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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이미지 홍수 시대…물 보며 위안 얻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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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바닥을 '물바다' 만든 김태호

매일경제

파주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전시장 바닥을 물로 채운 설치 작품 앞에 선 김태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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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바닥을 채운 물 위에 부처 머리가 누워 있었다. 물은 벽에 걸린 그림들 뿐만 아니라 가까이 다가온 사람의 얼굴을 비췄다. 가만히 그 속을 들여다보니까 머릿속이 점점 맑아졌다.

경기도 파주출판도시에 위치한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을 '물바다'로 만든 사람은 서양화가 김태호 서울여대 교수(64). 나무바닥에 방수천을 깔아 잔잔한 연못을 만들었다. 이 대담한 설치작업의 의미를 묻자 작가는 "그냥 물"이라고 답했다. 그 속에 들어가도 되냐는 질문에 "방수천이 찢어지면 미술관이 침수될 수 있다"며 만류했다.

"전시가 끝나면 다시 물을 퍼내야 해요. 옛날에는 물처럼 보이는 블랙 미러(거울)를 사용했는데 이번에는 미술관이 허락해줬죠. 물에 비친 부처 모습이 참 멋있어요. 이미지 홍수 속에 사니까 물만 봐도 마음이 평안해지죠. 사람들이 여기서 위안을 얻거나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있다 가면 좋겠어요."

미술관의 자연광도 그의 작품을 빛내는 재료가 됐다. 포르투갈 건축가 알바루 시자가 설계한 이 뮤지엄은 가급적 인조광을 배제하고 자연광을 끌어들여 시시때때로 변하는 빛의 향연을 연출한다.

조도에 따라 김 교수의 회화 작품들도 천변만화한다. 똑같은 색깔 작품을 위아래로 걸어놨는데 다른 빛깔로 보였다. 작가는 "빛의 간섭으로 색이 달라지는 특수 물감을 사용했다"며 "카멜레온 같은 색 변화가 재미있다"고 설명했다.

그 차이를 보여주는 목적은 무엇일까. 답은 '모호함'이었다. "10여 년 전 금호미술관에서 '개와 늑대의 시간' 전시를 한 적이 있어요. 프랑스 관용어로 오후 5시와 6시 사이를 뜻하죠. 산기슭에서 내려오는 늑대가 개와 구분이 안 되는 시간이죠. 사람의 나이로는 50대와 60대 사이예요. 당시 50대 중반이었는데 옳고 그름, 선과 악의 구분이 애매하더군요."

그 애매함을 표현하기 위해 새와 개구리의 중간 형상, 구름과 나무의 중간 형태를 그렸다. 뿌연 아크릴 상자 속에 무슨 동물인지 분명치 않은 입체물을 넣기도 했다. 모호함 이후 찾아온 화두는 '사라짐'이었다. 2006년부터 캔버스에 수십, 수백 번 그림을 중첩해 그린 후 한 가지 색깔로 덮어버렸다. 애써 작업한 그림을 덮어버리면 아깝지 않을까. 작가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림 속에 모두 남아 있다"고 단언했다.

"젊은 시절 그린 그림까지 덮었어요. 눈이나 어둠이 모든 것을 덮을 때 풍경이 가장 아름답지 않나요. 저는 죽는 것도 사라지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림을 덮어도 그 힘은 남아 있다는 게 작가의 생각이다. 유년 시절을 보낸 강원도 원주 시골의 징검다리도 마찬가지였다. 냇물을 가두는 보(洑)가 생기면서 물에 잠겼던 징검 다리가 홍수에 보가 소실되면서 다시 나타났다. "그 징검다리에 서니까 잃어버린 기억이 다시 떠오르더군요. 기억은 사라지지 않아요. 사실 형태도 고정관념이죠. 63빌딩에서 내려다보면 사람은 그저 까만 점이고, 멀리서 보면 유채꽃밭은 그냥 노란색이에요. 형태는 색으로 보여요."

전등사 스님 초상화도 자신만의 화법으로 그렸다. 스님의 얼굴을 그린 후 그 위에 소나무와 집, 절, 바위 등을 그린 후 단색으로 덮었다. "다들 '스님이 어디 있느냐'고 묻길래 '여러분이 생각한 스님 얼굴 그대로 봐라. 그림 안에 스님이 있다'고 했지요. 제가 정형화시키면 스님 얼굴이 고정되니까요."

그리고 덮기를 반복하는 그의 회화는 길게는 수십 년 시간과 공간, 이야기를 품고 있다. 4년간 준비한 이번 개인전 주제는 '사라진 풍경'. 회화 외에도 사진과 나무 설치 작품, 장난감 공룡과 카멜레온, 돌멩이, 깨진 아기 예수 조각상 등을 전시장 곳곳에 놓았다.

"지식도 다 사라지고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사라집니다. 하지만 공룡이 사라져도 우리는 그 존재를 알고 있지요. 매일 재즈의 즉흥 연주하듯 공룡 등 오브제의 위치를 바꾸고 싶어요."

대부분 작품 제목은 '스케이프 드로잉'. 그에게 드로잉은 단지 소묘가 아니라 모든 작품의 과정으로 현재진행형이다. 전시장에서 한자 '端(단)'이 새겨진 그림이 강렬했다. 지난해 김종영미술상을 수상한 작가는 "내 작품을 끝까지 밀어붙이치겠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21일부터 12월 17일까지.

[파주 =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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