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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입 꾹 다문 김정은 진짜 속마음 "난 이제 트럼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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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난 트럼프와 동급이다”

[월간중앙] ‘로켓맨’ 김정은, 한 달 묵언의 속내





트럼프 아시아 방문, 시진핑 당대회 앞둔 ‘고슴도치’ 모드…말폭탄으로 존재감 높인 후 미·중의 대응 지켜본다

한반도 정세를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는 인물은 결국 한 명이다. 평양 주석궁에 앉아 있을 33세의 리더, 김정은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을 향해 막말을 쏟아낸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결국 김정은이 지시하는 북한의 도발에 대한 리액션(reaction), 즉 반응에 불과하다. 리액션이 아닌 액션(action)을 자발적으로 하고 있는 인물은 김정은뿐이다. 그의 액션은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 나아가 전 세계 판도까지 흔들고 있다. 트럼프 미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을 앞둔 지금, 김정은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의 마음속을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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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이 9월 21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을 향해 ’늙다리 미치광이“라고 부르는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전날 ’(북한을) 완전히 파괴시키겠다“고 발언한 데 대한 맞불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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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대북 포위망은 촘촘하다. 지금까지 공개된 그의 일정에 따르면 외교적 대북 압박작전의 하이라이트는 서울이다. 트럼프는 문재인 대통령과 회담을 하고 국회를 방문한다. 당초 비무장지대(DMZ)를 방문하는 안도 검토됐으나 북·미 간의 설전(舌戰)으로 팽팽한 긴장 관계 등을 고려해 철회했다고 한다. 대신 트럼프 대통령은 국회 등에서 대북 정책에 방점을 찍는 연설을 할 것이라고 백악관은 발표했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10월 15일 워싱턴 소식통을 인용해 그 연설의 골자를 미리 밝혔다. 북한이 핵·미사일 개발을 완전히 포기하도록 촉구하고, 북한에 대한 군사적 조치를 포함해 모든 옵션을 검토한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한·일을 미국의 핵우산으로 방어한다고 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미 수차례“(군사 공격을 포함한) 모든 옵션이 테이블 위에 있다”고 공언해온 트럼프이지만 그 발언을 김정은의 코앞에서 한다는 건 큰 의미가 있다.

트럼프는 일본 방문에서도 북한 관련 이슈에 상당부분 시간을 할애한다. 초 단위로 움직이는 정상외교 일정을 쪼개가며 일본의 납북 피해자 가족을 만날 예정이다. 바다 건너 중국에도 북한은 협상 테이블의 메인 메뉴가 아닐 수 없다. 대북제재에 가장 중요한 열쇠를 쥔 국가가 중국이기 때문이다.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은 9월 30일 사전 조율을 위해 베이징을 방문한 자리에서 “(트럼프 방중에서) 북핵 문제는 반드시 논의될 것”이라고 못박았었다.

동남아에서도 트럼프는 북한에 대한 고삐를 더욱 죌 것으로 보인다. 동남아가 어떤 곳인가. 전통적으로 북한의 우방으로 분류되는 국가가 다수다. 북한이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참가하는 국제회의가 동남아 국가들이 모이는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이다. 이번에 트럼프가 방문하는 필리핀은 더욱이 북한의 주요 교역국 5위 안에 드는 곳이다. 필리핀의 대북 수출품목 중 절반 이상이 핵·미사일 개발에 활용될 것으로 우려되는 집적회로 기판 또는 컴퓨터 제품들이다. 베트남 역시 사회주의 가치를 공유한 북한의 우방이다.

이런 아세안(ASEAN) 국가를 상대로 미국은 이미 수개월 전부터 대북 압박과 관련해 정지작업을 해놓은 상태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이 10월 8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ARF를 다녀가면서다. 틸러슨은 북한을 ARF에 ‘출입 금지’시키는 방안까지 논의했다고 한다. 이런 여파 속에서 ASEAN 국가들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가 9월 11일(현지시간) 통과시킨 대북제재 결의 2371호를 적극 따르겠다고 공언했다. 알란 카예타노 필리핀 외교장관은 유독 동작이 빨랐다. 그는 제재가 통과된 직후 “필리핀은 경제 제재를 포함한 대북 안보리 결의를 전면 이행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의 방문은 화룡점정이 되는 구도다. 트럼프의 이번 아시아 방문이 그의 북한 포위 작전의 완성 단계라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다.

당 중심 정치하는 김정은, 당 창건일에 침묵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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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의 한·중·일 및 필리핀·베트남 방문을 바라보는 김정은의 속내는 복잡하다. 김정은은 올해에만 14차례 미사일 도발을 하고, 9월 3일엔 6차 핵실험을 강행했지만 그 이후로는 한 달가량을 잠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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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북한은 숨을 죽이고 있다. 월간중앙 11월호 마감일인 10월 16일 자정까지 김정은은 침묵을 지켰다. 지난 9월까지 숨 가쁜 도발 릴레이를 펴온 것과는 사뭇 다른 패턴이다. 북한은 올해 2월부터 모두 14차례의 미사일 도발을 감행했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이 10월 13일 국정감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올해 14차례의 도발에서 북한이 쏜 탄도미사일은 총 19발이었다. 여기엔 미국 본토를 겨냥한 장거리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이라고 북한이 주장하는 화성-12형과 화성-14형이 포함돼 있다.

이게 끝이 아니다. 9월 3일,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함경북도 풍계리에서 6차 핵실험을 진행했다. 북한 정권 수립 기념일인 9월 9일을 앞두고 전격 감행한 도발이다. 지난해 9월 9일 당일에 5차 핵실험을 강행했던 것보다 시점을 빨리 조절해 국제사회의 허를 찌른 셈이다. 핵실험 이후에도 김정은은 미사일 도발을 한 번 더 했다. 9월 15일 평양 순안공항에서 화성-12형을 다시 쏘아올렸다.

그런데 그 이후가 문제다. 한 달 넘게 침묵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북한이 올해 2월 이후 미사일 도발을 한 달 이상 넘긴 적이 없었다”며 “추가 도발 시점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북한은 김정은의 결심만 있으면 언제든 도발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점은 김정은이 10월 10일 노동당 창건일도 건너뛰었다는 것이다. 선군(先軍)정치를 편 아버지 김정일과는 달리 김정은은 집권 후 권력의 무게중심을 노동당으로 복원하는 행보를 보여왔다. 지난해 5월 김정일 시대엔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노동당 대회를 부활시키기도 했다. 이 당대회에서 그가 ‘노동당 위원장’에 취임한 것을 두고 ‘김정은의 셀프 대관식’이란 얘기도 나왔다.

이렇듯 당 중심의 정치를 해온 그이기에 ‘쌍십절’로 불리는 노동당 창건일(10월 10일)은 도발의 호재로 읽혔다. 직전까지 트럼프와 말폭탄을 주고받으며 긴장 수위를 한껏 높였던 그였다. 그럼에도 김정은은 한 달 넘게 도발 카드를 꺼내지 않고 있다. 누가 봐도 도발의 최적화된 호재였던 당 창건일에 침묵을 지킨 건 의미심장하다.

김정은은 젊지만 용의주도하다. 타이밍의 중요성을 잘 안다. 그가 결심하는 도발의 타이밍은 그가 철저하게 계산한 결과다. 김영수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김정은이 어리고 비이성적인 리더라는 생각은 접는 게 좋다”고 조언한다. 북한전문가인 김 교수는 “김정은의 지휘하에 북한이 실행하는 도발의 시점 및 방법은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검증된 것”이라고 단정했다. 나아가 “북한이 대외적으로 선택하는 언어 역시 고르고 골라 쓰는 경우가 많다. 김정은의 의사결정은 꽤 이성적이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리셋 코리아 통일분과 위원이기도 한 박영호 강원대 정치외교학부 초빙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김정은은 확실히 젊다. 어리고 어리석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버지나 할아버지와 달리 과감한 면이 있다는 의미다. 6차 핵실험까지의 패턴을 보면 김정은이 사실 과감한 돌파력을 선보였음을 알 수 있다. 고모부 장성택을 숙청하는 과정에서도 나타났듯, 김정은은 사뭇 저돌적이다. 그러나 그를 단순하고 성격이 나쁜 젊은이로만 보면 안 될 일이다. 김정은은 단순하지 않다.”

그렇다면 9월 중순 이후 한 달간 도발 휴지기를 가진 김정은의 속마음은 뭘까. ‘의도적인 숨 고르기 국면’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2월부터 바삐 달려온 김정은이 한 템포 쉬면서 트럼프의 아시아 방문을 앞두고 전략을 구상하며 잠시 쉬어가는 단계라는 얘기다.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을 지낸 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가 분석한 ‘김정은의 속마음’은 지금 이렇다.

“올 한 해 할 만큼 했다. ICBM을 발사함으로써 미국이 이제 우리 공화국을 제대로 보게 됐다. 우리는 이제 미국과 동급이다. 6차 핵실험과 14차례 미사일 발사로 우리 기술도 마음껏 보여줬다. 이제 마감 단계다. 내 심기를 건드리면 재미없다. 그런데 트럼프라는 작자가 문제다. 전임 대통령들과는 달리 어디로 튈지 모르겠다. 상대하려니 숨이 찰 지경이다. 잠시 숨을 돌려야겠다.”

김정은의 속마음 “이제 난 트럼프와 동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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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의 침묵은 트럼프의 아시아 방문만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 다목적 포석의 숨 고르기라는 분석도 있다. 미국뿐 아니라 중국도 숨 고르기의 주요 요소라는 설명이다. 10월 18일부터 진행되는 제19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자대회(당대회) 때문이다. 이 대회는 중국 공산당의 최상위 회의체로 앞으로 5년간 중국을 이끌고 갈 최고 정치권력 집단의 윤곽이 드러나는 자리다. 10월 15일 중국 출장을 마치고 귀국한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지금 중국의 관심은 온통 당 대회에 쏠려 있다”고 중국의 분위기를 전하며 “북·중 관계가 껄끄럽다고는 해도 북한으로선 중국의 차기 권력이 선출되는 시기에 도발이라는 찬물을 끼얹고 싶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론도 있을 수 있다. 김정은이 특히 올해 들어서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직접 챙겨온 국제 행사 때마다 도발한 전례가 있기에 이번에도 중국의 당대회는 김정은에게 중요한 고려 대상이 아닐 거라는 시각이다. 실제로 김정은이 6차 핵실험의 단추를 눌렀던 9월 3일은 중국 남부 샤먼시에서 브릭스(BRICS,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의 신흥 경제 5개국) 비즈니스 포럼이 개막한 날이었다. 시 주석이 개막 연설에 나서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개막 연설을 몇 시간 앞두고 북한 풍계리에서 인공적 지진이 발생했다는 뉴스가 타전됐다. 결국 스포트라이트는 시 주석이 아닌 김정은이 받게 됐다. 김정은이 이를 몰랐을 리 만무하다. 의도적으로 도발 시점을 선택한 것이다. ‘날좀 보소’식 도발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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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은 11월 3일 취임 후 첫 아시아 순방길에 오른다. 문재인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연달아 만난다. 이들의 공통 어젠다는 북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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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의 시 주석 골탕 먹이기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지난해 9월 항저우에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진행되는 와중에 동해상으로 미사일 3발을 쏘면서 시 주석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 중국의 대북 통제력이 그만큼 떨어졌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의 이번 당대회는 다르다. 중국의 미래권력이 결정된다. 북한도 전략적으로 숨을 죽이고 향방을 살필 필요가 있다. 김용현 교수는 “김정은이 아무리 이판사판이라고 해도 이번 중국 당대회를 겨냥해 도발을 한다면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며 “(2011년) 집권 후 시진핑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김정은으로서도 신중하게 움직이기 위해 계산기를 두드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 의미에서 김정은의 침묵이 더 길어질 거라는 분석에 무게가 실린다.

9월부터 한 달간 내부 결속에 집중한 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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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7일 28세의 나이로 당 중앙위 정치국 후보위원 자리를 꿰찬 김여정(왼쪽). 김정은과 생모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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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문제에서 확실한 단언은 가능하지 않다. 트럼프가 목전에 와 있는 때라고 해도, 시진핑이 차기 권력구도를 짜고 있는 동안이라고 해도 북한의 도발은 언제든 허를 찌를 수 있다. 김영수 교수는 “남북정상회담의 주역인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2009년에도 북한은 2차 핵실험(5월 25일)을 했다”고 소개했다. “한·미 연합 해상 훈련이 실시되는 10월 16일부터 4~5일 내로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할 수도 있고, 트럼프의 아시아 방문이 끝난 뒤 ‘미국이 우리를 도발했다’며 액션을 취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한·미 연합 훈련은 북한에 항상 도발 호재로 작용해왔다. 10월 16~20일 훈련 기간엔 미국의 핵추진 항공모함인 로널드 레이건함 등 전략자산이 총출동한다. 김영수 교수는 “북한은 미국이 한·미 연합 훈련을 하면 단거리 미사일로 ‘접근 거부형’ 도발을 해왔고, 미국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ICBM급 ‘접근 과시형’ 도발도 했다”고 말했다.

박영호 교수도 “트럼프와 서로 ‘미치광이’라는 막말까지 주고받은 김정은이 조용히 있지는 않을 것”이라며 “김정은은 자신이 트럼프에게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는 것만은 싫을 것”이라고 말했다. D데이로 꼽혔던 당 창건일을 그냥 보낸 김정은은 지금, 다음 도발의 타이밍을 결심하기 이전에 여러 경우의 수를 놓고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을 터다.

김정은은 사실 당 창건일 즈음 다른 일로 바빴다. 인사(人事)다. 그는 10월 7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2차 전원위원회를 소집해 당 중앙위원회 인사를 발표했다. 핵심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김정은의 28세 여동생인 김여정이 당 정치국 후보위원 자리에 앉음으로써 서열 30위권에 진입했다는 점이 이목을 끈다. 당 정치국 후보위원 중에선 최연소다. 둘째로는 김정은이 철저히 자기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선별해 감투를 씌워줬다는 점이다. 셋째로는 조연준(80)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과 김기남(88) 선전선동부장 등 아버지 시대부터 이어온 고령의 충신들을 밀어냈다는 게 특징이다. 김정은 자신이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자기 사람들로만 당 조직을 채워나가고 있는 것이다.

혈육이라는 이유만으로 김여정을 특별 대우한 건 아니다. 김정은은 아무리 혈육이라도 가차 없다. 지난 2월 이복형인 김정남을 암살하고 2013년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하기도 했다. 김여정은 김정은에게 각별하다. 김정은과 생모(고용희)가 같은 데다 어린 시절 서러운 추억도 함께 나눈 사이다. 김영수 교수는 “김정은과 김여정은 할아버지 김일성에게 고용희가 인정받지 못하고 원산에서 살았던 시절을 나눈 사이”라며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김정은의 아킬레스건은 김일성과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다는 것이다.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부분이기에 김정은에겐 아픈 상처이고, 이를 공유하는 김여정이라는 존재는 각별할 것이다.” 남성욱 교수도 “김여정은 배우자가 아직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상당히 액티브한 스타일”이라며 “김정은 입장에선 동생이 뭔가 해보겠다고 하는데 말릴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김여정은 김정은과 코드도 맞고 권력을 만끽하는 스타일이되, 오빠보다 자신을 항상 낮추는 명민함을 갖추고 있다는 게 남 교수의 분석이다.

김여정은 사실 이번에 공식적으로 정치국 후보위원 직함을 받았을 뿐 그 이상의 파워는 김정은 시대의 개막과 함께 가져왔다고 보는 게 맞다. 지난해 당대회 등을 비롯한 각종 공식행사에서 김정은의 지근거리에 서서 꽃다발을 대신 받아 들거나 행사 전반을 총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번 당 전원위원회의 인사 역시 김여정의 작품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대를 이은 충신 최용해에게 당 중앙군사위원회위원과 당 부장을 추가로 맡긴 것은 물론, 김정은 집권 초기부터 ‘돌격대장’ 격이었던 박태성과 김정은의 이미지 메이킹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최휘가 모두 정치국 후보위원 겸 당 중앙위 부위원장에 합류했다. 집권 초부터 자신의 측근이었던 인물을 전면으로 본격 내세운 것이다. 김용현 교수는 “트럼프가 전방위적으로 대북 압박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상황에서 김정은은 일단 자신의 정치적 안정성을 먼저 다지는 선택을 했다”고 말했다.

김정은의 속 끓게 하는 건 다름 아닌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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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판 걸그룹으로 불린 모란봉악단은 지난달부터 약 한 달에 걸쳐 북한 곳곳에서 공연을 열었다. 대북 제재로 경제난이 가중되는 것을 우려한 김정은이 주민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만든 이벤트라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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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중앙위원회에서 김정은이 인사만 한 건 아니다. 김정은이 별도로 강조한 건 두 가지다. 첫째는 자신의 ‘대표 상품’ 격으로 생각하는 핵·경제 병진 노선에 박차를 가하라는 독려, 둘째는 자력갱생으로 제재를 극복하자는 메시지다. 김정은은 이런 내용을 발표하면서 주먹까지 불끈 쥐어 보였다.

김정은이 주먹을 쥔 사진은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과 관영 <조선중앙통신> 등에 게재됐다. 북한이 이런 공식 매체를 통해 공개하는 사진들엔 모두 메시지가 있다. 주먹을 불끈 쥔 사진엔 김정은의 의지가 확고함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가 녹아 있다. 내용도 마찬가지다. 김정은의 연설 내용은 모두 20개 문장으로 이뤄졌는데, 그중 5곳에서 제재를 언급했다. 그만큼 제재가 아프다는 방증이라고 정부는 해석한다. 통일부 당국자가 “김정은이 현 국면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게 이번 당 중앙위원회에서 엿보인다”고 말한 배경이다.

김정은에게 제재가 아픈 이유는 결국 북한 내부 경제 때문이다. 박영호 교수는 “김정은이 지금 가장 일으키고 싶은 건 병진 노선의 한 축인 경제일 것”이라며 “자신이 집권한 뒤 5년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북한 주민의 생활이 나아지고 있다는 지표를 만들고 싶은데 대북 제재로 인해 여의치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정은은 올해 1월 1일 육성 신년사에서 주민들의 생활이 나아지지 못했다며 “언제나 늘 마음뿐이었고 능력이 따라서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자책 속에 지난 한 해를 보냈다”고 이례적인 성찰적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상황은 1월보다 더 엄중하다. 그사이 지난 8월엔 안보리 제재 결의 2371호, 9월엔 2375호가 채택됐다. 북한은 주력 수출품목인 석탄 등 광물과 수산물을 수출하지 못하게 됐고, 북한 노동자들의 추가 해외 송출도 차단됐으며 유류 제공도 제한을 받게 됐다. 김영수 교수는 “북한 내부 정보에 따르면 북한 내 원유가 15㎏(약 16.4L)당 13달러 정도 하던 것이 (대북제재 결의 통과 즈음) 60달러를 넘었다가 최근 41달러로 조정됐다고 한다”며 “주민 생활이 그만큼 불안정하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트럼프·김정은 설전은 신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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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북한 주민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일까. 김정은은 또다시 ‘악단 정치’를 동원했다. 자신이 직접 만들고 키워낸 ‘북한의 걸그룹’이라 불리는 모란봉악단을 북한 각지로 순회공연을 다니게 했다. 약 한 달 전 시작된 이 모란봉 악단의 전국 투어 출발지는 다름 아닌 김정은의 고향, 원산이었다. 박영호 교수는 “모란봉 악단 순회 공연은 김정은이 북한 주민을 위무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는 방증”이라며 “이번 공연에서 악단이 더 화려한 춤사위를 선보이고 <노동신문> 등 각종 매체를 통해 대기실에서 사과를 깎아 먹는 등의 모습까지 공개한 것은 이례적”이라고 반응했다. 이런 상황에서 모란봉악단을 이끄는 현송월 단장은 10월 7일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후보위원으로 파격 승진하기도 했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전쟁은 이미 말폭탄에 있어서는 최고 수위를 넘나들었다. 트럼프는 김정은에게 ‘꼬마 로켓맨(little rocket man, 미사일을 쏘아대는 꼬맹이)’라는 별명을 붙였고, 지난 9월 유엔총회에선 급기야 “완전히 파괴하겠다(totally destroy)”는 발언도 했다. “미국과의 동맹을 방어해야 한다면”이라는 전제가 붙었지만 김정은으로선 모골이 송연할 만한 발언이다. 북한과의 대화와 협상 가능성을 언급하는 틸러슨에 대고 트위터를 통해 “리틀 로켓맨과 협상을 하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까지 공개적으로 무안을 줬다.

김정은도 지지 않고 나름의 최고 수위로 맞불을 놓는다. 신년사와 당대회 등 특별한 행사가 아니면 연설에 나서지 않는 관례를 깨고 직접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김정은의 표현 역시 트럼프에게 뒤지지 않는다. 트럼프를 “미국의 늙다리 미치광이”라고 칭하면서 “(트럼프가) 역대 가장 포악한 선전포고를 해온 이상 우리도 그에 상응한 사상 최고의 초강경 대응조치 단행을 신중히 고려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김정은은 “트럼프가 무엇을 생각했든 간에 그 이상의 결과를 보게 될 것”이라며 “미국의 늙다리 미치광이를 반드시, 반드시 불로 다스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유엔총회 현장에 있었던 이용호 북한 외무상은 북한이 취할 수 있는 조치에 대해 묻자 “역대급 수소탄 지상 시험을 아마 태평양상에서 하는 것으로 되지 않겠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용호는 이 같은 유엔 총회 발언 이후 열린 10월 7일 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당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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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이 10월 7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2차 전원위원회를 소집한 모습. 주먹을 불끈 쥐며 대북 제재를 이겨내자는 모습을 주민들에게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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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전은 이후에도 트럼프의 “(지금은) 폭풍 전의 고요” 발언 등으로 이어지다 돌연 소강 상태에 빠졌다. 트럼프가 갑작스레 10월 13일(현지시간) “(북한과) 협상을 해서 뭔가 일어날 수 있다면 나는 언제나 그것에 열려 있다”고 말하면서다. 그는 이어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보자.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라고 했다.

실제로 이용호 북한 외무상이 언급한 태평양 수소탄 실험까지 김정은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적어도 당분간은 가능성이 낮다고 봤다. 김영수 교수는 “김정은이 말폭탄 수위를 높인 건 트럼프와의 설전을 통해 자신과 트럼프가 동급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신경전에 가깝다”고 진단했다. 이런 말폭탄으로 서로의 존재감을 높이고 정치적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다. 남성욱 교수도 “말폭탄에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다. 어찌 보면 김정은과 트럼프는 서로 닮은꼴”이라고 말했다.

- 전수진 월간중앙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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