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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위근우의 리플레이]상호모방 몸에 밴 TV예능 세상서 ‘기획자’ 송은이가 돋보이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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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팟캐스트 ‘영수증’과 웹 예능 ‘쇼핑왕 누이’ 설계자, 송은이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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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하반기 들어 가장 이슈가 된 예능인은 김생민이다. 동명의 팟캐스트로 인기를 얻은 뒤 지상파에 진출한 15분짜리 예능 <김생민의 영수증>(이하 <영수증>)은 호든 불호든 뜨거운 반응을 이끌었고, 그의 유행어 ‘스튜핏’과 ‘그뤠잇’은 온갖 상황에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김생민은 이미 10년 전에도 KBS 설 특집 <경제 비타민>에서 재테크 노하우를 공개하기도 했던 소문난 경제 전문가였다. 김생민이 어디선가 툭 튀어나와 대세가 된 게 아니라, 요즘 사람들의 욕망에 맞춰 적절히 소환되었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그리고 그 안목 있는 소환사는, 송은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는 파트너 김숙과 함께 만들어간 팟캐스트 <비밀보장>에서 청취자의 경제 상담 자문을 위해 김생민을 불렀고, 그것이 고정 코너화되었다가 <영수증>이란 단독 팟캐스트로 분리되었다. 김생민 스스로도 인터뷰에서 잊지 않고 감사를 표하듯, 그는 <영수증>과 김생민을 지금처럼 대세로 만든 설계자다. 그럼에도 지금 예능 기획자이자 제작자로서의 송은이에게 주목해야 한다면 <영수증>을 성공시켰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 번의 대성공은 보통 운의 크기만을 증명할 뿐이다. 오히려 <영수증>을 포함한 여러 기획들의 맥락 안에서 송은이의 능력은 더 명확히 드러난다.

송은이가 역시 김숙과 함께 최초로 공개한 웹 예능 <쇼핑왕 누이>는 <영수증>의 대척점에 있는 콘텐츠다. 출연자들은 그날의 주제에 따라 생활용품부터 패션용품, 음식까지 브랜드를 그대로 노출시켜 추천 및 홍보한다. 어떤 키워드로 검색해야 해당 상품 정보가 나오는지까지도 꼼꼼히 보여준다. 김숙이 출연했던 JTBC 온라인 <마녀를 부탁해>도 떡볶이 브랜드를 홍보했고, 코미디 TV <신상 터는 녀석들>도 신상품을 추천하지만, 다들 PPL의 범위 안에 있던 것과 달리 <쇼핑왕 누이>는 대놓고 해당 제품의 쇼핑을 부추긴다. 김생민이 본다면 “스튜핏”을 외칠 것 같은 이 방송은, 하지만 사실 <영수증>과 함께 <비밀보장>에서 탄생한 자매다. <영수증>이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에 대해 묻는 청취자를 돕기 위해 시작되고 확장된 기획이었다면, <쇼핑왕 누이>는 쇼핑에 결정 장애를 가진 청취자에게 역시 <영수증>처럼 맞춤형 솔루션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핵심은 돈을 아끼느냐 쓰느냐가 아니라, 지금 각각의 사람들이 원하는 걸 제대로 제공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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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이의 기획력은 <영수증>과 정확히 대척점에 있는 <쇼핑왕 누이>에서 잘 드러난다.

방송화면 캡처


지상파 버전 <영수증>에서 김생민이 홈쇼핑에서 떡갈비를 산 제보자에 대해 훈계하는 동안, 송은이와 김숙은 흰쌀밥에 떡갈비 예찬을 펼치고 시청자들은 정작 김생민의 절약 팁보다 그 둘의 상품 소개와 소비에 대한 유혹에 더 끌린다는 반응을 보였다. 바로 그런 이들이 <쇼핑왕 누이>를 보면 된다. 모두가 <영수증>을 상찬하고 있지만, 정작 그 기획자는 비슷한 시기에 정확히 반대되는 지점에서 또 다른 시장을 개척해냈다.

사실 <비밀보장>부터 <쇼핑왕 누이>에 이르는 변화의 과정에서 보이는 송은이의 기획력이 아주 기발하거나 천재적인 것은 아니다. 작지만 유의미한 대중의 반응이 있을 때 놓치지 않는 능력은 탁월하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해냈다고 말하긴 어렵다. 대신 그의 선택엔 확실한 논리적 정합성이 있다.

자신과 김숙 같은 비혼 여성 예능인이 기존 방송 시장에서 자리를 찾기 어려워지자 스스로 방송을 만들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사비로 녹음 장비를 사서 팟캐스트를 시작했고, 결정 장애라는 신조어가 유행할 즈음 청취자의 결정을 돕는 콘셉트로 방송을 기획했으며, 인기가 높아지자 지상파 라디오에서 <송은이, 김숙의 언니네 라디오>를 진행하게 됐지만 자신들의 기반이 된 <비밀보장>을 놓지 않았다. <비밀보장> 팬들의 요청대로 동영상 채널 비보 티브이를 만들어 유튜브로도 진출했다. <영수증>과 <쇼핑왕 누이>로 확장 및 분화하는 과정은 상술한 대로다.

하나하나만 보면 모험처럼 보이지만, 전후 맥락에서 어느 것 하나 이해되지 않는 선택은 없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중요한 기로에서 합리적 선택을 하는 대신 통념과 관성에 기댄다. 당장 TV 방송 시장에 자리가 안 나고 팟캐스트 및 유튜브 시장의 성장이 눈에 보여도 그 길로 직접 뛰어들기 위해선 ‘그래도 TV가 최고고 떠나면 못 돌아온다’는 오래된 통념을 무시할 수 있어야 한다. 합리적 선택엔 지성만큼 용기도 필요하다. 송은이와 김숙은 그걸 해냈다.

생존을 위해 노력하다 보니 뉴미디어 예능의 선두 그룹이 된 송은이의 성공 사례는 그래서 경쟁 압력이 느슨해진 방송 시장 안에서도 복기될 법하다. 가령 소위 사단, 라인 같은 말로 묶이는 방송인 친목 연대가 방송을 거듭할수록 자기들의 공고한 세계를 재생산하는 것과 달리, 송은이가 김숙과 만들어가는 세상은 명백한 성공 사례인 <영수증> 반대편에서 <쇼핑왕 누이>를 만들 정도로 넓은 확장성과 변화의 폭을 보여준다.

당장 절친한 친구 유재석이 KBS <해피투게더 3>에서 재결성한 조동아리가 자기들끼리의 사담에 매몰된 것을 보라. 송은이 또래의 남성 MC들이 심지어 사회적 물의를 빚고도 한 자리씩을 꿰차며 어떤 기획을 해도 비슷한 40대 한국남자 정서를 만들어내는 것과 비교해 송은이는 본인의 친분을 십분 활용하되 각 기획에 맞는 조합을 꾸린다.

형식적인 실험도 마찬가지다. 지난 추석 연휴 동안 KBS에서 선보인 예능 파일럿 프로그램들 중 <줄을 서시오> <혼자 왔어요> <하룻밤만 재워줘> 등은 타사 프로그램 포맷을 상당 부분 그대로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창의력 부족도 부족이지만 여기엔 우선 트렌드를 모방하고 보자는 오래된 통념이 함께한다. 그에 반해 최근 KBS에서 방영한 예능 중 가장 신선했던 게 <영수증>이라는 건 상징적이다. TV 프로그램들이 서로 형식을 모방하는 동안 <비밀보장>과 <영수증>, <쇼핑왕 누이>는 모든 군더더기를 덜어낸 채 시청자(혹은 청취자)의 요구와 프로그램의 목적에만 집중한다. 송은이가 만든 콘텐츠 제작사 컨텐츠랩 비보의 모토 중 하나인 ‘가벼워져야 날 수 있다’는 다시금 많은 예능 기획자들이 곱씹어 볼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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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년배 중 가장 먼저 재능을 증명해냈지만, 여성 예능인에게 유독 더 가혹하고 배타적인 분위기에서 부침을 겪었던 과거의 기린아는 역시 비슷한 처지인 동지와 함께 자신들을 위한 미래를 기존 시장 바깥에서 개척해냈다. 물론 바로 그 이유로, 그들이 당시 방송 시장에서 잘 풀렸어도 이런 개척을 해냈을까,라는 씁쓸한 의문이 따른다.

하지만 스몰마켓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단장인 빌리 빈이 필요에 의해 만들었다고 머니볼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머니볼을 통해 메이저리그 전체가 한 단계 발전했듯, 기획자 송은이의 성공 사례는 동년배 남성들끼리 서로 부둥켜안고 도태된 공룡이 되어가는 TV 방송 시장에 좋은 자극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기어코 그들이 공룡의 길을 택한다면, 우리 호모사피엔스들은 유튜브에서 송은이의 다음 기획을 기다리는 수밖에.

<위근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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