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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Why] 미용실 옵션에 '침묵'은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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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윤의 너희가 솔로를 아느냐]

곱슬머리 피러 갈 때마다 가슴 후비는 미용사의 말…"세상에, 이거 밧줄 아냐?"

영양·기장 추가 비용까지 다 받으면서 웬 불평불만…침묵도 좀 부탁드려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영 추레하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차여 삶의 의욕을 잃은 여자 같기도 하고, 도망친 노비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는 추노 같기도 하고, 처마 밑에 옹송그리고 앉아 비를 피하는 삽살개 같기도 하다. 평소와 다름없이 몸단장을 했는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못난 얼굴을 이리 살피고 저리 살피다가 정수리에 눈길이 가닿았다. 그곳에는 새로 자라난 곱슬머리가 라면처럼 바글바글 끓고 있었다. 미용실에 발길을 끊은 지 어언 반년, 배배 꼬인 머리털을 쭉쭉 펴는 스트레이트 파마를 해야 할 때가 오고야 만 것이다. 아아, 어머니! 어찌하여 저를 곱슬머리로 낳으셨나요! 저는 미용실에 가는 게 죽기보다 싫단 말이에요!

조선일보

/일러스트=이주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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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생머리들은 모를 것이다. 서너 시간 동안 미용실 의자에 꼼짝없이 앉아 "언니, 곱슬 진짜 심하다. 머리숱이 어쩜 이렇게 많아요? 어우, 머리하다가 팔 떨어지겠네!" 하는 미용사의 볼멘소리를 듣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 일인지 말이다. 생각 같아서는 "내가 뭐 공짜로 해달랬나? 돈 받을 건 다 받아먹으면서 불평불만 되게 많네. 아니 그리고 말이야, 곱슬이 심하니까 스트레이트 파마를 하지 생머리면 내가 이걸 왜 해? 왜 하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지만, 다시는 그 미용실을 찾지 않는 것으로 소심한 복수를 대신한다. 그러나 어느 미용실에 가도 나를 달갑잖은 손님으로 여기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온갖 수모를 겪으며 이 미용실, 저 미용실을 전전하던 나에게 드디어 단골집이 생겼다. 내가 그곳을 좋아하는 이유는 친절하거나 머리를 잘해서가 아니다. 미용사의 과묵함, 오로지 그거 하나만 보고 간다.

그녀를 처음 마주했을 때 나는 잔뜩 졸았다. 사나운 생김생김과 진한 화장이 위협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늘은 또 어떤 잔소리를 들으려나. 불안한 마음으로 거울 앞에 앉았다. 그러나 그녀는 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쓱쓱 빗어 내리고 한 손에 그러쥐어 보더니 아무런 말 없이 작업에 착수했다. 수세미 버금가는 머리털과 몇 시간 동안 씨름을 벌이느라 콧잔등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으면서도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그녀의 무뚝뚝한 친절이 고맙고 또 미안했다. 이번에도 염치 불구하고 그녀의 신세를 지고자 그리로 향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람. 굳게 잠긴 미용실 문 위에 '영업 종료'라는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나는 아쉬운 마음에 어차피 열리지 않을 문을 괜스레 밀어 보았다. 텅 빈 미용실 안쪽에서 종소리가 딸랑 희미하게 들려왔다.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버리다니. 과연 그녀다운 마지막이었다.

하는 수 없이 다른 미용실로 발길을 옮겼다. 파리만 날리던 영업장에 내가 들어서자 미용사가 들뜬 목소리로 나를 반겼다. 날씨 얘기부터 시작해서 식사는 했는지, 찾아오기 힘들지는 않았는지, 녹차가 좋은지, 커피가 좋은지 이것저것 정신없이 물어왔다. 그리고는 눈썹으로 여덟 팔(八) 자를 그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고객님, 평소에 헤어 에센스 안 바르시죠? 여기 보세요. 죄다 상했잖아. 이거 영양 추가 안 하면 녹아버려요. 길이가 기니까 기장 추가도 들어갈게요. 어머나 세상에, 이게 머리카락이야, 밧줄이야!" 나는 정말 말하고 싶었다. "혹시 침묵도 추가되나요? 아무리 비싸도 좋으니까 그것도 좀 부탁드릴게요"라고 말이다.



[이주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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