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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인물360˚] ‘귀순환영회’ 부터 ‘노크귀순’까지… 귀순자들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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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360˚]

한국일보

지난 15일 경기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이국종 교수가 총상을 입은 채 귀순한 북한군 병사의 수술결과 및 환자 상태를 브리핑하고 있다. 수원=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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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합동참모본부는 북한 군인 1명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넘어와 귀순했다고 밝혔다. 이 병사의 귀순은 큰 화제가 됐다. 그가 군용 지프차를 타고 남측으로 내려오는 동안 북한군이 40여발의 총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귀순병사는 아주대학교 병원 경기남부권역 외상센터로 이송돼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다.

귀순은 사실 탈북과 같은 의미이지만 주로 북한 군인의 탈북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되면서 더욱 주목 받았다. 귀순이라는 용어가 이렇게 쓰인 이유는 과거 군사정권이 냉전시기 갈등을 이용하기 위해 탈북한 군인을 ‘귀순용사’라 칭했기 때문이다. 귀순자들 중에 환대를 받고 남한 사회에 잘 정착한 사람도 있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귀순환영회’ 열며 환대 받았던 이웅평 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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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2월 25일 미그19 전투기를 몰고 귀순한 이웅평대위가 3월 4일 서울 세종문화화관에서 기자회견 후 만세를 외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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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2월 25일 금요일 오전,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대공 경계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라디오에서는 ‘국민 여러분 이건 실제상황입니다’ 라며 대피를 유도하는 민방위본부의 급박한 안내방송이 나왔다. 북한의 미그19 전투기가 서해 북방한계선을 넘어 남하했기 때문이다. 그날은 한미합동 팀스피리트 훈련을 하고 있어 북한도 준전시상태에 준하는 경계태세여서 긴장이 더 컸다.

초계비행중이던 한국 전투기들이 요격태세에 들어가자 남하하던 미그19기는 날개를 흔들며 투항 의사를 밝혔다. 수원 비행장에 착륙한 미그19기의 조종사는 당시 조선인민군 1비행사단 책임비행사였던 이웅평 대령이었다. 그는 귀순 후 인터뷰에서 “삼양라면 봉지 때문에 탈북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우연히 동해안으로 떠밀려온 삼양라면 봉지를 주웠는데 거기 적힌 ‘판매나 유통과정에서 변질ㆍ훼손된 제품은 판매점이나 본사 대리점에서 교환해 드립니다’ 라는 것을 보고 작은 것 하나도 인민의 편의를 챙기는 남한 사회를 동경하게 됐습니다.”

북한군 장교가 남한 체제를 동경해 자발적으로 귀순한데다 귀중한 군수물자인 전투기까지 끌고 왔으니 당시 전두환 정부로서는 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는 같은 해 4월 여의도광장에서 이씨의 귀순을 축하하는 귀순환영대회를 열었다. 대회에 모인 인원만 130만명이었다. 정부는 이 대령에게 미그기 보상금과 주택 2채를 포함해 당시 약 15억원의 정착 지원금을 주었다.

이씨가 거액의 보상금을 받은 것은 남북한간 체제경쟁 덕분이었다. 1978년부터 시행된 ‘월남귀순용사특별보상법’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이 달성될 때까지 북한괴뢰집단에 항거해 귀순한 동포의 안주를 돕는 한편 자유롭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필요한 보상과 원호를 한다’고 규정했다. 귀순자가 많지 않았기에 이를 늘리고자 보상 규모를 개인당 순금 1,900g∼1만4,500g, 15평이상의 주택 무상공급 등 파격적으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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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4월 14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귀순환영대회에서 이웅평씨가 꽃다발을 들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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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는 남한에 잘 적응했다. 한국 공군 소령으로 특별 임관된 그는 이듬해 공군사관학교 교수의 딸과 결혼해 가정을 이루었다. 귀순을 홍보하는 역할도 톡톡히 했다. 1987년 김만철씨와 가족 11명이 소형 선박을 타고 북한을 탈출한 뒤 망명국을 고민할 때 이씨가 적극 나서 남한행을 설득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평생토록 북에 두고 온 가족 생각에 괴로워했고, 북한 정부의 보복을 두려워 했다. 이씨의 아내는 한 인터뷰에서 남편이 “독극물을 탐지할 수 있는 은제품을 쓰고 이웃에서 주는 떡이나 배달우유를 먹지 못하게 했다”며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지면 주위사람을 모두 의심했다”고 밝혔다. 이씨는 공군 대령까지 진급했지만 2002년 지병으로 사망해 대전 현충원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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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5월 전투기를 타고 귀순한 이철수(오른쪽) 대위가 1983년 귀순한 이웅평(왼쪽) 대령과 함께 기자회견에 참석해 손을 흔들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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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후에도 북한 전투기를 직접 끌고 온 귀순자가 있다. 1996년 5월 23일 귀순한 이철수 대위다.

당시 남북긴장이 극도로 고조되던 때였다. 이씨의 귀순 직전인 5월 17일 북한 경비정이 연평도 근해를 침범했고, 4월에 북한이 비무장지대 보전 규정을 준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발표한 후 3차례에 걸쳐 북한군이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이씨가 전투기를 몰고 올 때도 약 30분간 긴장상태가 이어졌다. 이씨의 남하가 공습인지 귀순인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울에 경보사이렌이 울리지 않아 조순 당시 서울시장이 긴급 사과하고 경보통제소 공무원 4명이 징계를 받았다.

이씨는 “지옥 같은 사회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었다”고 귀순이유를 밝혔지만 인사 불만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 당국이 그의 후임자를 먼저 승진시키고 부대 내 정치지도원이 그를 괴롭혔다는 것이다. 이씨 역시 전투기 인도 대가와 정착금 명목으로 4억7,800만원을 지급받았고 공군에 입대해 2010년 대령으로 진급했다.

‘노크귀순’ 유명인에서 아내 살인미수로 유죄 선고받은 이철호

2008년 4월 27일 경기 파주의 최전방 경계초소(GP)에 낯선 방문자가 나타났다. 북한군 15사단 중위 이철호씨가 이날 북한 철책선에서 남한 철책선까지 걸어와 귀순했다. 그는 철책을 넘은 뒤 속옷을 벗어 흔들고 우리측 전방 초소(GOP) 쪽으로 총까지 쐈지만 반응이 없자 GP까지 가서 “국군 장병”을 부르며 문을 두드렸다고 한다.

이씨는 귀순 이후 방송에 출연해 북한사회의 실태를 알리며 유명해졌다. 그는 북한군의 방첩 및 감찰기관인 보위사령부 장교 출신 중에 첫 번째 귀순자였고 북한군 내막은 물론 우리 군 방비태세의 허술함까지 속속들이 알아 큰 관심을 받았다.

그는 2012년 여성 탈북자 A씨와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아이까지 낳는 등 남한에 잘 정착하는 듯 했다. 그러나 탈북자단체를 통해 취직한 직장에 적응하지 못해 금방 해고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2013년 벨기에 이민을 떠났지만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잃었고 아내와 관계도 틀어졌다.

이씨는 이혼소송 중이던 2014년 경기 평택의 집에서 재결합을 요구하며 다투다가 아내의 목을 졸랐다. 그는 질식해 숨진 줄 알았던 아내가 의식을 되찾으면서 살인미수 혐의로 2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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