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19 (금)

1만3000번 출동했다 희소병 걸린 소방관… "공무상 재해"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소뇌위축증으로 쓰러져… 퇴직 후 3년 법정싸움 끝 大法서 인정받아]

37년간 화재 진압했던 베테랑… 어지러워 못걷고 발음 잘 못해

1·2심 "업무와 연관성 증명안돼"

대법 "유해물질 탓에 뇌손상" 원심 깨고 고법으로 돌려보내

대구 금호관광호텔 화재, 디스코텍 '초원의 집' 화재, 상인동 가스 폭발사고,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유달리 대형 화재 사고가 잦았던 대구의 화재 현장에는 늘 소방공무원 이실근(62)씨가 있었다. 1977년 소방관 생활을 시작한 이씨는 2014년 퇴직할 때까지 37년 동안 1만3300차례 넘게 화재 현장에 출동했다. 이런 공로로 이씨는 녹조근정훈장을 포함해 행정안전부와 소방방재청, 대구시 등으로부터 10여개의 표창도 받았다. 그는 "지금도 눈을 감으면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던 순간이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했다.

조선일보

/박상훈 기자


대구 지하철 참사 이듬해인 2004년 이씨는 어지러워서 잘 걷지 못하거나 발음이 잘 안 되는 증상을 느껴 병원을 찾았다가 '소뇌위축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신체의 움직임과 감각을 통제하는 소뇌의 크기가 줄어드는 이 병은 발병 원인도 밝혀지지 않은 희소 질환이다. 이후 꾸준히 치료를 받았지만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고 2014년 2월 야간 당직 근무 도중 갑자기 쓰러지면서 이씨는 결국 제복을 벗게 됐다. 해병대 출신으로 100m를 12초에 달리던 그는 이제 지팡이가 없으면 아파트 앞 공원도 거닐기 힘든 처지가 됐다.

"몸이 아픈 것보다 평생을 바쳐 봉사했던 국가와 싸워야 하는 현실이 더욱 서글펐어요."

이씨는 2014년 두 차례에 걸쳐 공무원연금공단에 공무상 재해를 인정해 달라고 신청했다. 그러나 전부 퇴짜를 맞았다. 자신이 앓고 있는 희소 질환이 소방관 업무와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지를 본인이 직접 입증해야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씨는 "제가 제출할 수 있는 자료는 전부 다 냈는데도 자꾸 기각이 되니 답답한 심정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공무상 재해가 인정되면 이씨는 그동안 들었던 병원비 등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연금공단이 이씨의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1억원이 넘는 그간의 치료비와 약값 등은 고스란히 이씨의 몫으로 남았다. 그는 의료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물려받은 땅까지 팔았다. 결국 이씨는 그해 10월 공무원연금공단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1심과 2심은 연금공단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이씨의 질환이 과로나 유독 물질 노출로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의학적 자료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원마저 그를 외면하자 이씨는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이씨의 가족과 동료들은 "후배 소방관들을 위해서라도 절대 포기하지 말라"며 용기를 줬다.

법무법인 태평양도 이씨에게 손을 내밀었다. 노영보 대표변호사가 위원장으로 있는 태평양 공익활동위원회가 2심부터 무료 변론을 맡은 것이다. 의료·행정 등 분야별 전문 변호사가 나서고, 상고심에는 대법관 출신 차한성 변호사도 참여했다. 이씨는 "태평양 변호사님들이 재판 과정 하나하나를 전부 다 정리해 보내주시고 정말 노력을 많이 하셨다"고 했다.

대법원은 지난 21일 "이씨의 공무상 재해가 인정된다"며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이씨는 현장의 각종 유해 화학물질에 노출돼 있었고, 이 같은 환경적 요인은 현대 의학에서도 소뇌위축증의 원인 중 하나로 추정되고 있다"며 "이씨의 희소 질환과 소방관 업무 사이에는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했다.

이번 판결에 대해 노영보 변호사는 "이씨처럼 독가스나 고열에 장기간 노출될 경우 소뇌위축증이 발병하거나 악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 결과를 찾아내 재판부에 낸 것이 주효한 것 같다"고 했다.

이씨는 "3년 넘게 피 말리는 심정으로 국가와 싸웠는데 이제 여한이 없다"며 "이번 판결이 후배 소방관들이 질병 걱정 없이 근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했다.




[신수지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