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19 (화)

환자보다 더 아픈 감정노동자, 간호사의 절규

댓글 3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 레이더 뉴스 / 92년생 김지영 간호사 고달픈 하루 ◆

매일경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새벽 4시, 알람이 울린다. 당장 일어나 씻고 나가기도 빠듯한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근무 시간은 오전 7시부터지만, 늦어도 5시 반까지는 병동에 도착해야 한다. 10~15분간 병동 물품을 세고, 담당환자(병원에 따라 일반병동 기준 15~20명)를 체크하는 라운딩을 한다. 전임자가 1분이라도 빨리 퇴근할 수 있게 인수인계를 받으려니 마음이 급하다. 환자들 식사와 약을 챙기고 대소변 및 식사량을 체크하고 회진 준비를 한다. 환자들 스케줄에 따라 업무를 하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른다. 밥 먹을 시간도 화장실 갈 시간도 없다. 근무표상 퇴근시간은 오후 3시지만 이 시간 '칼퇴'는 불가능하다. 오후 1시쯤 이브닝 근무자가 오고, 인수인계를 하면서 3시가 넘어가도 미처 끝내지 못한 업무를 벌충해야 한다. 어느새 오후 5시,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다. 일을 다했는데도 '수샘(수간호사)'을 기다린다. 환자 보고를 하거나, 퇴근하라고 할 때까지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차 한잔하자, 술 한잔하자고 하면 저녁 9시가 넘어가는 건 예사다. 어느 병원은 이 상황에서 춤 연습까지 시켰다던가. 집에 가서 쓰러지듯 누우면서 매일 생각한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때려치워야지." 난 언제까지 간호사로 살 수 있을까. 이 지옥에서 빠져나가기 전에 과로로 죽는 것은 아닐까.

'92년생 김지영(가명)' 간호사의 하루다.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병원에 취업한 3년 차 간호사들의 인터뷰를 종합해 구성했다. 3교대로 돌아가는 8시간 근무도 체력적으로 힘든데, 매일경제가 만난 20여 명의 간호사는 하루 10시간에서 12시간을 근무한다고 답했다. 밥 먹을 시간이 없어 도시락을 시켜먹지만, 오더를 받고 환자를 돌보다 보면 그마저도 먹을 시간이 없다. 많은 간호사가 휴식시간은커녕 '화장실 갈 시간조차 없다'고 호소했다. 한 명이 빠지면 그 업무를 남은 사람들이 고스란히 떠안는 상황이다 보니 '임신 순번제' 같은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당연한 듯 여겨지고 있다.

최근 한림대 성심병원 5곳을 운영하는 일송학원이 재단 체육대회 장기자랑에서 간호사들에게 선정적인 의상을 입고 춤을 추게 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국민적 공분을 샀다. 논란이 계속되자 재단은 지난 14일 윤대원 이사장 이름으로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사과문을 발표했다.

한 종합병원 수간호사는 "본인이나 부모님이 위중한 병으로 입원해 있는데, 담당 간호사가 전날 12시간 근무하고 또 몇 시간 안무 연습하느라 탈진 직전이라고 생각해보라"면서 "게다가 그런 복장을 강요하다니 억장이 무너진다. 성심병원은 전부터 말이 많았는데 터질 게 터져서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서울대병원은 '신입 간호사 열정페이'로 도마에 올랐다. 올해 신입 간호사 월급이 시급 1490원 수준인 36만원이라는 사실이 폭로됐기 때문이다. 올해 시간당 최저임금은 6470원이다. 서울대병원은 "교육기간에도 정식임금을 다 줘야 하는지 몰랐다"고 해명하며 3년 차 미만 간호사들에게만 소급지급하겠다고 밝혔다.

신규간호사 이직률 34%? 체감은 60%

대한민국은 수십 년째 '간호사 구인 중'이다. 병원들은 제발 와달라고 아우성인데, 간호사들은 힘들게 공부해 전문 면허를 따고도 일을 쉰다. 대한간호협회 조사에 따르면 신규 간호사(경력 1년 미만)의 평균 이직률은 34%이고, 현장을 떠나 쉬고 있는 유휴 간호사도 3만6000명이 넘는다. 의료 현장으로 돌아오고 싶어도 살인적인 업무량과 임금 수준을 생각하면 엄두가 안 난다는 것이 간호사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지방 종합병원 26년 차 최 모 간호사는 "신입 이직률이 34%라지만 우리 병원은 체감 이직률이 60%가 넘는 것 같다"며 "신입은 2~3개월 교육기간이 있는데 자꾸 나가고 교육시키고를 반복하다 보니 중견들의 피로도도 극심하다. '1년 내내 교육 중'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말했다.

대한간호협회가 통계청의 '2014 지역별 의료인력현황' 자료를 자체 분석한 결과, 우리나라 활동 간호사는 21만4000명으로 전체 간호사 32만3041명 중 66.2%다. 성별로 보면 여성이 20만6000명, 남성은 8000명이었다. 이들 활동 간호사 가운데 보건기관을 포함한 전체 의료기관에서 근무하는 사람은 14만7210명으로 전체 활동 간호사 중 68.8%였다.

매년 전국 간호학과 203곳에서 1만7000여 명의 졸업생이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원들은 간호사 모시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호소한다. 대형병원들은 '우수 인재를 선점한다'는 명목으로 200~300명씩 졸업생을 뽑아두고 길게는 1년 이상 대기를 시킨다. 처우와 근무여건이 상대적으로 좋은 큰 병원들로 간호사들이 연쇄이직하면서 지방 병원들은 간호사 부족에 시달리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매경이 만난 3년 차 미만 간호사들은 대부분 6개월에서 1년 이상 발령을 기다리며 동네 종합병원이나 검진센터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말했다. 간호사 초임 연봉은 병원 규모와 처우 등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2200만~ 4500만원이다.

간호사는 컴퓨터만 보고 있다고?

매일경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내년 간호간병 통합서비스 전면시행을 앞두고 많은 병원들이 전용 병동을 시범운영 중이다. 간호간병서비스란 보호자나 간병인 없이 간호사·간호조무사 등 의료인력이 24시간 환자를 돌보는 것을 말한다. 대개 간호사 1인당 6~8명을 돌보고 간호조무사 1~2명과 병동도우미 1~3명이 업무를 돕는다. 시범서비스 병원들을 조사한 결과, 환자와 보호자 만족도는 87%로 높았지만, 간호사들은 업무가 더 늘고 감정노동도 가중되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일부 환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호출해 '물 떠 와라, 커피 타라' '쓰레기 버려라, 휴지를 뽑아달라'는 등 돌봄 서비스와 관련 없는 심부름을 시키거나 '내 돈 내고 서비스 받는데 이런 것도 못 해주냐'며 폭언을 일삼기 때문이다. 간호대학 졸업예정자 중 상당수가 간호간병 통합서비스로 업무가 늘어날 것을 우려해 의료 현장이 아닌 다른 취업루트로 눈을 돌리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맡은 업무와 병원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병동의 경우 간호사 1명당 15명에서 20명의 환자를 돌본다. 많게는 30명을 담당한다는 응답도 있었다. 27년 차 종합병원 간호사는 "흔히 '간호사는 와서 한 번 슬쩍 보는 게 전부고 종일 컴퓨터만 들여다보고 있다'고 하는데 기록하고 보고해야 할 내용이 매일 수백 건"이라며 "환자는 약을 받아서 먹는 걸로 끝나지만, 간호사는 오더를 확인하고 급한 약일 경우 올려달라고 약국에 전화하고, 환자에게 드리기 전 부작용과 복용법 등을 확인해 정확한 시간에 가져다주고 이 모든 과정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설명했다. 10년 차 외과병동 간호사도 "막 수술을 끝낸 환자는 수액 달아주고 혈액검사 보내고 소변량 확인하고 마취는 잘 풀렸는지 식사를 해도 되는지 체크하고, 정규투약이나 주사 챙기고 피주머니 비우는 시간 맞추고 담당의사가 확인할 수 있도록 의무기록에 올려야 하는 등 한 명만 담당해도 업무량이 어마어마하다"고 지적했다.

업무 중압감·이중삼중 감정노동

간호사 조직의 고질적 병폐로 지적받는 태움(선배가 후배를 교육하면서 재가 되도록 태운다는 의미) 문화와 임신순번제 같은 어처구니없는 현실도 이 같은 구조에서 기인한다고 간호사들은 말한다. 간호사의 작은 실수가 환자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는 데다 한 명이라도 근무조에서 빠지거나 업무에 태만하면 전체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태움은 '호되게 가르쳐야 제대로 배운다'는 명목하에 감정노동으로 쌓인 본인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도구로 변질되는 경우도 많다. 전직 간호사 최 모씨는 "선배가 마음먹고 태움하자면 '왜 주사를 그렇게 놓느냐' '왜 약을 지금 주느냐'는 식으로 모든 행동에 딴지를 걸며 모욕할 수 있는 환경"이라며 "그때 내가 침묵해서 지금 후배들이 똑같이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럽더라"고 말했다.

27년 차 대학병원 간호사는 "숙련된 간호사를 키우려면 1년, 수술실 같은 특수부서는 3년이 필요한데 그 시간을 버틸 때까지 기다려주지 못하는 것"이라며 "요즘 젊은 층은 자기주장이 확실하고 사생활 간섭 받는 것을 싫어하며 존중받기를 원한다. 후배들과 적극 소통하고 환경을 개선할 방법을 찾는 등 관리자들이 먼저 변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찬옥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