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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환란 20년-시민에서 답을 찾다] ‘고단한 터널’ 지나왔지만… 삶은 더 팍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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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6’이 된 ‘386세대’의 자화상 / 구조조정 광풍 평생직장 사라져…양극화 심해지고 이기주의 만연 / 조기 퇴사한 동기 대부분 행방불명…3∼4년 후 퇴직하지만 노후 까마득 / 정치인 제도도 더 이상 못 믿어 / 시민의식 소홀히 해 큰 폐해 초래

세계일보

“IMF 외환위기가 한 달 뒤면 벌써 20주년이라니…. 아직 현직에 있는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셈이네요.”

요즘 말로 ‘인(in)서울 대학’의 85학번인 A은행 지점장 B(52)씨는 22일 “세월 참 빠르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국가 부도 위기에 몰린 우리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1997년 11월21일, 온 나라가 ‘파산 공포’에 휩싸였던 당시 B씨는 6년차 은행원이었다. 그는 IMF 사태가 자신의 삶과 우리 사회에 끼친 충격과 영향을 떠올리면서 안타까움과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강산이 두 차례 바뀌는 동안 더 나빠졌을지언정 나아진 게 없는 듯한 대한민국의 현실을 두고서다.

30년 전 이 땅의 정치적 민주화를 이끌어내는 데 기여한 ‘386세대’의 일원이면서도 “진정한 민주주의는 멀었다”고 일갈하는 ‘586세대’ B씨가 돌아본 지난 20년은 어땠을까. 그와의 인터뷰 내용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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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 개념 없앤 IMF 위기

IMF 사태 직후 은행 경영진은 “구조조정 전에 회사부터 살려야 한다”며 직원들에게 ‘우리사주’ 매입을 권유했다. 당장 일터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직원 대부분이 대출까지 받아 폭락한 주가보다 2배 가까이 비싸게 우리사주를 구입했다. 사내 커플이었던 나와 아내도 수천만원어치를 대출금으로 샀다. 그러나 주가는 속절없이 떨어졌고 결국 당초 매입가의 5분의 1도 안 되는 헐값에 우리사주를 처분했다. 그 사이 회사는 연차에 상관없이 희망퇴직 신청을 받은 데 이어 부부 직원 중 한 명씩과 실적이 낮은 직원들을 권고사직시켰다. 이 때문에 1998년에 첫 아이를 낳고 휴직 중이었던 아내는 이듬해 초 복직하지 못했다. 그렇게 은행 전체 직원의 10%가량이 정리해고되는 것을 보며 ‘평생직장’이란 말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국민적인 금모으기 운동과 혹독한 구조조정 등에 힘입어 IMF 위기를 조기(2001년 8월23일)에 극복했지만 IMF의 충격파로 서민과 중산층은 힘든 세월을 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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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이 된 대한민국… 이기주의 심화

IMF 위기는 우리 사회를 단숨에 생존경쟁의 장으로 확 바꿔 놨다. 시장만능주의 확산에다 기업들이 수익성을 최우선 가치로 삼으면서 근로자들은 늘 명예퇴직·정리해고·비정규직 등 생각만 해도 아찔한 절벽에 서게 됐다. 다른 업종도 그랬겠지만 은행의 업무 환경도 IMF 전과 180도 달라졌다. 정부에서 요구하는 은행의 공공성은 최소로 충족하고 수익성 높이기에 혈안이 됐다. 임대료 등 비용 절감을 위해 지점을 대폭 축소하거나 1층에 위치한 지점들은 위층으로 옮기고 정규직이었던 청원경찰들을 계약직으로 돌렸다. 자동입출금(CD)기 운영도 외부 업체에 위탁하고, 리스크 관리를 엄격히 하면서 대출심사가 까다로워졌다. 그 결과 은행 접근성은 떨어진 대신 문턱은 높아졌고, 자금 압박 문제로 부도에 내몰린 건실한 중소상공인도 상당했다. 반면 부자들을 겨냥한 개인·맞춤형 지원서비스가 도입되는 등 ‘고객 서비스 양극화’가 나타났다.인간적이고 정감이 넘쳤던 사내 분위기는 갈수록 삭막해졌다. 언제 잘릴지 모르게 된 세상이 되면서 많은 직원이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성향을 드러냈다. 이에 ‘벤처열풍’ 당시 큰맘 먹고 뛰쳐나간 직원도 많았지만 성공신화는 들려오지 않았다. 서둘러 인생 2막을 준비하거나 은행일 자체보다 임대업 등 부업에 더 신경쓰는 사람이 늘게 된 이유다. 고리타분한 문화와 낮은 급여 등으로 선호도가 낮았던 공무원과 교사, 공기업 직종이 IMF를 계기로 인기가 치솟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직업 선택 시 ‘안정성’을 최고로 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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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 퇴사한 동기 대부분 행방불명

IMF를 겪으면서 ‘중산층으로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도 어렵겠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선배들처럼 은행과 대기업 등 웬만한 회사에 들어가 열심히 저축하면 서울에 집 한 채 마련하고 자녀 양육과 노후 준비도 그럭저럭 가능하리란 기대가 깨진 것이다. 정보기술(IT) 분야의 급성장과 함께 국내 산업구조가 고도화·다양화하고 덩치가 커지면서 기업들의 곳간은 넉넉해졌으나 근로자와 가계별 형편은 그대로이거나 더 쪼그라들었다. 노무현정부 들어 부동산값 폭등 때도 부유층만 환호성을 질렀을 뿐이다. 자연스레 중산층이 무너지고 서민·빈곤층이 급증하면서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나앉은 사람도 속출했다. IMF와 벤처 열풍 당시 각각 구조조정되거나 자진 퇴사한 동기 40여명 중 현재까지 연락이 닿는 두어 명 빼곤 모두 행방불명인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가늘고 길게 가는 게 제일이더라”는 퇴직 선배들의 조언대로 은행에 붙어 있는 신세이지만 앞으로를 생각하면 암담하긴 마찬가지다.

길어봐야 3∼4년 후 퇴직해도 연금 수령시기는 10년가량 남았는데 새로운 일자리가 있을지, 산에만 다녀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서울 강북 변두리 지역의 집 한 채에다 모아둔 돈도 별로 없는 마당에 노후 준비는 둘째치고 두 자녀의 대학생활 등 뒷받침을 어떻게 해야 할지 까마득하다. 명색이 은행 지점장인 나도 이런데 국민 대다수의 삶이 오죽할까 싶다. IMF 이후 실직·파산한 수많은 사람의 비극은 ‘현재진행형’이고 자녀 세대로까지 되물림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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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나라냐… ‘386세대’도 반성해야

어쨌든 국민들이 IMF의 고통을 감수하면서 경제를 되살리고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고비도 비교적 무난히 넘겼다. 하지만 2014년 세월호 참사와 정부의 수습과정을 보면서 억장이 무너졌다. 무능을 만천하에 드러내며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지도 못한 국가를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됐다.

뒤이어 지난해 터진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는 치를 떨게 하는 모멸감을 안겼다. 그럼에도 정치권은 여전히 진영논리의 구태를 벗지 못한 채 밥그릇 싸움에만 열중하니 참담하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된 데는 1987년 군부 독재 종식에 기여하고 취업 걱정 없던 성장의 과실을 누리며 어느덧 사회 중추가 된 우리 세대의 책임도 크다. 공동선을 추구하며 민주화를 이끌었다고 뿌듯해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개인적 이해관계가 맞물리면 이기적이고 보수적인 태도로 돌변하기 일쑤다. ‘꼰대’소리를 들은 지도 오래다.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386 정치인’들만 봐도 사리사욕에 집착해 기성 정치인 뺨치는 행태들을 보이면서 욕먹는 ‘586 정치인’들로 전락했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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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민주주의 절실… 청년들도 힘냈으면

그동안 사회 각 영역과 일상에서 성숙한 시민의식과 민주주의 문화를 뿌리내리지 못한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정치적 민주화 이후 우리가 꿈꾸던 나라를 향한 방향타를 똑바로 세우지 못하고 우왕좌왕한 결과다. 권력 다툼에 몰두하느라 리더십이 망가진 정치권과 타성에 젖은 정부의 탓이 가장 크다.

이처럼 민주주의 시민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 자세와 상식을 습득시키는 일에 소홀히 한 폐해는 적지 않다. 오죽하면 유명 대학 출신의 판사와 변호사 부부마저 괌에서 어린 자녀를 차에 두고 쇼핑하다 걸려 국제적 망신을 당했을까. 하나씩 드러나고 있는 국가정보원 등의 범죄행위도 민주주의가 확립된 사회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기득권층이 먼저 양보하고 나누기보다 더 가지려고 천박한 행태를 서슴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양극화와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구제불능의 정치와 각종 불합리한 제도를 혁신하기 위해서라도 시민다운 시민이 많아져야 한다.

‘IMF 둥이’인 아들세대를 비롯해 살아가기가 만만찮은 청년들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쉽게 좌절하거나 다같이 비슷한 경로를 밟지 않았으면 좋겠다. 큰 꿈을 그리고 단계별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은 시기의 문제일 뿐 꿈을 이루는 모습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수십만명의 청년이 9급 공무원 시험에만 매달리는 현상은 그들과 나라를 위해서도 정말 아닌 것 같다.

특별기획취재팀=이강은·최형창·김라윤 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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