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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文 연설서 레이건 언급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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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는 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분쟁을 평화로운 방법으로 다루는 능력을 의미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21일(현지시간)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이를 로널드 레이건 전 미 대통령의 발언이라고 소개하며 “우리는 이를 되새겨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이와 흡사한 평화의 정의는 인도의 민족운동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1869~1948), 티베트의 불교 최고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한 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레이건의 발언으로 강조한 것은 당시와 현재의 안보 상황이 묘하게 겹쳐지기 때문이란 게 외교가의 분석이다.

레이건의 해당 발언은 1982년 5월9일 그의 모교인 유레카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나왔다. 당시는 어렵게 조성된 동서 진영 간 데탕트(긴장 완화)의 열기가 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싸늘하게 식어 다시 긴장 국면이 고조될 때였다. 하지만 레이건은 유레카대학 연설에서 “소련 리더십의 세대교체를 앞둔 가운데 우리는 지금 동·서 진영 간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국면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며 평화를 꺼내 들었다. 평화란 분쟁을 평화로운 방법으로 다루는 것이라고 단언한 뒤 그는 “나는 우리(서방 세계)가 (분쟁을 평화롭게)다룰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서방 세계가 우리의 이익을 수호하고 평화를 지키기 위한 현실적이고 지속가능한 정책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레이건 전 미 대통령이 1982년 5월9일 모교인 유레카대학 졸업식에서 연설을 했다. 그는 이 연설에서 “평화는 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분쟁을 평화로운 방법으로 다루는 능력을 의미한다”며 소련에 START(전략무기감축협정) 체결을 제안하겠다고 밝혔다. [유튜브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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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은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대소련 정책의 핵심 5대 요소로 ^군사적 균형 ^경제 안보 ^역내 안정 ^무기 감축 ^대화를 들었다. 세계 핵 위협 제거의 중대한 진전을 유도한 것으로 평가받는 START(전략무기감축협정) 체결을 처음 제안한 것도 이 연설에서였다. START는 각국이 모든 미사일의 탄두 수를 일정량 이하로 제한하는 것으로, 협상이 오랜 시간 난항을 겪었지만 결국 미·소 정상 간 합의로 91년 타결됐다. START는 핵·미사일을 동결에서 감축으로 적극적 개념 전환을 해 비확산의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연설에서 레이건은 곧 소련에게 START 협상 개시를 제안할 것이라고 소개하며 “노력의 초점은 불안정적인 시스템, 미사일과 탄두, 잠재적인 모든 파괴 능력을 현저히 감소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레이건은 소련의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 제안도 했다. 그는 “소련 지도부는 공격적 정책이 서방 세계의 단호한 대응에 직면할 것이란 점을 깨달아야 한다”면서도 “반면 무력 점령 추구보다 국민 삶의 질 개선을 택하면 이에 공감하는 서방의 파트너들을 찾게 될 것이다. 서방세계는 교역 확대와 여러 형태의 협력으로 화답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이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북한을 향해 “북한이 이제라도 역사의 바른 편에 서는 결단을 내린다면 우리는 국제사회와 함께 북한을 도울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한 것과 흡사하다.

하지만 사실 레이건은 다른 한 손에 든 철의 채찍으로 전쟁과 분쟁 없이 냉전 시대의 종식을 이끌어냈다. 소련을 비롯한 적국의 핵·미사일 요격을 목표로 해 ‘스타 워즈’(별들의 전쟁)로 불렸던 전략방위구상(SDI) 계획 입안 등 레이건 행정부의 공격적 군비 경쟁이 결국 소련의 몰락을 촉발했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내세우는 ‘힘을 통한 평화’도 사실 레이건이 주창한 개념이다. 이는 대화에 방점을 찍는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 역시 강한 압박과 제재가 뒷받침돼야 성공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적 실례이기도 하다.

유레카대 연설에서 레이건은 소련에 손을 내밀면서도 이런 단서를 달았다. “하지만 모든 것은 소련의 행동에 달려 있다. 2000년 전 아테네 광장에서 데모스테네스(기원 전 384~322, 반마케도니아 운동의 선두에 섰던 고대 그리스의 웅변가이자 정치가)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당신에게 전쟁을 선언하거나 평화 유지를 선언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어떤 정상적인 사람이 행동이 아닌 말만 갖고 그렇게 하도록 두겠는가.’”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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