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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서소문 포럼] 탈원전 공론조사 정식으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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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참여단, 공사 재개 후 ‘탈원전 정책 유지’ 응답 13% 그쳐

신고리 공론조사에 원전 정책 방향 끼워 넣어 조사한 건 성급

중앙일보

김종윤 경제부장


울산 신고리 5·6호기 공사 재개를 결정한 공론조사 결과는 ‘신(神)의 한 수’라 할 만하다. 특히 청와대와 여당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

‘노후 원전 폐기, 신규 원전 백지화.’

문재인 정부의 ‘탈(脫) 원자력발전’ 공약은 이렇게 요약된다. 이미 지난 6월 고리 1호기의 원자로가 완전히 꺼졌다. 문재인 정부 임기 중에 추가로 문 닫을 원전은 없다. 다만 문 대통령은 22일 “에너지 수급의 안정성이 확인되면, 설계수명을 연장한 월성 1호기의 가동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10년 연장 운영을 승인받은 월성 1호기는 시민단체 등이 수명연장 무효소송을 내 법원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새 원전을 짓지 않는 건 사실상 확정이다. 신한울 3·4호기는 설계 용역이 중단됐다. 천지 1·2호기용 용지 매입도 멈췄다.

문제는 신고리 5·6호기였다. ‘공사 중지’ 공약을 냈지만, 공사 진척도가 29.5%나 됐다. 완전히 공사를 멈추면 매몰 비용만 2조6000억원 생긴다. 고민 끝에 정부가 내놓은 카드가 시민참여형 공론조사다.

공론화위원회가 20일 ‘건설 재개’를 권고하면서 문재인 정부는 두 가지 성과물을 챙겼다.

우선 공약 부담을 덜었다. 신고리 5·6호기 공사 중단은 무모한 공약이었다. 비용도 문제지만 한국이 자랑하는 3세대 원전 기술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3세대 원전 ‘APR(Advanced Power Reactor) 1400’은 신고리 5·6호기에 적용된다. 이미 아랍에미리트(UAE)에 4기, 총 186억 달러(약 21조원) 규모를 수출해 ‘메이드 인 코리아’의 상징이 된 원전이다. 이 원전을 사장하는 건 반세기 동안 피땀 흘려 일군 핵심 산업을 날리는 꼴이다. 결과적으로 공론화 결과는 APR 1400을 웃음 짓게 한 솔로몬의 선택이 된 셈이다.

두 번째는 탈원전 정책의 명분을 쌓았다. 공론화위는 원래 발표에 없던 원전 정책 방향에 대한 조사를 했다. 월권 논란이 일었다. 손금주 국민의당 대변인은 “탈원전 논의까지 포함해 의견을 제시한 공론화위의 결론은 월권”이라고 비판했다.

김지형 공론화위원장은 조사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원자력 산업계와 학회를 중심으로 원전을 유지·확대하는 방향으로 가고, 신고리 5·6호기 건설이 중단돼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강력 대두됐다. 이런 연유에서 애당초 공론화 의도와는 달리 원전을 축소할지 유지·확대할지가 건설 중단 또는 재개의 사유로 거론되는 등 논란이 촉발됐다. 공론화 과정에서 이런 논란을 피해갈 수 없어 조사하게 됐다.” 결과는 절묘했다. ‘원전 축소’가 과반인 53.2%였다. 유지(35.5%)와 확대(9.7%)를 더해도 45.2%에 그쳤다. 신고리 5·6호기 공사는 재개하되 원전은 축소한다는 ‘형용 모순’ 같은 결과가 나온 셈이다.

일부에서는 이 결과를 바탕으로 ‘탈원전은 국민의 뜻’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게 한칼에 결론 낼 사안이 아니다. ‘공사 재개’로 돌아선 중도층이 심리적인 균형을 잡는 차원에서 ‘원전 축소’를 택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번 발표에서 부각되지 않았지만 눈여겨 볼 조사가 있다. 시민참여단은 신고리 5·6호기 건설 재개 이후 필요한 조치에 대해서도 의견을 냈다. ▶안전기준 강화(33.1%) ▶신재생에너지 투자 확대(27.6%) ▶사용후 핵연료 해결방안 마련(25.4%) 순이다. ‘탈원전 정책 유지’라고 응답한 비율은 13.3%로 가장 낮았다.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면 굳이 탈원전 정책 유지에 목맬 필요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첨예한 갈등을 민주 절차로 해결하는 모델을 만든 게 공론조사의 성과다. 하지만 결과를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해석하면 갈등의 골이 깊어질 수 있다. 이번 공론화위 활동의 핵심은 신고리 5·6호기 공사 재개 여부였다. 에너지 산업 근간을 바꾸는 탈원전 정책을 끼워넣기 식 조사로 확정하는 건 월권 논란마저 부르는 성급한 조치다. 탈원전을 밀어붙이고 싶으면 별도의 공론조사를 정식으로 하라. 그게 떳떳한 길이다.

김종윤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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