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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기타뉴스]'디스코팡팡'이 뛰는 섬, 월미도의 9월이 슬픈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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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를 아시나요? 청춘들이 즐겨찾는 유원지로 유명한 바로 그 섬입니다. 탑승객들을 사정없이 허공으로 튕기는 ‘디스코팡팡’이란 놀이기구로도 유명합니다. 서울에서 당일치기로 다녀올 정도로 가깝고, 지금은 육지와 다리로 연결돼 더 이상 섬은 아니지만 여전히 섬 특유의 풍광을 지닌 곳입니다.

그런데, 월미도의 9월에 아픈 기억이 있다는 것도 아시나요? 지금은 월미도에 살지 ‘못’하는 과거 원주민들은 매년 9월 10~15일 사이 하루를 정해 위령제를 지냅니다. 1950년 9월, 한국전쟁에서 미군 폭격으로 사망한 이웃들을 추모하는 의식입니다. 남한을 원조하러 온 미군이 왜 남한사람, 그것도 민간인들에게 폭탄을 퍼부었을까요.

월미도 근현대사를 다룬 책 <그 섬이 들려준 평화 이야기>(부제: 작은 섬 월미도가 겪은 큰 전쟁들) 저자 강변구씨는 “이런 비극이 왜 일어났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의 근현대사 전반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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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가 오늘날처럼 사람들에게 유원지로 각인된 때는 일제강점기입니다. 1923년 일본인 소유 ‘월미도유원주식회사’가 월미도에 해수욕장, 호텔, 별장, 유흥주점, 캠핑장, 조탕(바닷물을 끓여 쓰는 목욕시설) 등을 세우며 본격 유원지 개발에 나섰습니다.

위 그림은 당시 만든 관광용 입체지도입니다. 아래 쪽에 파랗게 채색된 언덕이 있는 섬이 월미도입니다. 일본인들이 다니는 학교(임해학교)와 신사(아고타 신사)도 월미산 인근에 자리했습니다. 이 때부터 이미 월미도엔 일본에서 가져온 벚나무가 가득해 절경을 이뤘다고 전해집니다. 강변구씨는 이런 월미도의 당대 풍경을 ‘식민지 인공낙원’이라고 표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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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지로 변모한 일제 치하 월미도에도 원주민 마을이 있었습니다. 일제 당국 명령에 따라 몇차례 이주하긴 했지만 주민들은 고기잡이와 농사로 삶의 터전을 일구고 살았습니다. 19세기 중반부터 프랑스, 미국, 영국, 러시아, 이탈리아 등 제국주의 열강 함대의 쟁탈전이 월미도 주변에서 치열한 와중에도 주민들은 섬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950년 9월 이후로 월미도는 아무도 살지 않는 섬이 됐습니다. 미군 폭격으로 주민 상당수가 숨졌고, 다행히 목숨을 부지한 주민들은 갯벌을 건너 인천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그날 월미도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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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에서 인민군에 밀려 3개월 만에 낙동강까지 후퇴한 국군. 미군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전세를 뒤집을 한 수를 도모합니다. 바로 ‘인천상륙작전’입니다. 미군은 인천 앞바다에 관문처럼 돌출된 월미도 장악이 상륙작전 성패를 가른다고 봤습니다. 미군은 월미도에 주둔한 인민군부터 무력화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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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10일, 아침부터 비행기 소리가 월미도를 감쌌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저기에서 폭발음이 들렸고 시커먼 연기가 해변을 뒤덮었습니다. 당시 18살이었던 원주민 이범기 할아버지는 그날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그날따라 비행기가 많이 뜨기 시작하더라고. 한 너덧 대가 월미도 상공을 척 지나가더니, 저쪽 영종도, 작약도에서 방향을 틀어가지고서 내리꽂히는 거지.”

내리꽂힌 건 ‘네이팜탄’이었습니다. 네이팜탄은 화염방사기에 사용하는 연료를 충천해 만든, 강력한 불길을 형성해 목표물을 불태워 없애도록 고안된 폭탄입니다.

5시간 가량 계속된 폭격 끝에 잿더미가 된 마을 곳곳엔 시신이 널렸습니다. 120가구 600여명이 살던 마을은 초토화됐고, 이튿날인 12일 다시 폭격이 시작되자 주민들은 마을을 떠났습니다. 월미도의 원주민 마을은 그렇게 지도상에서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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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군은 왜 인민군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은 무차별 폭격을 퍼부었을까요? 미군이 잘못된 정보를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월미도엔 인민군이 400명, 원주민이 600명 있었는데, 미군 상부에 이것이 ‘인민군 1000명’으로 잘못 보고된 것으로 훗날 밝혀졌습니다. 가족과 이웃, 삶터를 한꺼번에 잃은 원주민들에겐 통탄할 일입니다. 하지만 미군·유엔군이 성공적으로 인천에 상륙해 서울을 수복했고, 월미도의 비극은 전쟁통 속 흔한 희생 정도로 잊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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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월미도 원주민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휴전하자 미군이 주둔했고, 미군이 떠나자 다시 해군이 들어왔습니다. 1989년 ‘월미 문화의 거리’가 생겨 관광객들이 드나들기 시작했지만, 국가는 원주민이 살 땅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원주민들이 원래 갖고 있던 땅의 소유권이 모호해졌습니다. 결국 원주민들은 1997년 ‘월미도 귀향대책위원회’를 꾸려 국가를 상대로 지리한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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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2008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가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 진실규명을 결정했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원주민 귀향과 위령사업, 명예회복 조치 등을 정부에 권고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10년이 지나도록 원주민들의 상황은 크게 달라진 게 없습니다. 원주민들은 여전히 귀향을 꿈꿉니다. 지난 10일에도 원주민들은 미국 폭격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제를 지냈습니다. (▶기호일보: 인천상륙작전 ‘월미도 희생자’ 위령제)

인천을 거쳐 서울로 향하는 뱃길목에 있어 외세의 침략을 끊임없이 받아내야 했던 작은 섬. 유원지에서 미군 주둔지로, 다시 유원지로 바뀌는 굴곡진 근현대사를 지닌 섬. 월미도에서 시작된 인천상륙작전은 ‘자유 대한민국’을 지켜냈지만, 월미도 원주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자유를 박탈당했습니다. 5년 동안 원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은 강변구씨는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경향신문

<그 섬이 들려준 평화 이야기>

강변구 지음

서해문집


<허남설 기자 nshe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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