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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IQ 80의 노숙자와 살해된 여성…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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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미국 하버드대에서 출간한 'Convicting the innocent'(무죄증명)는 DNA 기술로 밝혀낸 250건의 오판 사례를 분석해 그 원인을 추적한 책입니다. 이 책을 번역 중인 신민영 변호사가 책에 담긴 흥미로운 케이스들을 연재합니다. 외부 기고는 머니투데이 'the L'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기고문은 원작자의 취지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가급적 원문 그대로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the L] 신민영 변호사의 '만들어진 범인들']

머니투데이


본격적인 얘기에 앞서 법정물 얘기를 잠깐 하겠다. 변호사 생활 시작하고 나서 제대로 본 법정물이 거의 없다. 김치를 먹어본 적 없는 부시맨 요리사가 사진만 보고 재현한 김치를 먹는 느낌이랄까. 법정물 속 법정공방은 모양만 법정공방이지 도무지 짜지도 맵지도 곰삭지도 않다. 나름의 맛은 있지만 이걸 ‘법정물’로 봐야할지 의문이 들때가 많다. 개인적으로는 봉준호 감독이 법정물을 만들면 어떨까 궁금하다. 한 번도 본격 법정물을 찍은 적 없지만 그가 작품들에서 보인 형사절차에 대한 이해는 상당하다.

그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찍은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에서 등장한 형사적 테마에 대해 크든 작든 할 말이 있지만 이 글에서 언급할 것은 '살인의 추억'이다. 이 영화는 1980년대 경기도 화성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영화 속 형사들(송강호, 김상경 분)은 범인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 하지만 결국 애먼 사람들을 범인으로 몰며 고생시킬 뿐이다. 이들은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한 젊은이(박해일 분)가 범인임을 확신하고, 사건 현장에서 채취한 범인의 DNA정보와 젊은이의 DNA정보를 미국에 보낸다. 하지만 결과는 불일치. 사건은 결국 미궁으로 빠져들며 영화는 끝난다.

내가 보기에 '살인의 추억'은 확증편향에 관한 영화다. 영화를 젊은이(박해일 분)의 관점에서 다시 보자. 어느 날 갑자기 형사들이 들이닥쳐서는 ‘연쇄살인 피해자들이 죽던 날마다 라디오 방송국에 같은 곡을 신청했다’는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범인으로 몰더니, 종내는 두드려 패기까지 한다. 이때 스크린 밖에서 영화를 지켜보는 관객들은 형사와 젊은이 중 누구의 편인가? 아마 대부분 젊은이(박해일 분)가 범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심지어는 서울 형사(김상경 분)가 미국에서 날아온 DNA결과를 들고 나타났을 때는 제발 DNA결과가 젊은이(박해일 분)와 일치하기를 바라기까지 했을 것이다. 영화 속 형사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스크린 밖 2000년대의 관객들 역시 말 같지도 않은 이유에 근거한 믿음을 갖게 되고 이와 같은 믿음이 맞기를 간절히 바란 것이다. 이를 확증편향이라 한다. 어떤 믿음을 갖게 됐을 때 이 믿음이 진정한 것인지를 검증하려 들기 보다는 자신의 믿음을 강화해주는 증거를 찾으려는 태도를 일컫는다.

영화 후반부 서울형사(김상경 분)이 미국에서 온 DNA검사 결과를 들고 나타난 장면은 내겐 무척 상징적인 장면으로 보였다. DNA증거가 등장하는 순간 영화 속 형사들과 영화 밖 관객들의 확신이 무너졌듯, 현존하는 최강의 과학증거 DNA가 등장했던 1980년대 후반 부터 미국에도 비슷한 일이 이어졌다. DNA검사가 가능해 진후 이미 유죄판결을 받아 복역하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DNA검사가 이루어졌다. 사건 현장에서 채취한 진범의 체액, 모발 등의 DNA를 분석해 해당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과의 일치여부를 살펴본 것이다. 검사 결과 250명의 결백이 밝혀졌다.(그 이후 DNA검사 기술이 발전하면서 그 숫자는 더 늘어났다.) 그 중에는 사형수도 여러명 끼어있었다. 국가 권력이 애먼 사람을 누명씌우고 심지어 목숨마저 빼앗으려 했던 것이다. 국가 권력이 엉뚱한 사람을 잡아 벌주는 동안 진범이 거리를 활보하며 범행을 반복한 경우까지 있었다.

250이라는 숫자를 크다고 봐야할까 작다고 봐야할까? 형사 재판에는 무죄추정원칙이 적용된다. 피고인은 무죄로 추정된다는 이 원칙에 따르면 피고인에게 유죄판결을 내리기 위해서는 그가 유죄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게다가 법률가 들이 가위바위보를 통해 선발된 사람도 아니지 않은가. 혹독한 수련 과정을 거친 엘리트들이 유죄를 확신했는데도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 동안의 형사판결 전반에 대해 의심을 해야할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오판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로널드 존스

1985년 3월 10일 밤. 한 남자가 시내에서 길을 걷던 한 여성을 불러 세웠다. 남자는 심한 여드름 덕에 ‘비포장도로’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IQ 80의 노숙자 로널드 존스였다. 그는 동전 몇 개를 구걸해 얻어냈고 그 길로 헤어졌다. 하지만 그 여성은 다음 날 도시 외각의 버려진 호텔에서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경찰은 존스를 용의자로 지목했고, 8시간에 걸친 조사 끝에 그의 자백을 받아냈다. 진범이 아니고는 알 수 없는 구체적인 정황들이 자백에 담겨있었다. 존스는 수 많은 호텔 객실들 중 사건이 발생한 객실을 정확히 지목하였으며, 피해자의 외모에 대해서도 정확히 묘사했다. 또 사건 현장이나 범행방법 역시 정확했다. 과학증거 역시 그의 혐의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피해자의 질에서 채취된 체액에 대해 혈액형 검사가 실시되었는데, 로날드 존스가 범인일 가능성이 배제되지 않는다는 것이 분석관의 설명이었다.

재판 도중 존스는 자백을 철회하고 결백을 주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에게는 유죄판결과 함께 사형이 언도되었다. 항소심에서도, 주 대법원에서도, 연방 대법원에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고 그에게는 사형 집행만이 남아있었다.

사형집행을 앞두고 그는 DNA검사를 요청했다. 사형 집행을 늦추기 위한 꼼수라는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결국 법원은 그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어찌 보면 그의 요청은 부당한 것이었다. 이미 그에 대한 법적 판단은 끝난 상황아닌가. 물론 유죄판결 시점인 1989년과 달리 DNA검사 기술이 발전한 상황이긴 했지만, 그 이유로 이를 허용한다면 새로운 기술이 나올 때마다 기존의 유죄판결 전부에 대해 다시 검토해달라는 요청이 줄을 이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로널드 존스의 경우만 놓고 봐도 신기술이 나올 때마다 재검을 요청하며 자연사할 때까지 시간을 끌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DNA 검사 결과 그의 결백이 밝혀졌다. 체액에서 한 남성의 DNA가 검출됐는데 존스의 DNA가 아닌 제3자의 DNA였다. 1심,항소심,주 대법원, 연방 대법원 모두가 가졌던 확신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살인의 추억' 속 젊은이(박해일 분)은 형사들에게 몇대 두들겨 맞은 정도였지만 로널드 존스는 하마터면 생명을 잃을 뻔 했다. 사형수로서 8년 넘도록 수감생활을 해야했던 것은 덤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확신으로 이끌었는가.

자백

중범죄 혐의를 받는 피고인이 범행을 부인하는 일은 종종 있다. 엄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존스는 뒤늦게 자백을 철회하며 자백이 강요된 것이라 주장했지만 재판부가 이를 귀담아 듣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더군다나 존스는 단순히 자신이 범인임을 인정한 정도가 아니라, 범죄 현장과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를 했다. 보도된 내용도 아니라서, 정보의 출처가 신문이나 TV라고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범인이 아닌 존스가 사건 내용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해당 수사관들이 부인하고 있어서 그 이유가 명백하게 입증되지는 않았지만 이에 대한 존스의 주장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경찰은 그를 범죄현장으로 데려가 사건에 대해 차근차근 알려주었다고 한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들이 ‘향숙이’를 외치던 백광호(박노식 분)을 데리고 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과학증거

미국 드라마 'CSI :과학수사대'의 영향으로 과학증거에 대한 대중의 믿음이 상당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과학증거에도 오류가 있다. 이름은 과학증거이지만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기법들이 수사에 사용되기도 했고(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살펴보겠다), 설사 검증된 기법이라 하더라도 이를 사용하는 사람이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 사건에서는 사람의 실수가 있었다.

피해자의 혈액형은 A형의 분비자였고, 존스는 O형의 비분비자였다. 비분비자는 체액에서 혈액형이 검출되지 않는 사람을 뜻하는데 인구 중 20%가 여기에 해당한다. 피해자 체내에서 채취한 체액에서 A형만 검출 되자 분석관은 ‘범인은 A형의 분비자이거나 비분비자이고 로널드 존스 역시 여기에 포함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살인의 추억'에서 현장에서 범인의 체모가 발견되지 않자 범인은 ‘백X지’(무모증)라 외치던 시골형사(송강호 분)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는 결정적 오류가 있었다, 당시에는 ‘마스킹’(MASKING)이라는 문제가 흔했다. 단어에서 드러나듯 마스킹현상은 어떤 물질이 다른 물질을 덮어버리는 현상이다. A형만 검출된 이유가 피해자의 몸에서 나온 물질이 강간범으로부터 나온 물질을 덮어버렸을 가능성을 감안했어야만 했다. 검사결과를 두고 내릴 수 있는 옳은 결론은 ‘판독불가’였다.

'Convicting the innocent'는 로널드 존스 사건을 비롯한 250건의 오판 사례를 분석해 그 원인을 추적한 책이다. 필자는 현재 번역작업 중이고 올 하반기 중 번역본이 국내에 출간될 예정이다. 출간에 앞서 이 책에서 소개한 몇몇 사례를 연재 형식으로 소개해보도록 하겠다.

자기가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에 대해 자백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250건 중 16%에서 해당하는 40건에서 피고인은 자신의 혐의에 대해 자백을 했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범죄에 대해 자백을 하기도 한다. 수사관의 질문에 수동적으로 답변한 정도가 아니라, 진범이 아니고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내용을 자발적으로 줄줄 얘기한 경우가 많았다. 과학증거는 과연 덮어놓고 믿어도 되는 걸까. 과학 증거가 제출되었던 153건의 오판 사례중 61%에 해당하는 93건에서 과학 증거에 오류가 있었다. 심지어는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는 기법이 버젓이 과학증거라는 이름으로 재판에 사용되기도 했다. 피해자, 목격자, 제보자의 진술은 어떻게 왜곡되는가? 피해자 혹은 목격자가 ‘진범이 확실하다.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라고 지목했던 사람들 조차 실은 범인이 아닌 경우가 있었다. 250건의 오판 사례중 76%에 해당하는 190건에서 피해자 혹은 목격자의 오인이 있었고, 거짓 제보가 있었던 건이 전체 건수의 21%였다. 그 밖에도 변호인의 무능력, 형사 재판 절차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결함 등이 오판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왜 오판 사례에 대해 분석해봐야 하는 걸까? 이제는 다 지난 일 아닐까? DNA기술이 개발된 이상 더 이상의 오판은 없지 않을까? DNA증거가 압도적인 신뢰도를 가졌다고는 하지만, DNA증거가 있을 수 있는 건은 강간사건, 살인사건과 같은 일부 강력사건이 전부다. 사기 사건이나 명예훼손 사건에 DNA증거가 존재할리가 없지 않은가. 대부분의 사건은 여전히 자백, 목격자 정도가 증거의 전부다. 오판에 대해 근본적으로 고찰해보지 않는다면, 여전히 대부분의 재판이 오판의 위험에 노출된 채로 진행되는 것이다. 향후 연재를 통해 재판을 오판으로 이끈 이들 원인들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머니투데이

[신민영 변호사는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2006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지금껏 1000여건의 사건을 수행했으며 여러차례 패색이 짙은 사건을 맡아 역전을 일궈냈다.]

신민영 변호사 ppark14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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