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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단독] 수업도 빠진 채... ‘신입생 영업’ 나서는 특성화고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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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정원 미달 속출에 교육청 묵인 속 홍보 도구로 전락

서울 학교들 수십명씩 동원

학생들 홍보 실력을 키우겠다며

학교가 나서 동아리까지 만들고

원서접수 가능성 있는 中3 학생

전화번호 수집 지시하는 경우도

중학교들 홍보 활동 ‘부채질’

“교사보다 재학생 설명에 더 집중”

행사 개최 공문을 직접 보내기도
한국일보

13일 오전 서울의 한 중학교에서 N특성화고 학생들이 신입생 모집 홍보활동을 위한 연습을 하고 있다. 조원일 기자 2017-10-18(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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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까지 설명하고 (교실) 뒤로 갈게. OO이가 다음 설명을 하는 거야.” “그럼 다음 반은 어떻게 하지?”

금요일인 지난 13일 오전 서울 N중학교 본관 로비. 자신의 학교 이름이 적힌 어깨띠를 두른 S특성화고 학생 5명은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무언가를 한참 연습 중이었다. 잠시 후 3학년 교실에서 있을 학교 홍보에 대한 마지막 점검 자리였다. 얼마 뒤, 이 학생들은 10여분 간격으로 3학년 6개반을 돌며 홍보활동을 진행했다.

특성화고 학생들에게는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다. 입시철이 다가오면 그들은 신입생 모집 홍보 활동에 동원된다. 원서접수 시즌에는 수십 개 특성화고 학생들이 중3 교실 앞에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다. 지원 미달을 우려하는 학교측이 수업권을 침해해 가며 학생들을 ‘학교 영업’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한국일보

신입생 유치/2017-10-18(한국일보)


18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서울시교육청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 2월부터 9월까지 서울의 70개 특성화고에서 2,238명(중복 포함)의 학생과 3,172명의 교사들이 신입생 모집을 위해 일선 중학교 등으로 홍보활동을 나갔다. 한 학교당 평균 32명의 학생과 45명의 교사가 학교 홍보에 동원된 것이다. 이건 예고편에 불과하다. 올해 특성화고의 본격적인 원서접수 기간이 11월 중하순인 걸 감안하면, 학생들의 홍보전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서울의 한 특성화고 담임교사는 “원서 접수기간 전까지는 홍보를 하지 않는 학교도 많기 때문에 지금까지 수치는 빙산의 일각”이라며 “11월 말 접수 마감이 임박하면 학교별 설명회 일정이 급증하는데 이때는 학생들이 무더기로 수업을 빠진다”고 말했다. 해당 중학교 강당 등 특정 장소에 중3 학생들을 모아 놓고 진행하는 대규모 진학설명회에는 홍보전담 교사 등이 직접 나서지만, 교실 별 홍보에는 특성화교 학생들만 동원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는 비단 서울 특성화고만의 현상은 아니다. 경기도 지역 71개 특성화고 역시 지난해 총 1,180명(학교당 16.6명)의 재학생들을 학교 홍보 활동에 동원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국 대다수 특성화고 비슷한 상황이라는 얘기다.

특성화고들이 이렇게 학생들을 ‘신입학생 유치’의 전방으로 내모는 건 학령 인구 감소, 그리고 극심한 취업난에 따른 특성화고 입지 위축 등으로 지원자가 미달되거나 간신히 정원을 채우는 상황이 지속되는 탓이다. 과거 실업계로 불렸던 특성화고는 일반고와 달리 대학 진학보다는 특정분야 인재 및 전문 직업인 양성을 위한 목적으로 구성된 교육과정을 운영한다.

실제 서울 지역 특성화고는 거의 매년 미달 학교가 속출한다. 2013학년도에는 61개교, 2015학년도에는 67개교가 무더기로 미달 사태를 맞았고, 작년과 올해에도 각각 6개교, 9개교에서 지원자가 정원에 못 미쳤다.

이러다 보니 심지어 학생들의 홍보 실력을 키우겠다며 학교가 직접 나서서 동아리까지 만들고 학생들에게 가입을 독려하기도 한다. 서울 T특성화고의 경우 홍보 동아리 소속 학생이 120명 가량에 달한다. 오로지 중3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교를 홍보하는 것만이 이 동아리의 목적. 교사들의 지휘 아래 학교 홍보 연습을 한 뒤 3명씩 40개조로 나뉘어서 학교에 파견된다. 이 동아리 소속인 1학년 박모양은 “발표 능력도 기를 수 있고 (대입) 자소서 쓸 때도 도움이 된다고 해서 지난 6월 동아리에 자원했다”면서도 “방학 때도 연습에 동원된 데다가 지난달 말에는 시험기간인데도 중학교 설명을 나가게 돼서 많이 부담스러웠다”고 말했다. 이 동아리 학생들은 1년에 6, 7 차례 학교 홍보에 나서는 것으로 전해졌다.

심지어 학교 측이 홍보에 나선 학생들에게 원서 접수 가능성이 있는 중3 학생들의 전화번호를 수집할 것을 지시하는 경우도 있다. 서울 한 특성화고 졸업생 김모(25)씨는 “중3 교실에 홍보를 나가서 학교에 관심 있는 학생들의 전화번호를 일일이 받아 담당 선생님께 전해드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사실상 ‘갑’의 지위에 있는 중학교들이 특성화고 학생들의 홍보 활동을 부채질하기도 한다. 서울 도봉구 한 중학교는 최근 서울 지역 40여개 특성화고에 다음 달 초 ‘특성화고 이해의 날’ 행사를 개최한다는 공문을 보냈다. 이 학교가 매년 진행하고 있는 이 행사는 특성화고 재학 중인 고교 선배들이 설명회를 갖는 방식. 지난 해에도 24개 특성화고 학생들이 이 행사에 참여했다. 다른 중학교들도 드러내 놓고 요구하진 않지만, 재학생들의 방문 홍보를 요구하고 있다는 게 특성화고 교사들의 반응이다. 수년 째 학교 홍보 출장을 나가고 있는 D특성화고의 한 교사는 “중3 학생들이 교사보다는 재학생들의 설명회에 더 집중도가 높다는 이유로 학교측도 적극적으로 요구를 하는 식”이라며 “밉보이면 지원자가 급감할 수 있다는 걱정 때문에 거부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하소연했다.

노웅래 의원은 "학생들이 특성화고와 중학교, 관할 교육청의 묵인 속에 고등학교 입시 홍보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며 "수업을 빼먹게 하는 학생 동원 홍보활동은 즉각 중단해야 하며 교사들의 무분별한 홍보 출장도 제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원일 기자 callme1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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