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4 (수)

브렉시트 1년, 팍팍해진 영국… 물가 오르고 빚만 늘었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무디스의 평가는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것이다."

지난 22일(현지 시각) 밤 영국 재무부는 이례적으로 긴급 성명을 발표했다. 국제 신용 평가사인 무디스가 이날 영국의 신용 등급을 'Aa1'에서 'Aa2'로 한 단계 강등했다고 발표하자 한 시간도 안 돼 반박 성명을 낸 것이다.

무디스는 "영국 정부 재정이 영국 재무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약화될 수 있고,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가 경제 전반에 위기를 촉발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영국 재무부는 당황했다. 이날 낮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브렉시트 협상과 관련, 중대 발표를 했다. 영국은 이 발표를 계기로 3개월 이상 교착 상태에 빠진 EU와의 브렉시트 협상이 돌파구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했다. 발표 내용이 그동안 EU 측이 주장한 내용을 상당 폭 수용했기 때문이었다. 메이 총리가 모처럼 중대 발표를 한 날 밤에 무디스가 기습적으로 영국의 신용 등급 강등을 발표한 것이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는 "무디스 발표는 절묘한 타이밍에 나왔다"면서 "메이에게 이보다 더 큰 타격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영국이 지난해 6월 국민투표에서 EU 탈퇴를 결정한 이후 1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지만 영국 경제의 미래는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브렉시트 결정 이후 영국에선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브렉시트 이후… 파운드 폭락으로 물가 상승

최근 영국 통계청은 "지난 8월 소비자물가지수가 2.9% 올랐다"고 발표했다. 통계청은 "거의 모든 분야의 상품 가격이 올랐다"면서 "의류와 신발류는 1년 전에 비해 4.6% 올라 통계 작성 이후 최대 상승 폭을 보였다"고 말했다.

영국 물가는 올 들어 급격히 상승하고 있다. 특히 지난 몇 달간의 물가는 2012년 1분기 이후 가장 빠르게 상승하는 추세다. 영국 BBC는 "최근의 물가 상승 폭은 경제 전문가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의 물가 상승은 브렉시트 결정 이후 파운드화 가치가 크게 떨어진 데 따른 것이다. 영국은 식료품을 비롯한 각종 생필품과 공산품을 대부분 수입하기 때문에 파운드화 가치 하락은 수입 물가 상승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지난해 6월 브렉시트 국민투표 실시 전날 런던 외환시장에서 1파운드는 1.49달러에 거래됐지만, 이후 절벽에서 떨어지듯 추락하면서 올 초에는 1.20달러까지 폭락했다. 당시 경제 전문가들은 파운드화 폭락이 6개월~1년에 걸쳐 영국 물가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주장했고, 실제 그 영향이 최근 들어 본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영국 BBC는 "전문가들은 물가 상승률이 다음 달 3.1%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파운드의 대(對)달러 환율은 이달 들어 1.3달러대를 회복했지만 여전히 브렉시트 투표 이전에 비해선 크게 낮은 수준이다.

수십년 만에 최저 수준인 영국 실업률도 향후 물가 상승을 부추길 요인으로 지적된다. 일반적으로 경기가 좋아지면 실업률이 하락하고 임금이 올라 소비가 늘어나고 물가가 오르기 때문이다. 일간 파이낸셜타임스는 "지난 7월 실업률은 4.3%까지 떨어져 42년 만에 최저를 기록했다"며 "이는 중앙은행이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수준이라고 보는 4.5%보다 0.2%포인트 낮은 수준"이라고 말했다.

◇실질임금 하락으로 영국인들 빚 크게 늘어



조선비즈



하지만 물가는 고공 행진을 하는 반면 급여 수준은 '옆걸음' 양상을 보이면서 영국 시민들의 실질소득은 감소하고 있다. 영국 통계청에 따르면 영국인의 실질임금은 올 들어 마이너스(-)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임금 상승률이 물가 상승률을 웃돌았지만, 올 들어 물가가 임금보다 더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지난 2월 임금 상승률은 2%인 반면 물가 상승률이 2.3%를 기록하면서 물가가 임금보다 더 빠르게 오르는 역전 현상이 발생했고, 이후에도 이런 추세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영국 자산운용사 인베스텍의 필립 쇼 이코노미스트는 "기본적인 경제 이론과 상식에 따르면 노동력이 희소해지면 임금이 오르는 게 당연한데 이런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게 최근 영국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실질임금 하락은 서민들의 생활고와 함께 빚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 금전 문제에 대한 상담 전문 공공 기관인 '머니 어드바이스 서비스'에 따르면 현재 악성 채무로 고통받는 서민들이 83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채무 자선 단체인 '스텝체인지'는 "올 상반기 각종 세금과 전기료·수도료 등을 체납한 비율이 40%를 넘었다"고 말했다. 스텝체인지 관계자는 "평균 지방세 체납액이 지난 2013년 756파운드(약 115만7000원)에서 올해 1012파운드(약 154만8000원)로 늘었고, 전기료 체납액도 같은 기간 521파운드(약 79만7000원)에서 668파운드(102만2000원)로 확대됐다"고 말했다.

◇영란은행 "금리 올릴까 말까" 고민… 전망은 엇갈려

영란은행은 지난 17일 통화정책회의에서 정책 금리를 현 수준(0.25%)에서 동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금융권에선 이르면 올 11월 영란은행이 금리를 0.5% 수준으로 올릴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BBC와 가디언 등 영국 언론들은 "최근 급격한 인플레이션과 역대 최저 수준의 실업률 등이 잇따라 발표되면서 영란은행이 (금리 인상) 고민에 빠졌다"고 했다.

영란은행 관계자들도 금리 인상 가능성을 조금씩 흘리고 있다. 거트얀 블리게 통화위원은 지난 15일 "금리를 인상해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말했다. 브렉시트 투표 이후 가장 먼저 금리 인하를 주장했던 그는 "실업률이 기록적 수준까지 떨어졌고, 가계 지출이 계속 늘고 있으며, 민간 영역에서 급여가 오르고 있다는 점 등이 금리 인상 주장의 배경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 내용이 알려지면서 런던 외환시장에서 파운드화는 1% 이상 급등하기도 했다. BBC는 "금융시장에선 일주일 사이에 오는 11월 금리가 오를 것이란 예상이 20%에서 63%까지 상승했다"고 말했다.

반면 영국의 경제 성장세가 여전히 낮은 수준이고, 앞으로도 호전될 가능성도 크지 않아 당분간 금리 인상이 어려울 것이란 전망도 제기되고 있다. 런던의 한 금융계 소식통은 "노무라와 도이체방크 등은 11월에 기준 금리를 올릴 것으로 전망하는 반면 HSBC 등은 낮은 임금 상승률과 브렉시트 협상 교착 상태 지속 가능성 등을 들어 내년 말까지는 금리 인상이 어렵다고 본다"고 말했다. 또 다른 소식통은 "영국 경제는 한마디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이라고 했다.



런던=장일현 특파원(ihjang@chosun.com)

<저작권자 ⓒ ChosunBiz.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