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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나의 우울에 입맞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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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박조건형의 일상 드로잉] ② 함께 걸어줄 사람

이불 속에 숨어야 하는
모든 이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걱정 마시라, 나도 이불 속이다
이불 속에서, 당신에게
이렇게 말을 건네고 있다


한겨레

무기력의 늪, 2017.8, 펜·마카,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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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마흔한살인 지금까지 우울증 때문에 힘든 시간이 많았다. 나를 설명하려면 우울증을 빼놓고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다소 무겁긴 하겠지만,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본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중매로 만났다. 어머니는 외할머니 밑에서 혼자 컸고, 아버지는 형제가 많은 집안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 아버지는 원양어선 선장이셨다. 어머니는 중매로 몇번 만나면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그 당시의 정서였다. 아버지는 몇달에 한번씩 집에 와서 1~2주 정도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식이라,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나 애틋함은 별로 없다. 아버지는 배를 타다가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그만두고 부산 번화가에 탁구장을 차리셨다. 배만 타다 보니 세상 물정에 어두워 그랬을까, 그럴싸한 논리에 홀렸던 걸까. 아버지는 느닷없이 대순진리회에 입도하셨다. 종교에 광적으로 매달리다 집안을 ‘말아먹은’ 이야기는 주변에서도 종종 듣곤 하는데, 어쩌면 우리 집도 그런 경우였다. 관련 단체 사람들이나 아버지는 어머니의 직장인 학교까지 찾아가서 어머니를 괴롭혔고, 할머니는 쌀까지 가져가려는 사람들을 욕지거리로 대응하셨다.

가장 역할을 해야 했던 어머니는 아버지를 거의 강제로 정신병원에 1년여 동안 가두기도 했다. 급기야 우리가 살던 집의 집문서마저 몰래 빼앗기기도 했다. 어머니가 겨우 전세금을 마련해 이사를 가게 된 것은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최근까지도 내 우울증의 시작은 바로 그때, 그러니까 중학교 2학년 때였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한겨레

양산정신과 병원, 2017.8, 펜·색연필,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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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개인 상담을 받으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나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제대로 된 애정과 돌봄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는 것. 두 분 다 살아 계셨으나, 아버지는 원양어선을 타느라 늘 부재했고, 어머니는 ‘쟤도 나처럼 혼자 알아서 하겠지’ 하며 어린 나를 방치해 두셨다. 외할아버지는 어머니가 한살 때 보도연맹 사건으로 돌아가셨다는 걸 최근에야 들었고, 외할머니의 시아버지는 객사했다고 들었다. 그러니 어머니의 집안은 애초부터 서로의 관심 속에 관계를 쌓아가는 법을 배워오지 못한 가계였던 셈이다.

이사를 한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나는 내성적인 아이가 되었다. 대순진리회 관련 단체 사람들이나 아버지가 집에 오면 온 집안이 살얼음판이 되었다. 엄마와 동생은 각자의 방으로 도망가 버리고 할머니는 근처 삼촌 댁으로 올라가셨다. 학교를 다녀오면, 나는 혼자 있을 수 있는 만화방에 가거나 내 방에 누워 숨어 있었다.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애정과 배움을 받지 못했다 보니, 사소한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나는 언제나 무얼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몰라 숨고만 싶었다. 학창 시절에도 친구들과 어울리고 시간을 보내고 추억을 만드는 경험을 하지 못했다. 관계에서 문제를 자주 느끼거나 조금만 힘든 일에도 어쩔 줄을 몰라하며 늘 우울증과 무기력으로 방에 숨곤 했다. 그런 내 모습은, 마흔하나가 된 지금까지 반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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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4, 2017.8, 펜,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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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도 스무살에 일반 학과에 한번, 그리고 스물두살에 만화예술학과에 다시 들어가긴 했다. 두곳 모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고 결국 졸업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늘 만화예술학과에 다녔던 사실을 숨기곤 했다. 열심히 그림을 그리지도 못했고, 수업 과제도 따라가지 못했으며, 대부분 자취방에 숨어서 무기력하게 지내며 복학과 휴학을 반복했으니까. 다행히 군대는 무사히 제대했지만, 군대에 있던 시절 자해를 한 적도 있다. 우울증에 빠져 있을 땐 정말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형편없게만 느껴졌다.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개인 상담도 여러 차례 받았고, 6년8개월 다닌 회사에서도 우울증 때문에 힘들 때가 많았다. 살아가는 것에 대해 자신도 없었고, 결혼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내가 과연 몇살까지 살 수 있을까, 그 생각뿐이었다. 다행히 마흔한살이 된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고, 이제는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고 잘 버텨온 나 자신을 언제나 칭찬하게 되었다.

무얼 하든 쉽게 포기하고 약간의 힘듦도 견디지 못했던 내게, 그래서 무언가를 꾸준히 한다는 건 큰 의미였다. 포기하지 않고 6년8개월이나 다닌 최근의 직장도 내겐 각별한 의미였다.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일상 드로잉 작업을 계속해보겠다는 마음도 역시 나에겐 큰 각오이다.

한겨레

우울증 약, 2017.8, 펜·마카,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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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을 ‘감기’라고 말하는 것에, 나는 반대한다. 사람의 삶이 사소하지 않듯이, 누군가의 삶과 평생 함께해야 할 상처를 가볍게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울하다’와 ‘우울증’은 분명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린 너무 쉽게 타인의 우울을 가볍게 치부해 버린다. ‘당신의 힘겨움이 가벼워지기를 바란다’는 선의라면, 더욱 조심스럽고 배려하는 태도여야 하지 않을까. 트라우마 때문이든 학습된 것이든, 우울이나 무기력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진짜 사람이 필요하다.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걸어줄 사람 말이다. 이불 속에 숨어야 하는 모든 이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걱정 마시라, 나도 이불 속이다. 이불 속에서, 당신에게 이렇게 말을 건네고 있다.

박조건형

생산직 노동자로 10여년 일하다가 2017년에 회사를 그만두고 드로잉 수업을 병행하며 일상드로잉 작가로 살기로 결심했다. 할아버지가 되 때까지 일상드로잉을 하면서 사는 게 목표이며, 어떤 모습이든 자신의 삶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는 일상드로잉 인구가 점점 늘어나기를 바란다. 양산에서 소설 쓰는 아내와 일상의 작은 즐거움을 발견하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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