법원은 “(영재센터에 대한) 피고인들의 진술 신빙성을 전반적으로 높게 평가할 수 없다”며 이 부회장이 영재센터 지원에 관여했다고 판단했다.

반면 ‘국정농단’ 피고인 중 최다출석 증인은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다. 출석으로만 보면 ‘모범’ 증인이다. 그는 8개 재판에 10차례 증인으로 나갔다. 안 전 수석은 미르·케이스포츠재단 설립, 박 전 대통령과 재벌 총수들의 단독면담 등 실무를 맡은 데다가 박 전 대통령의 지시사항을 꼼꼼히 수첩에 기록해놓은 터라 그를 찾는 법정이 많다. 현소은 기자 s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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