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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기고]피아노 음악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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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버나드 쇼는 피아노가 가장 완벽한 악기며 피아노의 발명이 음악에 안겨준 의미는 활자출판기술의 등장이 문학에 안겨준 의미와 같다고 했다. 피아노는 표현력이 탁월할 뿐 아니라 어떻게 보면 책상처럼 생겨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작곡가가 피아노 앞에 앉아 창작을 한다. 피아노 음악뿐 아니라 모든 장르의 음악이 피아노를 거쳐 탄생하는 셈이다. 성악과 거의 모든 악기 연주의 반주에 피아노가 사용되는 데 다른 어떤 악기도 그 역할을 하지 못한다. 크고 무거워서 들고 다닐 수 없다는 점이 유일한 단점이다.

2014년 영화 ‘그랜드 피아노’ 반지 시리즈의 엘리야 우드가 라흐마니노프의 현신 톰 셀즈닉이라는 피아니스트로 등장한다. 세상에서 가장 연주하기 어려운 ‘라 신케트’(La Cinquette)라는 곡을 한 음도 틀리지 않고 연주한 후 마지막 네 음을 짚으면 뵈젠도르퍼 피아노(발렌티나 리시차와 마에 정명훈씨의 피아노다) 안에 설치된 복잡한 기계장치가 작동하고 그 결과로 피아노 속에 감추어져 있는 열쇠가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실제로 올해 영국에서 피아노 조율사가 어떤 피아노 안에서 우리 돈 7억원이 넘는 금화를 발견해 화제가 된 적도 있다.

그 열쇠는 거액의 유산을 남기고 타계한 전설적 피아니스트의 스위스 은행 대여금고를 여는 열쇠다. 존 쿠삭이 그 열쇠를 노리고 우드를 협박한다는 설정이다. 셀즈닉은 오케스트라와 협주곡을 연주하면서 범인과 교신하고 친구와 전화통화도 하는데 가히 멀티 태스킹의 종결자라고 하겠다.

피아노 속에 스위스 은행 대여금고를 열 수 있는 열쇠 말고 또 뭔가가 들어 있을까. 있다. 피아노 안에는 광활한 우주공간 어디서나 통할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의 키가 들어있다. 피아노는 수학과 같이 우주의 절대언어인 음악을 창조하는 옥타브를 시각적으로 화체한 유일한 악기다. 흑백으로 배열되어 있는 88개의 건반은 자연의 완벽한 질서를 상징한다. 도(C) 키와 한 옥타브 위 도 키의 진동수 차이는 정확히 2배고 그 사이 백색 건반들이 내는 소리의 진동수는 9/8, 5/4, 4/3, 3/2, 5/3, 15/8 의 선형(linear) 질서를 이룬다. 해마다 영국 남부에 출몰하는 미스터리서클에도 이 법칙에 따른 것이 많다.

요즘 국제무대에서 한국 젊은 피아니스트들의 활약이 대단하다. 국제 피아노 콩쿠르 입상자들만 보더라도 차이콥스키콩쿠르 2위에 빛나는 손열음, 쇼팽콩쿠르 3위 임동혁, 쇼팽콩쿠르 우승 조성진, 리즈국제콩쿠르 우승 김선욱, ARD국제콩쿠르 3위 김다솔, 리스트국제콩쿠르 2위 홍민수, 밴클라이번콩쿠르 우승 선우예권(모두 존칭 생략) 등 화려한 라인업이 1974년 정명훈씨의 차이콥스키콩쿠르 2위의 계보를 잇는다. 특히 지난 4일 랑랑을 대신해서 사이먼 래틀이 지휘하는 베를린필과 첫 협연을 마친 조성진의 모습은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나아가 손열음, 김다솔은 세련되고 전문적인 필치로 음악의 세계를 풀어나가면서 필자와 같은 고전음악 팬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선사함은 물론이고 후배들을 꼼꼼히 교육하고 있기도 하다. 글쓰기 최고의 영감은 마감시간이라는 손열음의 말은 ‘하늘 아래 시간에 쫓기어 나오지 않은 명문은 없다’는 중국 옛말을 연상시킨다. 피아노 음악을 포함해서 자기 분야에서 최고를 달리는 사람들이 시간에 쫓겨 가면서 생각이나 경험을 글로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글은 누군가에게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문을 열어주는 열쇠고 좋은 글은 악보처럼 우리 마음속에 맑고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를 내게 한다. 무엇보다 글은 피아니스트가 연주로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듯이 글 쓰는 이 자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마거릿 미첼이 “내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나는 책을 써내려갔다”고 했듯이.

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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