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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분배’를 둘러싼 새로운 정치적 사유와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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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뉴스분석 왜?

인류학의 시선으로 본 분배정치


한겨레

제임스 퍼거슨 스탠퍼드대 인류학과 교수가 지난 18일 오후 서울 연세대 장기원국제회의실에서 ‘분배의 정치’를 주제로 대중강연을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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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장이냐, 분배냐. 경제를 이야기할 때마다 되풀이되는 오랜 질문입니다. 최근에는 ‘포용적 성장’이니 ‘소득(임금)주도성장’이니 하는 조금 다른 이름의 간판을 내건 논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논쟁의 각도를 좀 돌려보면 어떨까요? 주로 경제학에서 논의되는 ‘분배’라는 문제를 인류학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최근 방한한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인류학과 제임스 퍼거슨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장면 1. “포용성 달성과 양극화 해결을 위해 최우선 과제로 설정해 노력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10월19일 앙헬 구리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사무총장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포용적 성장’이란 경제성장에 따른 기회와 성과가 사회 전체에 공정하게 분배되어야 한다는 개념이다. 지난 7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는 균형적이고 포용적인 성장을 추구한다는 내용의 정상선언문을 발표한 바 있다. 한국의 소득주도성장이 포용적 성장과는 다른 개념이라는 논란이 있긴 하지만, 점점 심각해지는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장’뿐만 아니라 ‘분배’를 중시해야 한다는 바탕은 같다.

장면 2. 자본소득 과세 강화, 기본소득 제도 도입, 교육과 의료의 동등한 접근권 확대. 10월11일 국제통화기금(IMF)이 발간한 ‘재정 감시 보고서’에서 불평등을 완화할 수단으로 제시한 3가지 대안이다. 국제통화기금은 8개 나라에서 모든 국민에게 중위소득의 25%에 해당하는 금액을 기본소득으로 지급했을 때 불평등 완화 효과도 추산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에서는 지니계수가 4.3%포인트, 상대적 빈곤율은 7.5%포인트 낮아졌다.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이집트에서는 지니계수가 5.3%포인트, 상대적 빈곤율은 10.9%포인트 개선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제통화기금은 “보편적 기본소득 제도는 선진국보다는 신흥국이나 개발도상국에서 빈곤 퇴치 효과가 더 클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보고서는 재정 정책이 ‘재분배’라는 목표에 잘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작성됐다.

포용적 성장? 소득주도성장?
인류학적 시선으로
성장과 분배 논쟁 들여다보니

남아공 기본소득 사례 연구한
퍼거슨 스탠퍼드대 교수
“일자리가 사라진 시대에
분배만으로 생계 이어가야 하는
‘분배노동’ 확산”

“보편적 기본소득 도입 등
늘어나는 분배에 대한 요구는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을 열어젖힐 것”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두 장면이 보여주는 바는 분명하다. 성장과 분배는 이제 더 이상 대립항이 아니다. 성장이냐 분배냐 양자택일해야 할 선택항도 아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지배적인 서사는 ‘성장’의 차지였다. ‘분배’와 관련한 서사는 대개 다음과 같았다. 게으르고 의존적인 삶을 사는 ‘기생충’ 같은 자들에 대한 경멸이거나, 열심히 노동하는 자의 세금에 기대어 무조건 ‘받기만 하는 자’들에 대한 비판. 이러한 서사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맥락은 이렇다. 열심히 노동하여 임금을 받는 자들, 노동시장에 참여해 ‘시민권’을 획득한 자들만 분배받을 수 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그런데 문제는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괜찮은 일자리’(decent work)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실업률은 높아지고 전세계 인구의 상당수는 불안정한 일자리에서 겨우 생계를 이어간다. 여기에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일자리를 위협할지 모른다는 불안까지 더해졌다. ‘노동의 미래’는 안갯속에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인류학과의 제임스 퍼거슨 교수는 ‘일자리 없는 시대’에 생산만큼이나 분배와 밀접히 관련된 노동이 중요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30여년 동안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아프리카 남부 지역의 빈곤과 개발 현장을 연구해왔다. 퍼거슨 교수는 이들 지역에서 도시 거주자들이 생존을 위해 임금노동은 아니지만 임기응변으로 수행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분배노동’(distributive labor)이라고 이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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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월 국내에 출간된 <분배정치의 시대>의 저자 제임스 퍼거슨 미국 스탠퍼드대 인류학과 교수. 강재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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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월 국내에 출간된 퍼거슨 교수의 저작 <분배정치의 시대>는 ‘분배’에 대한 사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이 책의 원제는 ‘남성에게 물고기를 줘라’(Give a Man a Fish)다. 퍼거슨 교수는 물고기가 점점 줄어드는 시대에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칠 게 아니라 직접 ‘물고기’를 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자리 정책보다는 기본소득과 같은 현금이전(cash transfer) 정책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뜻이다. 그는 서구 유럽의 ‘복지국가’ 모델이 정상 가족의 생계부양자인 남성 노동자에게 여러 복지 혜택을 집중하는 방식으로 불평등을 확산해왔다고도 비판한다. <한겨레>는 10월20~21일 제주도에서 열리는 한국문화인류학회 가을 국제학술대회 참석차 방한한 퍼거슨 교수를 만나 분배와 기본소득에 관해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일하지 않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계

-우리는 왜 ‘분배’에 주목해야 하는가?

“20세기에 학자들은 산업화에 수반되는 노동력의 필요성 때문에 거대한 도시로의 대규모 이주가 진행된다고 설명했다. ‘신체 건강한 남성’이 임금노동을 통해 가족을 부양하는 모습이 현대사회의 종착점처럼 여겨졌다. 임금노동의 예외적인 상황인 실업, 질병, 장애 등의 문제에만 국가가 직접 개입해 복지를 제공했다. 하지만 오늘날 도시로 향하는 이주자는 여전히 많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일자리는 현저하게 적다. 과거처럼 공장이나 광산에서 노동자로 일하는 게 아니라, 쓰레기통을 뒤지거나 폐품을 줍거나 허드렛일에 종사하면서 이른바 ‘비공식 경제’ 부문에서 근근이 생계를 꾸려나가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현대의 도시는 ‘일하지 않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이들을 위해 각국 정부나 학자들은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신자유주의로 인해 한때 안정적이었던 사회가 파괴되고 있다는 서사다. 많은 진보적인 지식인들 역시 ‘임금 없는 인생’은 불명예스럽고, 일자리가 없는 이들은 신자유주의의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은 여전히 완전고용 시장을 통한 경제성장을 기대하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예견한다. 하지만 임금노동 없이는 의미 있는 삶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은 기우에 불과하다. 인류 역사의 99%는 임금노동이 중심이 아니었다. 임금노동이 정점에 달했던 복지국가 시기에도 소수의 사람들만이 안정적인 정규노동자로서의 삶을 유지했을 뿐이다.”

-당신이 이야기하는 ‘분배노동’과 ‘분배정치’는 무엇을 뜻하는가?

“임금노동의 기회를 잃은 이들은 구석에 가서 죽기를 기다리는 대신에 끊임없이 ‘분배’를 요구할 근거를 찾아내려 애쓰고 있다. 풍부한 우라늄과 같은 광물자원이 우리의 몫이니 배당하라고 주장하거나, 기본소득 캠페인 등을 벌이는 게 대표적이다. 또한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임금노동에만 종사하지 않을 뿐 열심히 무언가 일하고 있다. 이들은 어떻게 하면 타인의 소득에 대한 접근권을 확보할 수 있느냐 하는 전략에 집중한다. 임금노동을 토대로 하지 않는 다른 종류의 분배방식이다. 부모에게 얹혀살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빌리는 것처럼 분배노동을 통한 생계유지에는 한 사람의 모든 사회적인 관계가 동원된다. 고대에는 숲에 가서 도마뱀을 찾아오는 수렵 생활을 생산활동이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쓰레기통을 뒤지는 건 생산활동이 아니라고 한다. 무엇이 생산활동인지 노동인지 개념 자체가 바뀌어야 할 때다. 물론 분배노동이 노동의 전부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분배노동이 지탱하는 생계방식, 그리고 분배를 요구하는 주장들이 열어가는 새로운 분배정치의 모습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렇게 분배에 기대는 ‘의존성’은 흔히 비판의 대상이 되는데.

“우리는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는 존재다. 독립성은 바람직하고 의존성은 나쁜 게 아니다. 어떤 의존의 형태는 바람직하고 어떤 의존은 약탈적인지로 논의가 옮겨가야 한다. 산업화 시대에 광산 노동자가 고향 집에 송금하는 것도 일종의 분배노동이었고, 피부양자들은 그에게 의존했던 셈이다. 기본소득과 같은 현금이전 정책은 의존성의 유익한 혜택에 주목한다. 소액이지만 현금이 지급되면 어떤 여성은 위험한 성매매 행위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고, 어떤 이는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도록 장례에 참석해 부조금을 낼 수도 있다. 개개인에게 선택권을 주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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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국민기본소득운동본부,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노동당, 녹색당 기본소득의제모임, 알바노조, 문화연대 등이 8월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기본소득 개헌운동’ 출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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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의미의 재구성

퍼거슨 교수는 새롭게 나타난 ‘분배정치’의 모습 가운데 기본소득에 대한 뜨거운 관심에 주목한다. 20~21일 한국문화인류학회에서 논의된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도 기본소득이었다. 조문영 연세대학교 교수는 “대안적 복지로서, 진화된 마르크스주의로서, 자본주의의 연명장치로서, 미래 기술사회를 준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기본소득’이 여러 담론들의 치열한 경합의 장이 되고 있다”며 “기본소득을 단순히 하나의 제도나 정책으로 환원시키기보다 그 의미를 독해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학회에서는 성남시의 청년배당, <한겨레21>의 기본소득 스토리펀딩 프로젝트, 대전에서 진행된 기본소득 지급 실험 등의 사례도 소개됐다. 퍼거슨 교수는 “최근 한국에서의 기본소득 논의 확장이 매우 놀랍다”고 말했다.

‘존재’만으로도 충분해

-핀란드, 캐나다 등에서 여러 기본소득 실험이 진행 중이다. 남아공 사례가 성공적이었다고 하더라도, 국가마다 경제나 복지 현실이 다르기 때문에 기본소득 제도를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지 않나?

“산업화 국가들과 저개발국의 상황은 엄연히 다를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에서는 기본소득 도입이 기존 사회복지를 삭감할 빌미가 될 수도 있다. 기본소득은 기존 복지제도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보완하는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제도를 어떤 의미와 목표로 진행할 것인지는 나라마다 정치적으로 해결할 문제다. 개인적으로는 국가가 운영하는 프로그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간 자선단체인 ‘기브 다이렉틀리’(Give Directly)가 케냐에서 5년간 지급하는 기본소득 실험과 남아공 정부가 시행한 현금이전 정책은 엄연히 다르다. 사람들은 국가에 더 큰 신뢰를 갖게 마련이다.”

-기본소득을 받는 대상은 누가 되어야 할까. 시민이라고 호명될 수 없는 ‘외부자’들의 포함 여부는 논란이 될 수 있다.

“누구나 ‘존재’(presence)만으로도 사회의 일정한 몫을 나눌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우리 중의 하나’(one of us)라는 조건이 중요했다. 국가의 일원이거나, 임금노동에 종사하는 복지국가의 시민이어야 한다고만 생각해왔다. 이제는 ‘우리 중에 여기에 있다’(here among us), 즉 존재 자체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위기감이 극단적으로 나아가면 불법체류자 축출, 인종혐오주의, 국민국가의 배타성 강화로 나아갈 수 있다. 굉장히 위험한 형태의 포퓰리즘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미국에 거주하는 멕시코 불법체류자 자녀들이 있다. 이들은 실질적인 시민이 아니라서 교육받을 권리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학교에 보내지 않으면 이 아이들은 어떻게 자랄까? 답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다.”

-기본소득 등의 분배정치 요구는 계속 확산될까?

“우리는 그동안 생산과 분배 가운데 분배를 지나치게 간과하고 과소평가했다. 생산주의적 편향 때문에 노동이 무엇이고 왜 중요한가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왜곡됐다. 이제는 분배의 중요성을 복원해야 한다. 그리고 분배 주장들이 새로운 분배정치의 시대를 열어가는 모습을 주목해야 한다.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의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부분이 많고, 각국의 정치적 실험도 아직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다. 앞으로도 여러 실험이 있을 것이다. 분배정치의 가능성은 우리의 상상에 달려 있다.”

제주/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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