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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7 (수)

[유엔 문서로 본 한국 재건사] 전염병·기아 퇴치 '또 다른 전쟁' 수행… 피란민들의 '구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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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민간인 구호·구제활동 지원 UNCACK/美 극동군사령부 보건실태 점검 결과/장티푸스·천연두 등 전염병 위험 결론/4개 전염병원 예방접종·방역활동 나서/한국전 피란민·전쟁피해 인구 250만명/전체 인구 15%가 유엔의 구제 활동 대상/전 세계 33개국·유엔 산하기구 구제 동참/美육군 제8군사령부 예하조직으로 창설/미군 준장이 처장 맡고 도별로 책임자 둬/국제기구도 인력파견… 평화유지군 모태

대한민국은 유엔 등 국제사회의 원조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탈바꿈한 유일한 나라라는 평가를 받는다. 1945년 해방과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1950년 6·25전쟁의 발발과 유엔군의 참전, 1953년 정전(停戰) 이후의 대한민국 발전은 유엔(UN·국제연합)의 협력과 지원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유엔 공식문서와 기록은 한국 현대사의 보고(寶庫)다. 숙명여대 글로벌거버넌스연구소(소장 최동주)는 지난해 한국학진흥사업단 지원으로 국내외에 산재한 유엔의 대(對)한국 지원에 대한 문서와 기록을 수집 및 해제(解題)하는 연구사업에 착수했다. 이 사업에는 대학 교수와 국책연구소 선임연구위원 등 유관분야 국내 최고 권위자 38명이 참여했다. 연구팀은 지난 1년여 기간 동안 300만건 이상의 사료를 확인하고 이 중 약 3만건을 수집해 1만건을 분석한 상태다. 이들 자료를 토대로 세계일보는 24일 유엔 창설 72주년을 맞아 숙대 글로벌거버넌스연구소와 ‘유엔 문서로 본 한국 재건(再建)사’(1945∼1965) 시리즈를 시작한다.

세계일보

6·25전쟁 당시 주한유엔민사지원처(UNCACK)의 주 활동은 한국인에 대한 예방접종과 방역이었다. 사진은 UNCACK 소속 한국인이 한 소년에게 방역을 위해 살충제의 일종인 DDT(디클로로디페닐트라클로로에탄)를 뿌리는 모습. 국립중앙연구원 제공


6·25전쟁 기간 동안 폐허와 공포에서 고통받던 한국인에게 유엔군은 그야말로 구세주였다.

한국의 공산화를 저지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지만 전염병과 기아(飢餓) 퇴치라는 또 다른 전쟁에서도 큰 도움을 줬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에서는 전쟁 통에 죽을 확률도 높았지만 전염병과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이러한 상황은 주한(駐韓)유엔민사(民事)지원처(UNCACK·United Nations Civil Assistance Command in Korea)가 1950년 10월 19일자에 작성한 특별보고서에 고스란히 담겼다. 1950년 6월부터 1951년 9월 30일까지 약 15개월 동안 유엔군이 수행한 보건, 복지, 경제원조, 민간 구호물자 지원 등 7개 분야 업무를 상세히 정리한 것이다. 이를 통해 유엔군이 시행한 민사작전(군과 민간인의 상호 관계에 따른 제반 활동)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다.

◆전염병과의 전쟁 활동 수행

1950년 9월. 공산군 남하에 따라 방어선이 대구 지역에 구축될 무렵 일본에 있던 미국 극동군사령부(FECOM)에서 크로포드 샘스 준장이 한국을 방문해 한국인의 보건위생실태를 체크한다. 그는 더글러스 맥아더 총사령관의 보건위생 참모였다. 그는 조사를 통해 당장 식량 배급에는 큰 문제가 없지만 공산군 점령지역에서 탈출하는 피란민이 대량으로 늘어나면서 방어선 이남에서 전염병 발생 위험이 크다는 결론을 내렸다. 예상되는 전염병 위험은 발진티푸스, 장티푸스, 천연두, 콜레라로 진단됐다. 이에 따라 UNCACK는 세계보건기구(WHO)의 지원을 받아 1951년 9월 30일까지 4개 전염병원(病原)에 대한 예방접종과 방역활동에 나섰다.

1951년 9월 30일 기준으로 작성된 UNCACK의 한국인 전염병 예방접종 및 방역 활동 실적을 보면 당시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예방접종 인원은 발진티푸스 한국 전체 인구의 68%에 달하는 1451만5630명을 비롯해 장티푸스 1890만3358명(88%), 천연두 1532만4748명(72%), 콜레라 179만331명(91%·항구 주민만 대상)에 달했다. DDT(디클로로디페닐트라클로로에탄) 방역도 1531만4000명에게 이뤄졌다.

한국인에게 전쟁만큼이나 전염병은 큰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1939년 살충제로 개발된 DDT는 농작물에 피해를 최소화하고 발진티푸스와 말라리아의 발병률을 크게 저하한 일등공신으로 주목받았다. 1970년대 초부터는 환경오염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전 세계에서 사용이 금지됐다.

세계일보

◆기아 퇴치를 위한 피란민 구제활동

1950년 9월까지 대구와 인근 지역에 피란민 30만명 정도가 모여들자 UNCACK는 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데 골몰했다. 주로 담요, 텐트, 우유, 비누, 내의 등이 제공됐다. 1951년 9월 1일 당시 한국 인구는 약 2000만명으로 추산됐다. 이 중에서 북한 지역에서 온 피란민이 약 48만명. 한국지역에서 발생한 피란민과 전쟁 피해 인구가 약 250만명 정도로 추산됐다. 전체 인구의 약 15%가 유엔의 구제활동 대상이었던 셈이다. 구호물품 제공과 인력 지원에 동참한 나라도 33개국에 달했다.

유엔 산하 국제기구들과 미국 비정부단체(NGO) 단체의 지원도 빼놓을 수 없다. WHO, 국제난민기구(IRO·지금의 UNHCR), 세계아동기구(UNICEF·유니세프), 국제원조구호기구(CARE), 세계적십자연맹, 미국의 동양선교회, 미국 어린이구제연맹(Save the Children Federation), 미국 퀘이커봉사위원회(American Friends Service), 영국 여성기독교협회, 노르웨이 난민기구 등이다.

유엔 이름으로 펼쳐진 민간 구호활동은 이처럼 포괄적이며 총체적이었다.

군인들은 DDT 통을 등에 짊어지고 피란민들 소독에서부터 의료지원, 식량 배급, 주거시설 복구 등 기아와 질병, 전쟁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제하는 활동에 힘을 쏟았다. 이런 구제활동의 결과 한국 인구가 성장하는 계기를 맞을 수 있었고, 이것이 비약적 경제성장으로 이어지는 요인이 될 수 있었다. UNCACK가 작성한 특별보고서에도 “보건위생 측면에서 유엔군의 활약으로 많은 수의 인구가 죽음에서 구제될 수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평화유지군의 모태, UNCACK

UNCACK는 유엔군이 인천상륙 후 38선을 돌파해 이북 지역으로 공세를 벌이던 1950년 10월 30일 한국 주둔 미국 육군 제8군사령부 예하의 별도 조직으로 창설됐다. 이전에는 유엔군사령부 예하의 보건복지파견대(UN Public Health and Welfare Detachment)에서 한국인 구제 및 구호활동을 펼쳤다. UNCACK는 유엔이 지향하는 정신과 이념을 그대로 따랐다. UNCACK 처장은 현역 미군 준장이었고, 도별로 위관급이나 소령급 책임자를 두고 임무를 수행했다. 한국 민간인을 현지에서 고용해 일정 수준의 임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UNCACK에는 민간인 구호와 구제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유엔 산하 단체에서 파견된 전문가들이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1951년 8월 13일 아서 도슨 소령이 작성한 보고서에는 유엔을 포함해 국제기구에서 파견된 51명의 명단이 나온다. 이들이 수행한 역할을 보면 UNCACK는 지금의 유엔평화유지군의 모태였다고도 할 수 있다.

박병진 군사전문기자 worldpk@segye.com

취재지원=숙명여대 글로벌거버넌스硏 이민룡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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