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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저마다의 남한산성에서 내려올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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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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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남한산성’이 화제다. 추석 연휴 영화를 관람하며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북한 핵 위기를 풀어나가야 하는 한반도 상황을 떠올린 건 나뿐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더욱이 몇 해 전 소설을 접했을 때보다 2017년 한반도의 현실에 가슴은 더욱 무거웠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감상평이 넘쳐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각자 영화에 대한 소감을 밝히는 것을 문제 삼기 어렵지만, 정치인들이 영화를 상대 세력을 비판하는 도구로만 활용하고 있다는 점은 불편했다. 진보ㆍ보수 할 것 없이 ‘무능한 군주의 책임’을 탓하며 각각 이명박ㆍ박근혜 정부나 문재인 정부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재단해 비판하는 행태에 입맛이 썼다. 그런 탓에 “병자호란의 시대상황을 지금 북핵 위기와 견주는 것은 호사가들의 얘기일 뿐”이라며 “외교란 무엇인가, 지도자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하도록 한다”는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입장에 대체로 동의한다.

영화와 소설이 조선왕조 500년 역사 중 가장 치욕적인 삼전도의 굴욕을 들추어 낸 것은 주화파(主和派)인 최명길이 옳았느냐 척화파(斥和派)인 김상헌이 옳았느냐를 따지기 위함이나, 병자호란 당시 주화파와 척화파가 현재 어떤 정치세력을 대변하느냐를 가리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병자호란 전후의 역사적 경로를 알고 있는 현재의 정치인들로선 당시 최명길의 선택이 옳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병자호란 당시의 상황에 처한다면 최명길의 길을 걷는 것이 쉬운 선택이었을까. 명(明)ㆍ청(淸) 교체기라는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한 채 자신만의 남한산성에 갇혀 상대 탓만 했던 조정 대신의 모습과 더 가깝지 않았을까.

한반도 긴장을 부추기는 북한의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과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간 말 폭탄이 행여라도 군사적 충돌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게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들의 책임이다. 그러기 위해선 국가 지도자와 정부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정치권의 역할이 중요하다. 정파의 입장에 매몰되지 않고 상대의 주장도 존중하면서 상대로부터 취할 것은 취하는 태도를 갖춰야 한다.

결국 영화와 소설이 말하고자 함은, “다만 봄에 씨를 뿌려 가을에 거두어 겨울에 배를 곯지 않는 세상을 바랄 뿐”이라는 영화 속 대장장이 날쇠의 대사에 함축돼 있다. 다수 국민들은 진보가 집권하든 보수가 집권하든 전쟁의 불안 없는 평온한 일상을 바라고 있다는 걸 마음 속에 새겨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유엔총회에서 국제사회에 ‘한반도 전쟁 불가론’을 호소하고, 국내에서는 안보에 관한 초당적 협력을 당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부 출범 초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배치를 둘러싸고 미중 사이의 균형 외교를 시도했고, 국제사회에 ‘한반도 운전자론’을 강조하며 지지를 호소했다.

그러나 정부의 노력과 의지에도 불구하고 북한 핵ㆍ미사일 도발이 고도화하면서 우리가 위기 타개를 주도하기 어려운 현실적 한계에 부딪혔다. 때문에 현 정부는 일부 지지층과 진보진영의 반발을 무릅쓰고 한중 간 균형보다 한미공조를 우선시하면서 전략자산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오락가락했다는 비판도 거셌지만, 정권 초의 입장을 고수하기 보다 전쟁 발발에 대한 국민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냉혹한 국제정치 현실과의 타협을 선택한 셈이다.

물론 정부의 결정 과정에 오류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최소화하고 교정하려면 정치권이 머리를 맞대 격변하는 국제정세를 분석하고 국민들을 설득해 최선의 길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머리를 맞대기 전부터 영화가 묘사한 역사를 두고 현재의 유불리만 따지는 모습에 “나는 벼슬아치를 믿지 않소”라는 날쇠의 대사가 유독 가슴을 후볐다. 혹여 안보 위기 극복을 위해 내부 단합이 필요한 시점에 일반인들의 정치 불신과 냉소로 이어져선 안 될 것이다.

김회경 정치부 기자 herm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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