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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T2대회 취재기] (하) ‘시간’을 도입한 탁구, 재미있어진 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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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

T2 경기의 장면은 상업광고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헤럴드경제 스포츠팀(조호르바루)=유병철 기자] 팬 감소로 고민하던 미국 메이저리그(프로야구)에서 몇 년 전 이런 얘기가 나왔다. 더 이상 야구의 라이벌은 농구나, 미식축구가 아니라고. 진정한 ‘적’은 모바일 기기 등이 쏟아내는 흥미로운 콘텐츠라는 것.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하게 되는 인기 TV시리즈 ‘워킹데드’ 한 편을 즐기는 데는 50분이면 족하다. 차를 타고 이동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야구는 적어도 2시간 30분, 길면 3시간 이상이 걸린다. 이래서는 승부가 뻔하다. 야구를 더 재미있게 즐기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특히 어린 세대들에게는 흥미로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기 스포츠인 야구가 이럴 정도이면 탁구 같은 비인기 종목은 말할 필요가 없다. 생활체육에서는 붐이 일고 있는데, 엘리트는 경기력과 행정 등에서 답보 혹은 퇴보 상태를 보이고 있는 한국에서는 더욱 그렇다.

2017년 의욕적으로 론칭돼 전 세계 탁구팬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지고 있는 'T2 아시아태평양 리그(이하 T2)‘의 4라운드(총 6경기)를 지난 20일부터 말레이시아 조호르바루 현지에서 한국 미디어로는 최초로 현지 취재했다. T2의 정신은 앞서 언급한 메이저리그의 고민과 같았다. 탁구 인구는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 메이저 인기스포츠로 발돋움하지 못하는 이유는 ’상업성‘이 떨어지기 때문. 이는 오히려 눈부시게 발전할 수 있는 기회인 까닭에 혁신적인 시도가 필요하다는 발상이었다. 그리고 아직 한 시즌도 마치지 않은 까닭에 결론을 내리기는 이르지만, 최소한 충분히 의미 있는 시도이고, 성공확률도 높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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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2 경기에서는 시간이 중요하다. 중계화면을 자세히 보면, 스코어 아래 항상 남은 시간이 표시돼 있다.


매력적인 시간탁구

종전 ITTF(국제탁구연맹)가 설정해놓은 탁구룰은 ‘시간’이 들쑥날쑥이었다. 한 경기가 빠르면 20분 이내에도 끝나지만 길면 1시간이 넘어가기도 한다. 단체전이라면 편차는 더욱 커진다. 한국이 우승한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남자 단체전은 저녁에 시작해 자정을 넘긴 것으로 유명하다. 아무리 재미있는 것도 3시간 이상 집중해서 지켜보는 것이 쉽지 않다. 할리우드 영화가 2시간 정도를 기준로 삼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탁구팬이자, 성공한 사업가인 프랭크 지 회장이 탁구의 상업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먼저 주목한 것은 '시간'이었다. 이른바 24분 룰. 한 경기(매치)는 24분에 끝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경기를 하다가 2분 이상이 남으면 정상적으로 마지막 세트(게임)에 돌입하고, 24분 종료부저가 울리면 해당 플레이가 끝남과 동시에 경기는 종료된다.

예컨대 지난 21일 수타시니 사웨타부트(태국, 팀 페르손)와 류페이(중국, 팀 JJ)의 FIXTURE 21 경기에서 흥미로운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4세트에서 수타시니가 5-4로 앞선 가운데 플레이를 하던 도중 24분 종료 부저가 울렸다. 수타시니는 그대로 경기가 종료됐다는 제스처를 취했고, 류페이가 어물어물하는 사이 플레이가 종료됐다. 세트스코어 0-3으로 지다가 한 세트를 만회했으니 수타시니는 제법 기뻐하며 대기실로 돌아갔다. 하지만 심판은 5-4에서 다시 경기를 재개하라고 지시했다. 24분 종료부저가 울려도 해당플레이는 마무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류페이가 득점을 올려 5-5 동점이 됐고, 서든데스에서 다시 류페이가 포인트를 따내며 6-5로 4세트마저 가져갔다(최종 세트스코어 4-0).

한 세트가 종료됐는데, 2분 미만의 시간이 남았을 때는 ‘킬존’이라는 5점 내기 최종세트가 진행된다. 그리고 모든 세트에는 듀스가 없다. 11점이나, 5점을 먼저 내면 된다. 여기에 땀 닦는 시간, 공 줍는 시간, 작전타임, 세트 간 브레이크 타임 등을 모두 최소화했다. 이렇게 하니 시간이 정지되는 작전 타임과 코트 맞바꿈 시간(각 1분)을 포함해도 한 경기는 30분이면 충분하다. 예측이 가능하니 방송중계 역시 편리하고, 팬들도 사전에 시간을 고려해 경기를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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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의 베르나데트 소촤는 개성 넘치는 외모로 눈길을 끌었다. 오른쪽 사진에서 왼쪽 선수가 소촤다.


영화만큼의 재미



토너먼트 방식도 흥미롭다. T2에서 승패는 중요하지 않다. 단체전의 경우, 남녀 3명씩 6명이 6단식으로 대결하는데 중요한 건 딱 하나, 획득한 세트 수다. 세트득실차도 의미가 없다. 예컨대 A팀이 70세트+에 60세트-(세트득실 10+)이고, B팀이 69세트+에 50세트-(세트득실 19+)이면, A팀의 순위가 앞선다. 개인순위도 마찬가지다. 이러니 선수들은 한 세트라도 더 하려고 불필요한 시간을 줄인다. 한 세트라도 더 해야 이길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피를 말리는 승부인 5점제 ‘킬존’도 선수들은 무조건 하는 게 낫다.

경기장소와 유니폼 등도 변화를 줬다. 장소는 방송촬영용 스튜디오. 탁구대도 경기용은 딱 하나다. 수많은 경기가 동시에 열리는 기존 탁구대회 방식과는 다르다. 선수나 팬 모두 집중해서 최고의 플레이를 펼치고, 지켜보라는 의미다. 또 최소 9대 이상의 카메라가 동원돼 선수들의 플레이를 다양한 각도에서 잡는다. 심지어 대회기간 중 틈틈이 연습장면과 인터뷰 등 흥미로운 콘텐츠를 서비스한다.

유니폼도 변화를 줬다. 기존 대회에서는 옷깃(collar)이 있는 티셔츠를 고집하지만, T2에서는 민소매나, 심지어 러닝셔츠까지 가능하다. 화려한 헤어스타일과 화장, 심지어 개성있는 문신도 장려된다. 선수들이 매력적으로 보일수록 좋다는 것이다. 팀 페르손의 베르나데트 쇠츠(루마니아)는 연예급 화장에 다리게 크게 새겨진 문신, 그리고 가슴골이 살짝 보이는 상의 등으로 눈길을 끌기도 했다. 쇠츠는 2017년 유럽선수권에서 루마니아의 여자단체 우승을 이끈 실력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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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2 대회를 만든 프랭크 지 회장(오른쪽)과 기자. T2리그는 2018년에도 열릴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T2는 계속된다



사실, 한 세트에 5점제나 7점제를 실시하고, 듀스를 없애는 등의 시도는 중국의 프로탁구리그(슈퍼리그)나, 일본에서 시도된 바 있다. 하지만 시간계측 자체를 경기에 도입한 것은 T2가 처음이다. 탁구대 1대를 놓고 집중력 높은 경기를 펼친 것도 마찬가지다. 할리우드 수준의 화려한 중계를 시도한 것은 역시 T2가 처음이다.

현지에서 만난 T2 관계자들은 방송중계 계약이 갈수록 많은 나라로 확대되고 있고, 소셜미디어를 통한 탁구팬들의 시청수가 폭발적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미 2018 T2리그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물론 세세한 문제점도 발견됐다. 먼저 한 팀에 6명이 6번의 경기를 펼치니 단체전 한 번에 3시간이 넘어가는 것에 대한 지적이 나오고 있다. 또 부상 등 부득이한 사정으로 해당 선수가 경기에 출전할 수 없을 경우, 대체선수 수급도 공정성 등에서 문제가 있다.

따라서 남녀 2명씩 한 팀에 4명을 두고, 리저브 멤버로 남녀 1명씩을 두는 경량화가 대안으로 논의된다. 고의적인 늑장플레이를 막는 방법도 다양하게 모색 중이다.

이 같은 작은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이라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T2의 자세다. T2를 통해 지속적으로 흥미로운 탁구를 시도하고, 탁구의 상업적 가치를 메이저스포츠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진정성이 빛을 발하는 것이다. 이는 지금의 한국탁구가 본받아야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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