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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절대권력 추구 시진핑과 마오쩌둥의 같은 점, 다른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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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부패·여론통제 두칼로 권력집중…서구가치관 배격·민족자존감 강조

연합뉴스

마오쩌둥 절대권력에 근접해가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AFP=연합뉴스]



(상하이=연합뉴스) 정주호 특파원 = 마오쩌둥(毛澤東)의 절대권력에 근접해가고 있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반부패 투쟁과 여론·사회통제를 통해 그 권력을 갈수록 공고화하고 있다.

집권 2기를 앞두고 시 주석이 철권통치 하에 권력을 집중시켜 자신의 '핵심' 지위를 확립하고 '중화 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부르짖는 모습이 갈수록 마오쩌둥의 절대권력을 연상시킨다는 데 중화권 매체들의 시각은 일치한다.

시 주석이 권력 강화를 위해 두 손에 든 핵심 수단은 반부패와 여론통제였다. 2012년 집권하자마자 공직사회에는 반부패로, 민간사회에는 여론통제로 대처했다.

천다오인(陳道銀) 상하이 정법학원 부교수는 BBC 중문판에 "치관(治官), 치민(治民)은 시 주석의 집권 후 권력운영에서 반부패와 여론통제의 논리를 반영하고 있다"며 "이는 곧 권력집중의 논리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시 주석의 집권 당시 해외에서는 중국이 정치체제 개혁에 나서 서구식 민주 헌정을 도입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시 주석은 정반대로 일방적인 권력집중의 길을 택했다.

그의 권력집중이 향후 정치개혁을 추진하려는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라는 선의의 해석도 무색해졌다.

특히 시진핑과 마오쩌둥은 모두 강력한 지도력을 내세워 '권력집중'을 신봉하면서 목적 달성을 위해 기존 규칙과 전통을 파기하고 각종 수단을 동원하는 모습에서 비교 대상이 된다.

커우젠원(寇健文) 대만 정치대 국제관계연구센터 주임은 "시진핑과 마오쩌둥은 권력행사에서 유사점이 많다"며 "이들은 사상적으로도 서방 가치관을 배척하고 민족적 사명감을 강조하는 이원대립적 사고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시 주석의 개인적 성장배경은 그의 1인 체제 추구의 의도를 살펴볼 수 있는 단면을 제공한다.

커우 주임은 "시 주석의 부친 시중쉰(習仲勳)이 강조한 검소·소박한 가풍은 시 주석이 반부패를 추진한 내재적 동력이 됐고, 부패가 일당체제의 공산당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위기감은 외재적 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이어 문화대혁명 시기 지식청년으로 황토고원에 하방(下放·지식인을 노동 현장으로 보냄)된 경험은 시 주석에게 인내와 야심을 가르쳤고 중국의 미래에 대한 안목을 길러줬다는 게 커우 주임의 해설이다.

장우웨(張五岳) 대만 단장대 중국연구소 부교수는 중국의 현실에 대한 시 주석의 관찰과 이해는 지도자 수업을 받던 국가부주석 재임 시기에 이뤄졌을 것으로 봤다.

당시 후진타오(胡錦濤) 원자바오(溫家寶) 시대에 위에서는 장쩌민(江澤民)이 수렴청정했고 중간에는 저우융캉(周永康)이 '독립 왕국'을 세웠으며 아래에서는 보시라이(薄熙來)가 지방제후로 할거하던 모습을 목격했다는 것이다.

장 교수는 "중국 특유의 집단지도 체제가 다두(多頭)마차로 변질돼 각자 나름의 꿍꿍이가 있었고 총서기는 중난하이(中南海·중국 최고지도부)에서 최고지도자로서 영을 세우지 못하는 현실에 주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당정 공직사회에 만연한 부패와 사치, 미흡한 감독관리 제도가 엄청난 사회적 불만을 촉발해 공산당의 통치기반을 흔들 수 있을 것이라는 현실 인식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예비 지도자 시진핑은 권력의 집중이야말로 공산당을 구원할 길이라고 보고 공직사회 정비, 통치권력 강화를 최고의 과제로 삼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장 교수는 추정했다.

양카이황(楊開煌) 대만 밍촨(銘傳)대 양안연구센터 주임도 시 주석의 입장에서 반부패는 당과 나라를 구할 수 있는 불가결한 조치였을 것이라고 봤다.

시 주석이 추진한 반부패 투쟁과 유사한 것은 마오쩌둥이 1951년 반부패, 반낭비, 반관료주의를 주장하며 제시한 '3반(三反)운동'이다. 이는 마오쩌둥의 당내 지위와 개인 권위를 강화해주는 효과를 낳았다.

시 주석도 이에 따라 집권 후 이런 정치적 필요성과 민심의 불만을 꿰뚫고 반부패를 기치로 내걸었다.

왕치산(王岐山)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를 내세워 거세게 밀어붙인 반부패 개혁은 시 주석에게 당과 군의 주도권을 가져다줬고 그는 더욱 권력집중에 매진할 수 있었다.

아울러 자기 생각대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시 주석은 자신의 친위세력을 양성하는 데 집착했고 이런 과정에서 파격 등용도 서슴지 않았다. 이에 따라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의 청년지식인 풍조를 강하게 비판하는 한편 예상치도 못한 인재를 쉽게 발탁하기도 했다. 대표적 사례가 천민얼(陳敏爾) 충칭시 서기다. 전문대 학력에 불과했지만 수차례 발탁을 거듭해 후계자 반열까지 올려놨다.

서방 가치관에 대한 반감도 마오쩌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마오쩌둥 시기보다 더 많은 서방문화의 도전을 받는 시진핑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통해 '중국의 꿈'(中國夢)을 실현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마오쩌둥과 시진핑은 개인 성격에서는 차이가 난다. 커우 주임은 "마오쩌둥은 군중의 환호를 즐겼고 시진핑은 로키(low-key)의 태도를 보이며 다소 내성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마오쩌둥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측면에서 극좌적 태도를 보인 반면 시진핑은 정치는 좌파지만, 경제는 우파적 태도를 보인다는 점도 다소 다르다.

시 주석은 대외적으로 자유 무역주의와 경제 세계화의 수호자로 자처하며 세계 경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 중이다.

양 주임은 "시진핑이 마오쩌둥식 독재자로 변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시 주석이 다른 상무위원의 영역까지 넘보며 집단지도체제를 약화시켰지만 종국엔 권력투쟁에 빠지지 않게 최소한의 균형을 이루는 선에서 멈추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마오쩌둥 말기 중국 공산당은 극심한 권력투쟁의 혼란기에 빠져들었다가 실용주의를 내세운 덩샤오핑이 결국 당권을 잡아 당을 안정시키고 집단지도체제를 확립했다.

양 주임은 시 주석 권력집중의 최고조에 올라 있지만 정치 사회적 필요가 감소하는 포스트 시진핑 시대에도 스트롱맨에 의한 철권통치가 계속될지는 불투명하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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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중국 국가주석[AFP=연합뉴스]



joo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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