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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중앙시평] 한·미 동맹의 참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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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북한이 핵무기를 폐기하면

무슨 요구라도 다 들어줄 태세

그러나 이런 방안은

공산주의 중국이 꾸며온

음험한 계략임을 깨달아야 한다

중앙일보

복거일 소설가


1904년 11월 이승만은 제물포에서 기선을 탔다. 한규설과 민영환의 밀서를 품고 미국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러 떠난 것이었다. 그러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의 호소를 완곡하게 거절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진 뒤 이승만은 임정이 미국의 승인을 받는 데 힘을 쏟았다. 임정이 승인받지 못하면 일본이 패망한 뒤에도 조선의 운명은 강대국들의 이해에 따라 결정될 터였다. 그의 노력은 좌절되었지만 한반도 남쪽에 미군이 진주해 대한민국이 세워진 것은 지도에서 사라진 조선이 미국 사회에서 잊혀지지 않도록 애쓴 그의 활동 덕분이었다.

1953년 6월 이승만은 반공포로들을 기습적으로 석방했다. 휴전 협상이 마무리되어 가는데, 한국의 안보에 대한 미국의 보장은 없었다. 1948년 미군이 서둘러 떠나는 바람에 북한의 침입을 받은 일이 되풀이될 터였다. 미군 수뇌부는 제2차 세계대전을 유럽에서 치른 장군들이어서 아시아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들을 대표했다. 이승만은 미국이 다시 한국을 버리려 한다고 믿었다.(그의 판단이 옳았음은 20여 년 뒤 미국이 자유월남을 배신함으로써 증명되었다.) 휴전 회담의 걸림돌이었던 포로 교환 문제를 아예 파탄시킴으로써 이승만은 혁명가다운 저항을 한 것이었다.

이승만에겐 위협도 설득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는 미국은 대통령 특사를 보내 이승만과 협상했다. 이승만은 휴전 협상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한국의 안전 보장을 요구했다. 결국 미국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경제 원조와 한국 지상군 증강과 같은 실질적 지원을 한다고 약속했다.

29세의 밀사로서 품은 조국 안보의 비원(悲願)을 78세의 대통령으로 이룬 것이었다. 조국을 위해 가난과 모멸을 견딘 혁명가의 평생은 위의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혼자 힘으로 마련한 한·미 동맹은 그의 조국을 지킨 자명고(自鳴鼓)였다.

중앙일보

중앙시평 10/21


요즈음 그 자명고를 찢으려는 시도가 대담해졌다. 그런 시도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은 안 된다’는 전제로 시작된다. 그럴듯하지만 이것은 속임수다. 최고의 가치는 전쟁을 막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후손들의 삶을 지키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지키려면 개인이나 국가나 공격해오는 적들을 물리칠 힘이 있어야 한다. 전쟁을 막는 일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한·미 동맹만 깨뜨리나? 아예 국군을 해체하는 것이 궁극적 해결책 아닌가?

한·미 동맹을 허물려는 행태는 물론 걱정스럽다. 그래도 양식 있는 시민들은 그런 속임수를 꿰뚫어볼 것이다. 정말로 걱정스러운 것은 우리가 북한의 핵무기에 눈이 팔려 한·미 동맹의 본질을 놓치는 상황이다. 한·미 동맹은 북한을 주적으로 여겨 맺어진 것이 아니다.

1953년 한국군은 강력했다. 아군 93만 가운데 59만이 한국군이었다. 반면에 북한군은 궤멸된 뒤 재건되지 못했다. 문제는 지리적 조건이었다. 중공군은 기회가 생기면 바로 압록강을 넘을 터였다. 미군이 태평양을 건너는 것은 어렵고 다시 온다는 보장도 없었다. 이에 대한 대응이 한·미 동맹이었다. 한·미 동맹은 처음부터 중공의 위협에 대응하는 자유주의 동맹이었다. 그것이 한·미 동맹의 참뜻이다.

북한 문제는 처음부터 중국 문제였다. 6·25전쟁에서 남침한 북한군의 주력은 중공군의 조선족 병사들이었다. 중국은 파키스탄과 북한을 두 뿔로 삼아 봉쇄망을 뚫으려 해왔고 기술과 재료를 대주어 두 나라의 핵무기 개발을 도왔다. 북한 핵무기는 본질적으로 중국 무기다. 파산한 북한이 무슨 자원과 기술로 핵무기를 그리 빨리 개발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 여론은 북한이 핵무기를 폐기하면 무슨 요구라도 들어줄 태세다. 실제로 북한 핵무기의 폐기와 한·미 동맹의 폐기를 연계시키는 방안은 다수의 지지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안은 공산주의 중국이 꾸며온 음험한 계략임을 우리 시민들이 깨달아야 한다. 나아가서 미국 시민들도 일깨워야 한다. 한국처럼 중요한 나라를 잃으면 미국의 지위도 그만큼 약해진다는 사실을.

점점 커지는 중국의 영향력에 맞서 최소한의 독립성을 유지하려면 우리는 미국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 사실은 위안스카이(袁世凱)가 고종을 하대하던 시절부터 몇 백 년 뒤까지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는 지정학적 조건이다. 한·미 동맹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중국에 예속되어도 좋다는 태도에 다름 아니다.

복거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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