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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이벤트의 사회 / 서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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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서동진
계원예술대 융합예술학과 교수


추석 연휴를 틈타 일본 요코하마와 도쿄엘 다녀왔다. 벼르던 전시들을 한 번에 보려던 심사에서였다. 그리고 몇 개의 전시를 악착스레 보았다. 목적지는 요코하마 트리엔날레였지만 또 하나 눈여겨보고자 했던 것은 소문이 자자했던 도쿄 롯폰기의 아트 트라이앵글로 알려진 세 곳 유명 미술관이었다.

오늘날 예술이 도시 개발의 끄나풀이 되어 방문할 만한 장소로서 가치를 높이는 데 톡톡한 구실을 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세계적인 사치품 브랜드들이 즐비한 서울 청담동이 그렇고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즉 디디피(DDP)가 그렇다. 하다못해 재기를 노려보려는 세운상가도 예술을 앞세우고 버려진 산업공단들도 재개발을 위해 예술을 모신다. 땅값을 올리는 데 미술관이 한몫한다면 그 미술관은 도대체 어떻게 굴러갈까.

처음부터 그곳에 나를 눈멀게 할 어떤 대단한 미술 작품들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난한 눈동냥을 했을 뿐인 내게 처음 직접 본 서양 미술 걸작들은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문제는 그런 작품들을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이를테면 도쿄도미술관에서의 보스턴미술관 걸작 전시는 압권이었다. 그 전시는 보스턴미술관의 훌륭한 신사들, 그러니까 자신의 사재를 기꺼이 떼어내 작품을 구입하고 기증한 이들을 중심으로 전시를 조직했다. 그러니까 어떤 부르주아가 관심을 쏟고 수집했던 작품들인가를 중심으로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물론 그 기부자와 수집가의 혜안과 아량에 대한 설명을 곁들이는 것도 잊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나는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일단 그 지독한 냉소주의가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사람들의 이목을 끌 만하다면, 아무렴 어떤가.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의 손에 든 재료를 이용하여 재미난 이벤트를 만들 수 있지 않은가.

그렇게 전시는 이제 재미를 위한 이벤트가 된 전시를 자랑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작가도 작품도 미술사도 미적 가치도 가볍게 휘발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오사카의 어느 주택가에 자리한 작은 교회이면서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빛의 교회>를 재연한 국립신미술관에서의 전시에 견주면 약과였다. 미술관 뒤뜰에 여봐란듯이 재연한 빛의 교회는, 아니나 다를까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관객들은 이 걸작-구경거리를 보았다는 기쁨을 자랑하기 위해 앞다투어 휴대전화와 카메라를 꺼내 들고 사진을 찍기에 바빴다. 그러나 그 전시는 성공이었다는 성적표를 받을 것이다. 안도 다다오라는 국민적 스타를 위한 이벤트를 멀쩡하게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반세기 전 프랑스의 어느 지식인인 기 드보르는 <스펙터클의 사회>란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마르크스를 흉내 내며 이제 모든 것이 이미지가 되었다고 고발했다. 모든 것이 상품이 되었다던 마르크스의 말을 이어받아 그는 모든 것이 이제는 스펙터클이 되었다고 웅변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벤트의 사회에 접어들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상품들은 이제 몇 주년 이벤트란 이름으로 우리 곁으로 다가온다. 기억도 이벤트에 봉사하고 예술도 이벤트에 봉사하고 정치도 이벤트에 봉사한다. 어떤 이벤트를 만들어냄으로써 가짜 경험을 이겨내는 진짜 경험, 세계의 실상을 느낀다는 아이디어는 이제 그런 것을 제공해주겠다고 뻔뻔스레 말하는 이벤트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다른 세계를 만들고 경험하는 몸짓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이벤트는 이제 세상을 똑같은 것으로 만들어내는 수단이 되고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세상에서 오직 이벤트만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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