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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탈원전’의 길 찾기](7)관료·발전업계의 시민 배제한 ‘전력 독재’ 이젠 끝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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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결정 투명하게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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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3년 전인 2015년 6월18일 옛 한국전력 본사 강당 앞. 보안업체 직원들이 강당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 앞을 가로막았다. ‘입장권’ 검사가 있었다. 가방을 일일이 열어 확인하는 절차도 있었다. 입장권이 없는 이들의 항의가 이어지며 강당 앞은 시끄러웠다. 주최 측은 강당의 수용인원 한계 때문에 입장권을 ‘선택적으로’ 배부했다고 했다. 그러나 막상 행사장 안에 들어서니 빈 의자가 많았다. 하승수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가 기억하는 당시 산업통상자원부의 ‘7차 전력수급기본계획’ 공청회 풍경이다.

전력수급기본계획은 향후 15년간 국내에 전기가 얼마나 필요한지, 어떻게 충당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이다. 2년마다 수정되는 이 계획엔 발전소를 어디에, 얼마나 더 지을지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당시 산업부는 공청회 참석 신청을 받은 후 일부를 ‘선정’해 입장권을 배포했다. 공고엔 “전력관련업계, 유관단체·협회 대표자 (입장권) 우선 배분” 원칙까지 노골적으로 명시했다. 당시 산업부는 7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통해 강원도 삼척이나 경북 영덕에 원자력발전소 2기를 짓겠다고 한 터였다. 그러나 정작 삼척·영덕 주민 상당수는 이날 공청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심지어 전력수급기본계획의 구체적인 안도 공개되지 않은 채 공청회가 열렸다.

정보의 투명한 공개와 시민에 의한 감시, 시민·지역주민들의 의견 수렴이라는 민주주의 절차는 그동안 전력정책에서만큼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 대표는 “이것이 당시 에너지 민주주의의 현실이었다”고 개탄했다.

정부의 전력수급기본계획 등 전력정책은 민간 위원이 포함된 전기위원회, 전력정책심의위원회를 거치게 돼 있다. 그러나 이들 위원회에선 늘 산업부의 뜻이 관철됐을 뿐 제동이 걸리는 경우는 없었다. 관료들이 주무르는 전력정책을 두고 “전력 독재”라는 비판도 심심찮게 터져나오는 이유다.

민주주의의 가치와 원칙이 사라진 자리에 똬리를 튼 것은 ‘돈’이었다. 발전소는 건설업계의 ‘돈잔치’에 가깝다. ‘동양파워’라는 기업은 2013년 6차 전력수급계획을 통해 200만㎾급 삼척 화력발전소 건설 민간사업자가 됐다. 이후 대기업들이 동양파워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260억원짜리 공터를 가지고 있는 것에 불과했던 이 회사는 포스코에너지에 약 4300억원에 팔렸다. 이 기업이 현재 삼척에서 화력발전소 건설을 추진 중인 ‘포스파워’다. 이렇게 전력수급계획에만 오르면 거액을 버는 건 쉬운 일이다. 당연히 관료들에 대한 로비와 이에 따른 부적절한 사업자 선정 의혹이 제기됐다. 국회의 요청에 따라 감사원이 2014년 ‘발전사업자 선정실태’ 감사를 했더니 사업자 평가과정은 허술했다. 당일 선정된 평가위원들은 25분간의 질의·응답 시간만 갖고 점수를 매겼다. 평가위원들의 의견서엔 평가등급의 근거를 기재하는 난조차 없었다.

발전소를 많이 지어 전력 공급규모가 커질수록 건설사들은 더 많은 돈을 번다. 전력에서만큼은 유독 수요에 따라 공급이 창출되는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급과잉’ 덕분에 기업들은 마구 전력을 사용하는 데 길들여졌다. 지난 7월 한국을 방문했던 제니퍼 리 모건 그린피스 국제본부 공동사무총장은 “한국의 에너지 소비가 너무 비효율적이어서 놀랐다”고 했을 정도다. 그린피스에 따르면 한국의 ‘전력 다소비’ 10대 기업은 국내 모든 가구의 전력소비량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전력을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기업들이 전력이 펑펑 쓰는데도 올해 전력소비 규모가 가장 컸던 7월21일(84.59GW)조차 발전설비 가운데 34%는 가동되지 않았다. 그간 정부의 전력수급 계획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선진국들은 전력정책의 절차적 민주주의 면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박진희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소장은 “지난해 확인해 보니, 독일의 마덴뷔텐베르그주, 슐레스비히홀스타인주 등에서는 지역주민, 시민사회와 함께 주정부의 에너지 계획을 공동으로 수립해 나가고 있었다”고 전했다. 독일은 이미 2011년 ‘안전한 에너지 공급을 위한 윤리위원회의’를 통해 국가 차원에서 탈원전에 대한 공론화 과정을 거친 상태다. 당시 독일은 2022년까지 원전을 모두 없애기로 했다. 그 후에도 ‘에너지 민주주의’가 각 지역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 외에도 지역주민, 시민들의 문제 제기에 따라 원전이나 대규모 송전선로가 좌절된 사례는 여럿 있다. 1972년 착공한 오스트리아 츠벤텐도르프 원전은 6년 후 지역주민 투표에서 관련 법안에 반대 의견이 많이 나와 결국 가동되지 못했다. 1972년 미국 뉴욕주의 쇼어햄 원전은 1984년 상업운전키로 했지만 지역의회에서 ‘원전 사고 시 주민 전원이 안전하게 피난할 수 없다’고 제동을 걸어 운전이 무산됐다. 미국 오하이오주에서는 버지니아·메릴랜드 주 등을 통과하는 76만5000v 고압 송전선로 건설이 추진됐지만 시민들의 문제제기가 이어지자 2009년 공공사업규제위원회가 청문회를 열어 전문가 등의 증언을 듣고 이 사업을 불허했다.

<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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