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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박근혜가 없어도 ‘국정농단’ 재판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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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법정 다큐-수인번호 503

⑩ 재판 보이콧


한겨레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 5월23일 왼쪽 옷깃에 수인번호 ‘503번'을 달고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재판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은 지난 3월31일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지 53일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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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3일 오후 5시12분. 서울중앙지법 출입기자들에게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피고인: 박근혜(전직 대통령)
제22형사부 김세윤 부장판사
사건번호: 2017고합184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뇌물)
구속영장 발부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어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 상당성이 인정됨.”


사흘 뒤인 16일 오전 10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추가 구속영장이 발부된 뒤 처음으로 그의 재판이 열렸다. 추가 구속영장이 발부되지 않았다면 박 전 대통령의 1심 구속 기간은 이날 밤 12시에 끝났어야 한다. 하지만 추가 구속영장으로 법원은 최장 2018년 4월16일까지 박 전 대통령을 구속한 상태에서 재판을 진행할 수 있게 됐다. 박 전 대통령의 재판이 열리는 417호 형사대법정으로 올라가는 서울중앙지법 2층 계단 옆 통로가 폐쇄됐다. 박 전 대통령 지지자들의 소란을 우려한 법원의 판단이었다. 150석인 방청석에 방청객은 40여명, 기자는 20명 정도가 앉아 있었다. 재판이 시작되자마자 법정에 들어온 박 전 대통령은 피고인석으로 가 유영하 변호사 오른쪽에 앉았다. 평소대로 올림머리를 하고 지난 3월30일 구속영장 심사 출석 때 입었던 남색 재킷을 입었다. 이날은 박 전 대통령만 출석하는 재판이었다.

“모든 책임을 내게 묻고…”

박 전 대통령이 자리에 앉고 서울중앙지법 형사22부 재판장인 김세윤 부장판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2017년 10월13일 에스케이(SK) 제3자 뇌물 요구 관련 구속영장을 추가로 발부했습니다. 대법원 판례는 구속영장에 없는 혐의에 대해 추가 구속영장 발부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새로운 구속영장 발부는 위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일부 증인 신문을 진행하긴 했지만 핵심 증인 신문 등 증거조사가 다 이뤄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피고인의 구속 전 지위, 주요 증인과의 관계를 보면 증거인멸 우려가 없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공판 심리를 위한 부득이한 조치이지 유죄의 예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정면을 응시하던 박 전 대통령은 김 부장판사의 발언이 이어지자 유 변호사가 따라주는 물을 마셨다.

김 부장판사가 말을 마치자 유 변호사가 “피고인께서 말씀드릴 게 있다”며 마이크를 박 전 대통령 쪽으로 옮겼다. 박 전 대통령은 피고인석에 앉아서 다른 곳에 시선 한번 주지 않은 채 오전 10시5분부터 4분 동안 준비해온 글을 읽었다. 5월23일 첫 재판이 시작된 뒤 처음으로 가장 오래 한 발언이었다.

“구속되어 주 4일씩의 재판을 받은 지난 6개월은 참담하고 비참한 시간들이었습니다. 한 사람에 대한 믿음이 상상조차 하지 못한 배신으로 되돌아왔고 이로 인해 저는 모든 명예와 삶을 잃었습니다. 무엇보다 저를 믿고 국가를 위해 헌신하시던 공직자들과 국가 경제를 위해 노력하시던 기업인들이 피고인으로 전락한 채 재판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참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하지만 염려해주시는 분들께 송구한 마음으로 그리고 공정한 재판을 통해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마음으로 담담히 견뎌왔습니다.

오늘은 저에 대한 구속 기간이 끝나는 날이었으나 재판부는 검찰의 요청을 받아들여 지난 13일 추가 구속영장을 발부하였습니다. 하지만 검찰이 6개월 동안 수사하고 법원은 다시 6개월 동안 재판하였는데 다시 구속수사가 필요하다는 결정을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이제 정치적인 외풍과 여론의 압력에도 오직 헌법과 양심에 따른 재판을 할 것이라는 재판부에 대한 믿음이 저는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향후 재판은 재판부의 뜻에 맡기겠습니다. 끝으로 법치의 이름을 빌린 정치보복은 저에게서 마침표가 찍혀졌으면 합니다. 이 사건의 역사적 멍에와 책임은 제가 지고 가겠습니다. 모든 책임을 저에게 묻고 저로 인해 법정에 선 공직자들과 기업인들에게는 관용이 있기를 바랍니다.”

구속 연장된 박근혜 전 대통령
“재판부 믿음 의미 없다고 결론”
유영하 등 변호인들 전원 사퇴
건강 이유로 재판 출석도 거부

최순실 쪽 변호인은 사퇴론 일축
“변론에 적극 임하기로 했다”
최씨도 “검찰에 잘 얘기해달라”
전 대통령과 분리해 진행키로


박 전 대통령의 목소리는 처음에는 다소 떨렸지만 뒤로 갈수록 안정됐다. 기자들이 쉽게 받아칠 수 있을 정도로 또박또박하고 분명한 발음과 알아듣기 쉬운 속도였다. 지난 3월10일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 전까지 계속 들어왔던 박 전 대통령의 연설 톤이었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담백한 말투였다. 소리 내 눈물을 흘린 쪽은 박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었다. 오전 10시12분 재판부는 10시30분까지 휴정을 명했다. 눈물바다가 된 법정에서 퇴정하는 박 전 대통령을 향해 “힘내세요”라는 응원과 재판부와 검찰을 향한 “너무합니다”, “천벌을 받아라”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재판이 재개되자 앞서 출석한 박 전 대통령의 변호인 7명 중 유영하 변호사만 돌아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 변호사는 “지금까지 재판을 진행해주신 재판부와 검사님들께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라고 한 뒤 한 손에는 무선 마이크를 한 손에는 준비해온 종이를 들고 읽기 시작했다.

“처음 이 사건에 대하여 기소할 당시 검찰은 피고인에 대한 증거는 차고 넘친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차고 넘치는 증거 중에서 재판부는 피고인이 에스케이 관련 증거 중 어떤 증거를 인멸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신 건지, 피고인이 인멸할 증거는 어디에 있다고 판단했는지 되묻고 싶습니다. 혹여 피고인이 석방돼 안종범 등 아직 증언이 이뤄지지 않은 증인들을 회유해 기존 검찰 진술과 다른 사건 관련 증언을 번복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셨다면 피고인이 과연 어떤 방법으로 이를 할 수 있다고 판단하신 건지 변호인들은 참으로 납득되지 않습니다.

우리 변호인들은 길지 않은 법조인의 길을 걸으면서 우리나라 형법과 형사소송법이 인신구속에 대해 엄격한 기준을 두는 이유는 재판 진행의 편의성보다는 피고인 인권보호와 방어권 보장이 더 상위 가치이기 때문이라고 배워왔습니다. 하지만 형법과 형사소송법이 규정하고 있는 무죄 추정과 불구속 재판이란 형사법의 대원칙이 힘없이 무너지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저희 변호인들은 더 이상 본 재판부에서 진행할 향후 재판 절차에 관여해야 할 어떤 당위성도 느끼지 못하였고 피고인을 위한 어떠한 변론도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오늘 모두 사임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법치주의가 무너지거나 형해화되어 광장의 광기와 패권적인 정치권력의 압력으로 형식적인 법치주의가 부활하면 인권의 역사는 후퇴할 것이고 야만의 시대가 되살아날 것이라는 두려움을 재판부께서는 진정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저희 변호인들은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과 피를 토하는 심정을 억누르면서….” 울컥한 유 변호사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허허롭고 살기가 가득한 이 법정에 피고인을 홀로 두고 떠납니다. 저는 역사를 관장하는 신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모든 역사는 기록되고 후세가 이를 평가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생각할 때 이번 피고인에 대한 본 재판부의 추가 구속영장 발부는 그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되지 않을 것이며 우리 사법 역사상 치욕적인 흑역사 중 하나로 기록될 것입니다.” 박 전 대통령과 달리 유 변호사는 재판부와 방청석을 번갈아 보며 말했고 톤은 점점 고조됐다. 법정을 배경으로 한 ‘정치연설’ 같았다. 점점 절정으로 치닫는 유 변호사의 발언과 함께 방청석의 울음소리도 커졌다.

사임서를 제출하고 바로 법정을 나가려는 유 변호사를 김 부장판사가 붙잡았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변호인이 지금까지 심리를 진행해 누구보다도 사건 내용, 진행 사항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 분들이 사퇴하는 경우 그 피해가 고스란히 피고인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고 국민들에게 실체를 밝히는 것도 지체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해 사임 여부를 신중하게 결정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재판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었다. 19일 다시 재판을 열기로 하고 오전 10시48분께 박 전 대통령이 법정을 떠났다. 법정을 떠나기 바로 직전 한 할머니가 “판사님 저는 사형을 원합니다. 이 세상에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저를 사형시켜주세요”를 계속 반복하며 울부짖다 경위 여러 명에게 들려 나갔다. “대통령님 힘내세요!” 지지자 여러 명이 우르르 일어나 손뼉 치며 응원했지만 박 전 대통령은 방청석에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탈진해 쓰러진 할머니는 119구급차에 실려 갔다. 하지만 시끌벅적했던 법정과 달리 법원 밖은 평소보다 훨씬 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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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씨가 지난 5월23일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재판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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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들은 들어와서 피고인석에 앉기 바랍니다.” 19일 오전 10시 다시 417호. 김 부장판사의 말이 끝나자 최순실씨가 법정에 들어왔다. 롯데 뇌물 관련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증인 신문이 예정돼 있어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도 오랜만에 법정에 출석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출석하지 않았다. 18일 오후 팩스로 건강 등의 사유로 출석이 어렵다며 불출석 사유서를 재판부에 보냈다. 박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도 법정에서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례적으로 기자가 방청객보다 많았다. 김 부장판사는 먼저 “박근혜 피고인의 종전 변호인들이 모두 사임했고, 피고인이 새로 변호인을 선임하지 않고 있으므로 더 이상 국선 변호인 선정을 늦출 수 없다고 판단돼서 직권으로 국선 변호인 선정 절차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선정될 국선 변호인이 공판을 진행할 수 있는 상황이 되면 새로운 공판 기일을 지정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박 전 대통령과 분리해서 최씨와 신 회장의 재판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국정농단 재판은 계속된다

박 전 대통령의 ‘배신자’가 된 최씨와 변호인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이경재 변호사는 “재판장님이 1년 가까이 보여준 성실함, 인내심, 균형 잡힌 소송지휘, 무엇보다도 서초동 법조에서 갖고 있는 평판을 믿기로 하고 변론에 적극 임하기로 했습니다. 일부에서는 전원 사임하는 게 옳다는 강력한 주장이 있었는데 그 길을 택하지 않기로 했습니다”라며 사퇴 전망을 일축했다. “제가 구속된 지 1년이 돼가는데요, 검찰이 6~7개월간 저를 외부인 접견을 막고 일체 면회를 불허해서 한평 되는 방에서 시시티브이(CCTV)를 설치하여 감시하는 등 화장실도 다 오픈된 데에서 제가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을 많이 겪으면서 재판에 임해왔습니다. 충성 경쟁을 하는 검찰의 수사 방법에 대해서는 정말 정말 악의적이고, 저는 정신병자가 되지 않은 게 지금 고문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이 변호사의 발언 뒤 최씨의 하소연이 시작되자 김 부장판사는 “피고인, 재판부에 하고 싶은 얘기를 하세요”라고 부탁했다. “제가 지금 약으로 버티는데 정말 고문이 있었다면 웜비어(북한에 억류됐다 혼수상태가 된 미국 대학생) 같은 사망상태가 될 정도로 굉장히 견디기가 힘듭니다. 재판이 더 늦어지면 삶의 의미를 좀 갖기가 힘들고. 오늘도 너무 떨리는 마음으로 나왔는데 앞으로 공정심판 할 수 있게 검찰에 얘기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이날 오전 10시46분께 안 전 수석의 증인 신문이 시작됐다.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은 박 전 대통령의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증언을 거부했지만 안 전 수석은 꼬박꼬박 답변을 이어갔다. “2016년 3월 신 회장을 만났을 때 롯데월드 면세점 재취득 실패와 관련해 대통령에게 잘 이야기해 달라고 했습니까”라는 검찰 질문에 “보통의 경우 그런 점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한 것으로 짐작되지만 구체적인 것은 기억이 안 난다”고 답했다. 하지만 “끝나고 오자마자 대통령이 전화해서 신 회장과 오찬을 마쳤다고 하면서, 이번에 독대할 때는 직접 온다며 면세점 관련 이야기를 했다”고 안 전 수석은 말했다.

다음날인 20일에도 안 전 수석의 증인 신문이 이어졌다. 피고인석에는 최순실씨와 이경재 변호사 등 최씨의 변호인만 앉았다. 이날 서울고법 국정감사까지 겹치면서 방청객은 기자를 포함해도 하루 종일 10명 안팎에 그쳤다. 재판부, 검찰, 특검, 피고인, 변호사를 모두 합친 숫자보다 적었다.

그렇게 박 전 대통령이 없어도 ‘국정농단’ 재판은 계속된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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