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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이택희의 맛따라기] 총각이 만든 반찬, 단골은 장년층 주부 … 훈남 반찬가게 ‘구선손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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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각 대표와 4명의 총각들이 운영하는 반찬가게 ‘구선손반’에서는 하루 60~120가지 반찬과 양념류를 판매한다. 제육볶음만 해도 된장·간장·고추장으로 양념을 바꿔 여러 가지 맛을 낸다. 사진은 소고기 불고기와 제육볶음 6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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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지만 반찬가게를 소개한다. 주인은 총각이고, 훤칠 말끔한 귀공자 스타일 ‘훈남’이다. 외모를 보고 젊은 여성 손님이 많겠다고 지레짐작하면 오산이다. 단골은 40대 중반~70대 주부가 대부분이다. 상호도 독특하다. 홍순조(32)씨가 운영하는 ‘구선손반(具膳?飯; 서울 성동구 행당로 76 한진노변상가 113호/전화 02-2296-8800)’이다. 지하철 행당역 4번 출입구 전방 100m쯤에 있다.

날마다 파는 반찬·양념류 60~120가지

매일 바뀌는 ‘오늘의 메뉴’ 3종을 포함해 반찬·양념류 60~120가지를 판매한다. 김치·장류 각 5가지, 장아찌·찌개·나물 각 10가지, 조림·볶음 각 20가지, 무침 30가지, 국 10가지, 젓갈 4가지 등이다. 즉석에서 먹을 수 있는 도시락 11가지, 만두 3가지와 치킨텐더도 있다. 그를 만난 지난 9일 ‘오늘의 메뉴’는 간장제육볶음·양념꽃게장·부대찌개였다(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 참고 http://gusunsonb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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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동구 행당역 한진타운아파트 노변상가에 있는 반찬전문점 ‘구선손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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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입구에 세운 김치 홍보 배너. 할머니와 아버지·숙부, 두 고모 사진과 할머니의 가르침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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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석 수제 도시락 메뉴를 알리는 배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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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는 33㎡(10평) 3개 층을 쓴다. 1층 매장과 주방, 2층 저장고와 재료 처리장, 3층은 사무실이다. 2층과 3층으로 오르는 계단 벽에는 식재료가 빼곡하게 진열돼 있다. 27~33세 미혼 남자 직원 4명이 함께 일한다. 남자뿐이지만 매장은 청결했다. 반찬을 파는 그릇은 전자레인지에 돌려도 해롭지 않은 재질의 용기를 쓴다. 일반 그릇(20~30원)보다 10배(200~350원) 비싸다고 한다. 주인 홍 총각은 “평범하게 집에서 만들어 먹는 맛, 보기엔 화려하지 않지만 먹으면 느낌이 오고 추억이 살아나는 순박한 맛의 음식을 추구한다”고 했다. 문 여는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8시까지이고 일요일은 쉰다.

가게로 들어가면 왼쪽에 재미있는 액자가 걸려있다. 할머니가 김치 담그는 사진을 가운데 두고 한자 성어와 풀이가 씌어있다. 주인의 마음과 브랜드 철학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사진은 합성했는데 원본은 할머니가 어린 홍 총각을 목욕시키는 장면이다. 할머니가 손자를 씻기는 정성으로 반찬을 만들겠다는 다짐을 그렇게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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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에 걸린 액자 실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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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찬가게를 연 장손은 자신을 씻기던 할머니 사진을 합성해 마당에서 김치 버무리는 장면으로 만들었다. 할머니가 손자를 씻기는 정성으로 반찬을 만들겠다는 다짐을 그렇게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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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홍순조)을 씻기는 할머니 고 박길자 여사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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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만드는 마음가짐은 할머니 내림

사진 아래 적힌 글은 낯선 상호를 설명하고 있다. 4자 250구로 구성된 천자문에서 따왔다. 천자문은 4자씩 2구, 여덟 글자로 대구를 만들어 하나의 뜻을 이룬다. 8자 대구 125개 중 101번째가 ‘구선손반 적구충장(具膳?飯 適口充腸)’이다. 반찬을 갖추고 (저녁)밥을 먹고, 입에 맞게 속(장)을 채운다는 말이다. 반찬가게 이름이 거기 나온다. 가게를 지키는 정신은 ‘대안불식 사득량찬(對案不食 思得良饌)’이다. 밥상을 대하고도 잡수지 않거든 좋은 반찬 얻기를 생각하라는 뜻이다. 『사자소학(四字小學)』의 한 구절이다. 조선시대 어린이 한자교본으로 엮은 책이다. 주자의 『소학』과 다른 경전에서 추린 내용을 어린이가 쉽게 익히도록 4자 1구로 엮었다. 이 말들은 홍 총각을 키워준 할머니를 통해 배웠다.

할머니 고 박길자(1921~1995) 여사는 전남 담양 용산리에서 태어나 내장산(763.5m)과 추월산(731.2m) 사이에 깃든 전북 순창군 복흥면 남양홍씨 남양군파 소종가로 시집왔다. 남편이 장남은 아니어서 종부는 아니었지만 종가 살림은 배웠다. 아들과 손자는 독자였다. 할머니는 장손을 열 살까지 키워주고 돌아가셨다. 그래서 홍 총각의 반찬가게는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의지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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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찬가게에는 여러 가지 메시지를 담은 글이 많이 걸려 있다. ‘구선손반의 마음가짐’이란 글은 사훈이다. 내용이 자못 비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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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낱 반찬가게라 할지 모르지만 사훈(社訓)도 있다. 내용이 정성스럽고 원대하다. 새겨보면 할머니의 가르침을 확장해 경영에 적용한 표현이다. 식품 대기업으로 키우겠다는 큰 꿈도 서려있다. “①구선손반을 운영하며 나 자신을 꾸준히 갈고 닦겠다. ②구선손반을 운영하며 나보다 직원들의 성장을 꿈꾸겠다. ③구선손반을 운영하며 매장을 방문하시는 고객과의 만남을 소중히 여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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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조 대표를 만나러 간 날의 늦은 점심상. 평소 직원 회의 때 쓰는 테이블에 차렸다. 상호를 따온 천자문의 구절이 크게 씌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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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오후 1시 홍 총각을 만나러 반찬가게로 찾아갔다. 미리 연락하니 늦은 점심을 차려 놓겠다고 했다. 그의 꿈이 약동하는 사무실에서 밥상을 받았다. ▷7찬 접시(샐러리장아찌, 연근조림, 압력솥에 쪄낸 돼지고기장조림, 깻잎장아찌, 더덕무침, 느타리볶음, 배추김치) ▷거피한 들깨가루와 호박·두부·팽이버섯·감자가 들어간 시골된장찌개 ▷김치찜과 데운 두부 ▷백김치 ▷불고기 ▷숙주초무침 ▷보리된장쌈이 차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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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접시에 담은 7가지 반찬. 12시부터 시계방향으로 깻잎장아찌, 압력솥에 쪄낸 돼지고기장조림, 연근조림, 샐러리장아찌, 느타리볶음, 더덕무침과 가운데 배추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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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피한 들깨가루와 호박·두부·팽이버섯·감자가 들어간 시골된장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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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찜과 데운 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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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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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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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주초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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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2세 청년들 음식이 맛은 예스러워

예측은 두 가지가 빗나갔다. 전라도 총각이 만드는 반찬이니 맛이 진하고 화려할 걸로 생각했다. 신세대 퓨전음식이 주종이며 달고 짜지 않을까 짐작했다. 그렇지 않았다. 고전적이고 차분한 음식이었다. 청빈한 선비네 늘그막 안주인의 밥상을 받은 듯했다. 간은 내 입에도 좀 싱거울 정도로 저염이다. 반찬 만들 때 저울로 달아서 양념을 하고 염도계로 간을 맞춘다. 자극적인 맛도 거의 없었다. 원재료 맛을 지키는 범위에서 양념을 쓰는 조리 원칙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된장에 삶은 보리쌀을 넣고 비벼서 만든 보리된장쌈은 수십 년 전 시골 풍경이 생각나는 조합이었다. 된장의 염도를 낮추는 건강한 처방이기도 했다. 백김치는 치장하지 않은 시골 색시 같은 자태인데 맛이 수더분하면서 시원했다. 압력솥에 쪄서 가늘게 찢은 돼지고기장조림도 짜지 않고 구수한 맛이 추억을 일깨운다. 요새는 소고기장조림도 흔하지만 예전엔 돼지고기 건져 먹고 남은 장조림 간장을 두고도 형제가 밥상에서 다투던 시절이 있었다. 반찬에 흐르는 미각은 그가 말한 대로 ‘평범하게 집에서 만들어 먹는 맛’을 잘 구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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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된장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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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고기에 보리된장을 올려 한 쌈을 만들었다. 홍순조 대표가 권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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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4시간에 걸쳐 그의 얘기를 들었다. 12일 저녁에는 그와 가깝고 나도 아는 사람들 5명이 어울려 3시간 동안 술을 마시며 그를 지켜보기도 했다. 사연은 진진하고 사람은 진실했다. 젊은 나이에 겪은 풍상이 아버지 뻘인 나보다 더 격정 넘치고, 격동적이었다(실제 그의 아버지는 나와 갑장이다). 요새 보기 드문 젊은이여서 사연이 길지만 있는 얘기를 다 썼다.

아버지(59)는 전북 순창에서 9남매(7녀2남) 중 여덟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졸업 무렵 부친을 잃었다. 이후 혼자 힘으로 대학원까지 마치며 자수성가했다. 일찍이 오리엔트시계 회사(현재 갤럭시 시계 생산)에 1기로 들어가 수리기술을 배웠다. 1970년대 말부터 회사가 전국에 영업소를 내며 사세를 확장할 때 서울·정읍·전주 등을 돌아다니며 근무했다. 1984년 결혼 후 아기(현재의 홍순조)를 갖게 된 부모님은 시계 수리를 겸하는 금은방을 차려 전주에 정착했다.

1997~8년 IMF 외환위기로 금값이 다락같이 올랐다. 그 바람에 빚을 지게 됐고, 금은방 사업은 전망이 보이지 않아 접었다. 주변에서 음식점을 권했다. 외식업에 관심 있던 터에 솔깃한 얘기를 하니 결심이 빨라졌다. 2006년 전주에 ‘놀부항아리갈비’라는 가맹점을 냈다. 매장이 330㎡(100평)나 되는 큰 음식점이었다.

10년간 할머니 사랑 독차지한 장손자

부모님이 금은방 사업에 매달려있는 사이 장손 순조는 할머니 품에서 컸다. 외아들에게서 얻은 맏손자이니 얼마나 예뻤을까. 할머니가 돌아간 초등학교 4학년까지 한 이불 속에서 자랐다. 할머니는 손자가 공부하는 걸 좋아했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한자 책을 사다 주며 써보라고 했다. 그 덕에 한자와 일찍 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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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냉장고에 붙어있는 식품 재고 현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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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냉장고에 붙어있는 식품 재고 현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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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냉장고에 붙어있는 식품 재고 현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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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찬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둔 냉장고들. 2층은 면적의 절반 이상을 냉장고가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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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중학교 2학년 때(1999년) 처음 아버지에게 얘기했다. 뺨에서 불이 났다. 그게 대답이었다. 집을 나갔지만 한나절만에 들어왔다. 이유는 배가 고파서였다. 꿈이 사라지자 하고 싶은 게 없었다. 허송세월, '멍 때리는 날들'을 보냈다. 고등학교에 가서도 방황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한자 공부를 권했다. 1학년 때 학원에 등록했다. 한자는 또래보다 많이 앞서 있었다. 학원에서 중국어를 병행하길 권했다. 그게 인연이 돼 전주대 중어중문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1학년을 마치고 집안 사정이 어려워 해병대에 자원했다. 입대(2004년 12월 7일)를 일주일 앞두고 집에 알렸다. 집에서 난리가 났다. 할머니 품에서 자라 성격이 유약하다는 생각을 평소에 많이 했던 터라 성격을 고쳐보고 싶었다. 남자다운 성격으로 아버지에게 듬직한 느낌을 주는 아들이 되고 싶었다. 해병 987기로 해병2사단에 배속돼 강화 교동도에서 근무했다. 북한 땅이 건너다 보이는 최전방이다. 2006년 휴가를 나왔는데 부모님이 고기 먹으러 가자고 했다. 고기를 먹고 나서 아버지는 “먹었으니 이제 일해라” 했다. 아버지가 식당을 낸 것이다.

해병대에서 그의 성격은 많이 달라졌다. 특히 리더십이 좋아졌다고 했다. 제대 후 복학해서는 학회장도 하고 발표회 같은 행사를 기획하거나 사람들과 어울려 일하는 걸 좋아하게 됐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끌어가는 힘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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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반찬이 들어 있는 가장 큰 진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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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안의 장류 진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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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골국·돈가스·제육볶음과 수정과·식혜 등을 진열한 냉장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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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진열 전용 냉장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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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식당 도우며 고깃집 차리는 꿈

대학에 다니면서 아버지 식당 일을 꾸준히 도왔다. 고깃집을 차리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커졌다. 넓은 식당이 손님으로 꽉 찼던 어느 날 노모와 만삭의 부인이 한쪽에서 고기를 태우기만 하고 제대로 구워 먹지 못하고 있었다. 노모는 기력이 쇠하고 부인은 배가 불러 고기를 다루기 어려웠다. 바쁜 시간이지만 고기를 구워줬다. “고맙다. 잘 먹었다”며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갔다. 기분이 좋았다.

3개월 뒤 계산대를 지키고 있는데 아기 안은 젊은 부인이 다가와 와 “반갑다”며 알은 체를 했다. 정작 홍 총각은 알아보지 못했다. 부인이 “그때 고기 잘 구워줘서 고맙고 맛있게 먹어 또 왔다. 덕분에 아기를 순산했다”고 말하는데 전에 경험하지 못한 감동이 밀려왔다. 감전된 듯한 전율이 온 몸을 스쳐갔다. 내가 만든 음식도 아닌데 그런 감동을 받으니 옛날 생각이 났다. 부모님은 생업에 바쁘고 할머니는 돌아가신 후 두 여동생 밥을 가끔 챙겨줬다. 밥에 기름 치고 비벼서 토마토케첩 뿌려 주면 그렇게 맛있어 했다. 그걸 보면서 요리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키웠다. 그 시절의 느낌이 되살아났다. 행복했다. 아버지에게 뺨 맞고 접어두었던 꿈을 다시 매만졌다.

고깃집 창업을 결심하고 준비를 시작했다. 학교 교수들도 다 알 만큼 열성이었다. 2007년 초 돈을 벌기 시작했다. 오전 2시~9시에는 김제에서 비닐하우스 수박 출하 일을 했다. 하루 8만원을 받았다. 오전 10시부터 오후5시까지는 시간당 5000원을 받고 전주 시내에서 석유 배달을 했다.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는 아버지 음식점 일을 도왔다. 잠은 하루 2~3시간만 잤다. 요즘도 하루 3~4시간밖에 자지 않는다. 방학 석 달 동안 월수입이 200만원쯤 됐다.

방학 때 음식점 일해보려 무작정 상경

그해 12월 겨울방학 땐 이력서 몇 장 들고 무장적 서울로 갔다. 서울이 어떤 곳이고, 외식업 세계가 어떤지 궁금했다. ‘놀부유황오리’ 잠실점에서 3개월간 일 배울 기회를 얻었다. 아버지가 같은 가맹점 점주라는 사실은 감춘 채였다. 경험도 값졌지만 중요한 사람을 만났다. 배훈 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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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조 대표는 나이에 비해 경험이 다양해 사연도 진진했다. 4시간을 얘기해도 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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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쥐고 도마 앞에 선 홍순조 대표. 그는 요리를 하는 것보다 반찬 메뉴를 개발하는 게 주 임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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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조리대에서 총각직원 두 명이 반찬에 쓸 양념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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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마친 2010년부터 아버지 음식점 정식직원으로 일했다. 비 오는 봄날 고장 난 환풍기를 고치는데 아버지의 초등학교 여자동창이 와서 보더니 “아들이 왜 여기 있어?” 하고 물었다. 불쌍하다는 눈초리로 보는 듯한 자격지심이 들었다. 3년 전 만난 잠실의 배 점장에게 연락을 했다. 서울에서 일하면서 본격적으로 외식업을 배우고 싶다고 하니 올라오라고 했다. 1주일 뒤인 5월 5일 30만원을 가슴에 품고 오전 7시 서울 가는 차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 간다 하니 주변에서 말이 많았다. 특히 아버지는 “가면 인연 끝”이라며 완강했다. 새벽 어스름, 오전 5시에 편지 한 장 올리며 안방 문 앞에 큰절을 하고 집을 나섰다.

배 점장 밑에서 일을 시작했다. 3년 전 함께 일하던 형도 있었다. 그에게 부탁해 신천역(현재는 잠실새내역) 근처에 고시원 싼 방을 구하기 위해 5시간을 돌아다녔다. 월 21만원짜리 창문 없는 방을 얻었다. 전등을 끄면 바로 암흑으로 변하는 방이었다. 남은 9만원으로 한 달을 살았다. ‘놀부’ 일이 오후 10시에 끝나면 심야업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1년 만에 2500만원을 모았다. 창업해야 하기 때문에 지독하게 아꼈다. 방세·전화요금·기초생활비를 빼고 모두 저축했다. 2011년 봄까지 쉬는 날이 없었다. 오전만 쉰 날이 12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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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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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념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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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놀부’ 직원들과 회식을 했다. 당시 유행하던 이자카야 주점이었다. 술집인데 대기손님이 많았다. 일본에서 20년 배우고 온 사람이 만드는 수제 안주가 맛있어서 손님이 많다고 했다. 본 적 없는 신기한 광경이었다. 이 사람 요리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며칠 후 무작정 찾아가 돈은 안 줘도 좋으니 요리를 배우고 싶다고 매달렸다. 주방 실장은 “그렇게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며 “지금은 주방에 자리가 없으니 일단 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기다리라”고 했다.

일 배우던 이자카야서 목돈 사기당해

10개월을 했다. 둘째 달부터 단골이 늘기 시작해 홀 매니저로 승격됐다. 수첩에 손님 특성과 자주 주문하는 음식 등을 정리하며 고객관리를 한 덕이다. 혼자 일본 술 공부도 해 사케 소믈리에 역할도 했다. 손님들이 좋아했다. 사장인 줄 아는 손님도 생겼다. 지금은 제주에 내려가 있는 주방 실장도 인정해줬다. 그날 추천메뉴를 정해주면 손님들에게 잘 설명해 모두 팔리게 했다. 식재료 활용률이 높아지고 수급 관리도 수월해져 실장이 좋아했다. 제자들 제치고 호흡이 맞는 홀 매니저를 더 인정했다. 오후 5시에 문을 여는데 2시에 나와 요리를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그러라 했다. 옆에서 설거지를 하면서 견학부터 시작했다. 실장이 일하는 패턴을 기억해뒀다가 눈치껏 옆에서 뒷시중을 들었다. 양념류를 쓰는 순서대로 배열해 놓거나 그런 일들이다. 실장은 “너 뭐하던 놈이냐”고 놀라며 귀여워했다. 반면 주방 진짜 멤버 4명에게는 “너희는 X멍청이들”이라고 야단치기 일쑤였다. 시기 질투가 없을 리 없다. 마음 고생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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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용기에 담은 오이지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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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호박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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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돈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장(형이라고 부르던 ‘바지사장’)은 부모님이 위독해 그런다며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니 불현듯 1년 동안 못 본 부모님 생각이 간절했다. 창업해서 자랑스럽게 모시려고 1년간 고향 집에 한번도 가지 않았다. 가족 생각이 간절한데, 돈이 없어 가족이 죽어간다니 … 차용증 받고 빌려주면 괜찮겠지 생각했다. 통장에서 2600만원 중 2400만원을 찾아서 줬다. 돈을 빌려간 사장은 매일 단란주점에 다니고 흥청망청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의심이 들었다. 한달 후에 사기라는 게 드러났다. 사장 가족들에게 찾아갔으나 “원래 그런 놈이니 알아서 받으라”는 답만 들었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소주 3병, 담배 2갑과 3m 굵은 줄을 사 들고 고시원 방으로 갔다. 올무를 만들어 높은 곳에 걸어두고 깡소주를 마시며 줄담배를 피웠다. 제대 후 끊었던 담배다. 술병이 빌 때마다 올무 앞에 올라서 얼굴을 대봤다. 그때마다 가족들 울부짖는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머리에 스쳤다. 해병대에 자원한 건 살면서 힘든 일이 생기면 이겨내는 훈련을 하려는 뜻도 있었다. 이렇게 끝내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 있는 통장에 돈이 다시 채워져 있는 환각이 들기도 했다. 정신이 들고 보면 200만원뿐이었다.

2000원으로 하루 살며 자동차 세일즈

일주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고시원에 박혀 있었다. 열심히 하면 돈을 빨리 벌 수 있는 일이 무얼지 곰곰 생각했다. 보험·자동차 세일즈맨이 떠올랐다. 보험은 평생의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돈 모아 음식점 차리려는 사람에겐 맞지 않았다. 결론은 자동차였다. 2011년 봄 현대차 딜러로 새 출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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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꾸미삼겹살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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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고기장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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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만원으로 월세 45만원 내고(그 사이 더 비싼 방으로 옮김), 50만원짜리 정장을 한 벌 마련한 다음 남은 돈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나 계산해봤다. 방세 내고 하루 용돈을 2000원씩 쓰면 3개월이었다. 사무실이 대치동에 있었다. 출근 교통비로 1200원 쓰고 800원짜리 삼각김밥으로 점심을 때웠다. 퇴근은 걸어서 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길에 홍보전단을 뿌리며 퇴근했다. 아침과 저녁밥은 고시원에서 주는 밥·라면·김치로 해결했다. 하루 16시간씩 전단을 돌리며 돌아다녔다. 둘째, 셋째 달 연속으로 차를 7대씩 팔았다. 3개월만에 실적이 우수한 사원을 축하하는 지점장 면담에 부름을 받았다. 경력도 없는 사람이 신기하다고 했다.

차 딜러를 6개월 했는데 모임에서 만난 경영컨설팅회사 대표가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 2011년 10월 다시 자리를 옮겼다. 일은 재미있었으나 인생 계획과 맞지 않았다. 이러다 때를 놓치는 게 아닐까 싶어 5개월 만에 퇴사했다.

2012년 2월 배 점장에게 다시 찾아갔다. 그도 회사를 옮겨 대기업 외식사업부의 백화점 한정식 점포를 맡아 운영하고 있었다. 거기서 매장관리·홀 서비스를 담당하는 매니저로 일했다. 틈틈이 음식점의 장래성을 따져봤다. 유행이 너무 빨리 변했다. 오래 가는 음식점은 힘들겠다는 판단이 섰다. 고향에 갈까, 다른 일을 해볼까 고민하던 중 두부 사러 시장에 가다가 조그만 가게 앞에 아주머니들이 혼잡하게 모여 있는 광경을 봤다. 반찬가게였다. 사업으로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조림을 만들어 해외로 수출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식품회사로 키우면 장래성도 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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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식 제육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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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식 제육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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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심한 반대 뚫고 반찬가게 창업

2013년 4월 사업계획서를 만들어 전주에 가 아버지에게 보이니 반대가 거셌다. 서류를 찢어버리며 “너는 누구 배에서 태어났는지 참 독특하고 이상한 놈이다. 이런 식으로 살 거면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고 격노했다. 아들이 세상에 내놓기 번듯한 사회인이 되어 집안을 빛내주기를 바라는 아버지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창업 준비를 강행했다. 전주에서 아는 사람들을 통해 향토음식을 배우는 한편 반찬 만드는 연습을 늦추지 않았다. 대치가 길어지자 어머니가 중재를 했다. 6개월 안에 자리를 잡으면 반찬가게를 계속하고 아니면 평범한 직장인이 될 준비를 하기로 했다.

마침내 10월 4일 반찬가게 ‘구선손반’이 문을 열었다. 홍 총각 나이 만 28세였다. 서울 불광동 연신내 한적한 골목에 30㎡(9~10평) 크기의 가게였다. 창업비용 3200만원이 들었다. 모아둔 2800만원으로 사업장과 집기를 마련하고, 400만원을 대출받아 운전자금으로 썼다. 처음엔 3000원짜리 반찬 30가지로 손님을 맞았다. 첫날 30만원어치가 팔렸다. 시골 청년이 한다니까 호기심에 온 듯하다. 둘째 날 3만원, 셋째 날 2만5000원, 넷째 날 1만원 … 31일 일한 월매출은 220만원이었다.

장사가 안 되니까 주방 실장이 제멋대로였다. 할일 없다는 핑계로 출퇴근 시간도 멋대로고, 근무시간에 자리를 비우는 일도 잦았다. 홍 총각은 요리를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다. 혼자서 나름대로 연습을 했을 뿐이다. 칼질 정도만 좀 했다. 창업하면서 전 직장 동생을 주방 실장으로 데리고 왔는데 그랬다. 개업 2주 후부터 속으로 참으며 레시피를 챙기고 귀동냥하며 어깨너머로 일을 배웠다. 한 달 뒤 그를 내보냈다. 그는 유니폼을 내던지며 “잘되나 보자”고 악담을 하며 떠났다.

제멋대로 주방 실장 내보내고 새 출발

홍 총각은 “요즘 젊은이들은 같은 세대지만 너무 약다. 권리 주장은 강하고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 지난해에는 수석 직원이 아래 4명을 모두 규합해 자기들 사업하겠다며 나갔다. 이유도 모르지만 잡지 않았다. 나갈 때 이것 저것 챙겨줬는데 내가 개발한 레시피 공유를 요구했다. 그건 줄 수 없었다. 몇 달 본 것 가지고 나가서 하면 잘될 것 같지만 쉽지 않다는 걸 곧 깨달을 것이다”며 거푸 당한 사기와 배신으로 쌓인 섭섭함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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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장돼지고기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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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줄기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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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장을 내보내고 이를 악물었다. 하루 2~3시간만 자고 요리 공부를 했다. 책을 보면서 조리 내용과 과정을 분석하고 실제로 해보면서 나름의 조리법을 하나 하나 만들어갔다. 다른 곳에서 반찬을 받아서 팔다가 자신이 만든 반찬 맛에 자신이 생기면 하나씩 교체해 나갔다. 오전 5~6시에는 매일 동네 골목을 쓸면서 주민들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반찬 파는 총각인데 시간 되면 들러보세요”라고 보는 사람마다 말을 건넸다. 오전 10시쯤에는 가게 주변 화분을 청소하고 실내를 정돈했다. 두 달을 그렇게 하니까 입소문이 났다. “반찬 맛은 시장과 비슷하지만 더 깔끔하고 주인이 성실하다”고. 4개월째부터 손님이 늘기 시작했다. 하루 매출이 20만원쯤 됐다. 한 달에 600만원어치를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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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으로 오르내리는 계단 벽에는 자재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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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은 창고 겸 자재 처리장이다. 홍순조 대표가 개수대를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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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찬가게를 움직이는 27~33세 총각 5명의 꿈이 약동하는 3층 사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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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중에 잡지 프리랜서 기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 인터뷰를 하자고 했다. “유명한 잡지는 아니지만 경험 삼아 해보라”고 권했다. 개업 5개월 무렵이었다. 그때 기사는 ‘구선손반 블로그(http://blog.naver.com/gusunsonban/220062038684)’ 게시판 2014년 7월 16일자에 올라있다. 기사가 나간 후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다. ‘20대 훈남 총각 반찬가게’는 스토리와 비주얼로 좋은 소재였다. 방송국에서는 요청이 왔지만 출연하기까지는 쉽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얘기했더니 “몇 달 해보지도 않고 네가 뭘 안다고 방송에 나가 떠드느냐”며 “나가지 말라”고 했다. 놓칠 수 없는 기회여서 설득에 설득을 해 겨우 나갔다. 이후로도 방송 출연은 일일이 아버지의 승낙을 받았다.

이 무렵부터 손님들 보는 앞에서 김치를 버무리고 맛보라며 한 가닥씩 잘라 입에 넣어주기도 했다. “엄마가 해준 반찬 파느냐”고 묻는 손님도 있었는데 그런 의심이 바로 풀렸다. 조리실에 폐쇄회로TV를 설치하고 화면을 가게 앞에 연결해 반찬 만드는 과정을 공개했다. 짧은 기간에 3차례나 방송을 타자 손님이 몰렸다.

방송 나가면서 자리 잡자 임대료 올려

2015년 9월 가게 임대차계약이 끝났다. 장사가 잘되니까 월세와 보증금을 올렸다. 반찬가게가 TV에 자주 나가 C급 상권이 살아났으니 인상을 유예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주인은 거절했다. 이사할 자리를 찾아 다녔으나 돈이 적으니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 45일을 헤매니 회의가 밀려왔다. 반쯤 포기하는 심정이 돼 집에 가다가 무심코 인터넷 지도를 열었는데 행당역 일대가 나왔다. 들여다보니 주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여럿이었다.

다음날 행당역으로 갔다. 역을 나가니 ‘홍순보 공인중개사’가 눈에 띄었다. 종씨에 같은 항렬이라는 점에 끌려 바로 들어갔다. 거기서 현재 가게 자리를 추천했다. 사정을 얘기하니 여러 가지를 도와줬다. 건물주 할머니에게도 죽는 소리를 하니 “너 같은 손자가 있는데 도와주겠다”며 파격적으로 좋은 조건에 계약을 해줬다. 계약 전에 일주일을 매일 나가 상권조사를 했다. 이미 몇 차례나 뒤통수 맞은 기억이 있어 조심스러웠다. 예상매출이 잘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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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곰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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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식 장터국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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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14일 가게를 확장하며 행당역으로 옮겼다. 기존 상권과 마찰을 줄이기 위해 나름대로 무척 조심했다. 서울생활 5년 동안 경험으로 배운 것이 호사다마(好事多魔)다. 잘되면 늘 질시가 따랐다. 개업을 알리는 전단도 안 돌렸다. 반찬도 다른 가게에서 안 하는 것 위주로 준비했다. 끓여서 파는 것은 반(半)조리 상태로 팔아 맞대결을 가능하면 피해 갔다.





이사 후 기존상권 마찰 없게 홍보 안 해

홍보를 안 해 처음엔 장사가 안 됐다. 2년 다 돼가는 지금도 ‘구선손반’ 모르는 주민들이 많다. 관찰해보니 주민들이 동네에서 잘 돌아다니지 않고 배달을 좋아해 전단 홍보를 하지 않으면 상가 변화에 관심이 없었다. 다행히 젊은 주부가 지나가다가 특이한 상호를 보고 연신내에 사는 시어머니 얘기를 떠올렸다. “열심히 살던 청년 반찬가게가 동네에 있었는데 갑자기 없어졌다”며 ‘구선손반’ 얘기를 했던 것이다. 그 사연을 “깔끔하고 열심히 사는 청년 반찬가게가 우리 동네로 왔다”고 지역 주부들 인터넷 카페에 올렸다. 그게 소문이 나서 3개월 만에 매출이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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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 사무실 벽에 걸린 글판에도 메시지가 가득하다. ’노력 없이 얻으려 하지 마라“는 말은 그가 체험으로 깨달은 가르침이다. 도시와 농촌,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잘 사는 공영도 그가 추구하는 중심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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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찬을 담아주는 비닐봉투에도 메시지와 정보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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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조 대표는 고향인 순창의 물산을 도시 소비자들에게 알리는 일에도 열심이다. 지난 추석을 앞두고 고향에서 만든 선물세트 예약을 받는 안내판을 내걸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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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당동으로 온 다음에도 방송에 7회나 나갔다. 그걸 본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반찬가게 내고 싶으니 도와 달라는 상담이다. 50~60명은 되는데 두세 시간씩 얘기하며 모두 말렸다. 식품 대기업에서도 연락이 왔다. 만나보면 비전을 살릴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대개가 ‘너는 방송 나가서 스토리와 얼굴을 팔고 나머지는 신경 쓰지 말아라’ 하는 식이다. 단물 빨아먹고 버리겠다는 심산이 뻔해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오전 3~4시에 잠들어 7시에 기상한다. 3~4시간 밖에 자지 않는다. 오전에는 청년창업 사무소에 나가 정보교류를 하고, 가끔은 마장동과 신중부시장에 나가 상인들을 만난다. 최근에는 만들어놓은 천연조미료 유통망을 뚫는 일도 병행한다. 낮 12시쯤 가게로 나와 온라인 쇼핑몰 개설 준비작업을 하고, 연중무휴 운영을 위한 근무표 구성을 고민한다. 오후 8시 가게를 닫으면 메뉴 개발을 하다가 오후 11시에 혼자 사는 월세 집으로 퇴근한다. 그때부터 책을 읽거나 TV 요리프로그램을 보면서 아이디어를 얻고 메뉴를 개발한다. 요리를 배운 선생님이 따로 없으니 책과 TV가 스승이다.

천연양념 중국시장 개척이 당면 과제

요즘엔 불면증과 대인기피증에 시달리고 있다. 불면증은 워낙 잠 안 자고 일하는 게 습관이 되기도 했지만 ▷메뉴 개발 ▷직원 육성 ▷사업 확장과 해외진출을 고민하느라 더 그렇게 됐다. 고향 순창의 물산을 서울 식품·외식 산업과 연계해 공존공영하고, 수출 길을 여는 게 그의 당면과제다. 대인기피증은 갑자기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니 생겼다. 만나면 사람 아닌 돈으로만 보는 눈길이 거북하다. 월세도 면하지 못했는데 돈이 많다고 전제하고 얘기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또 자신의 얘기를 끝없이 해야 하고, 과정이 있어야 결과가 있다는 설명을 반복하는 게 사람을 지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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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 포장에 넣어 보내는 편지. 내용을 보면 총각들의 열정과 정성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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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려 생각하면 그의 사업이 그만큼 성장하고 인정 받은 결과이기도 하다. 그는 중국 진출 채비를 이미 마쳤다. 국제정세 탓에 주춤하고 있지만 시간이 풀어줄 것이다. 시골에서 올라온 청년이 창업한 반찬가게가 4년 만에 국내 기반을 다지고 해외시장을 두드리다니. 온 나라가 청년실업을 걱정하고 창업을 돌파구로 꼽지만 현실적으로 도전이나 성공은 드문데, 참 장한 일이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간다. 교보생명 창업자 고 신용호(1917~2003) 회장의 자서전 제목이다. 12자의 그 말이 홍 총각의 서울살이 7년 가시밭길을 압축 표현한 웅변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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