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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가고 싶어요”… 韓中 경계인의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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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허봉식ㆍ김균 두 개

녹록지 않았던 한국 생활

중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한국일보

검게 그을린 피부, 잔뜩 해진 옷가지, 짙은 땀냄새까지. 13일 오전 서울역 다시서기희망지원센터에서 만난 노숙인 김균(64)씨는 “요 며칠 구토가 심해 식사를 못했다”고 힘겹게 입을 뗐다. “이제 중국으로 가고 싶어요. 다시 허봉식으로 살게 해주세요.”

김씨 이름은 두 개다. 고향인 중국 지린(吉林)성에서 불린 ‘허봉식’과 20년 전 한국에 입국하며 생긴 ‘김균.’ 중국에서 목재가공회사를 다닌 그는 1997년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새 일자리가 필요했다. “한국에 가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얘기가 돌았고, 가족을 먹여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한국행을 결심했다. “조금만 고생하면 금방 고향에 돌아올 수 있다”는 맹세로 아내(당시 40)와 딸(당시 10) 아들(당시 5)을 안심시켰다. 먼저 한국에 가 있던 재중동포 지인의 친척 이름 ‘김균’을 넣어 만든 위명(僞名) 여권으로 초청비자를 받았다. 김균의 삶을 그렇게 시작했다.

한국 생활은 녹록하지 않았다. 특별한 기술이 없었던 그는 공사장을 전전하며 일용직 노동자로 살았다. 일을 마친 그를 반겨주는 건 반지하 단칸방, 적막함과 곰팡이 냄새뿐이었다. 한 달에 120만원을 벌어 90만원을 고향으로 송금했다. 사는 게 빠듯했지만 가족에게서 간간이 전해오는 “고마워요” “우린 잘 있어요” 안부가 낙이었다.

한국에 온 지 3년째 되던 어느 날. 그는 서울 강동구 한 공사장 2층에서 추락해 두개골 일부가 함몰되는 부상을 입었다. 보험금이나 보상금은 한 푼도 주어지지 않았다. 병원비만 300만원, 열 달 생활비였다. 사고후유증은 심각했다. 이유 없이 손이 떨렸고 두통이 시시때때로 찾아왔다. 제대로 서 있기조차 어려운 상황에서 일은 언감생심. 노숙 생활이 시작됐다.

이후 17년을 거리에서 살았다. 지금은 식사를 하는 것도, 옷을 갈아입는 것도, 말 한 마디 하는 것도 어려울 정도로 몸이 망가졌다. 얼마 전에는 길거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다. 1년 전 휴대폰을 도둑맞은 뒤로는 가족과 연락도 끊겼다. 후유증 탓에 기억이 가물가물해 전화번호도 떠오르지 않는다. 고향 집 주소도 모른다. 겨우 자신과 가족 이름, 생년월일 정도만 머리에 담겨있다.

경찰이 나섰다. 딱한 사정을 접한 서울의 한 경찰서에서 귀향을 적극 돕기로 했다. 이 역시 순조롭지 않았다. 13일 김씨와 찾은 주한중국대사관에서는 “중국인이라는 게 증명되지 않는다”며 “신원 확인이 안 된 상태라 (중국 입국이 가능한) 여행증명서를 발급할 수 없다”고 했다. 20년 전 입국 당시 출입국 기록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이를 위해서는 ‘김균’의 여권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그는 여권을 부지불식간에 분실했고, 본래 이름 ‘허봉식’의 중국 신분증 번호도 잃어버렸다.

지금 그는 중국인도 한국인도 아니다. 여권이 없어 외국인 보호시설(법무부 외국인보호소)을 이용할 수 없다. 한국인도 아니라 한국인 보호시설(노숙자 임시쉼터)에 갈 수도 없다. 서울시 다시서기희망지원센터에서 “두 달간 25만원씩 주거비를 지원해주겠다”고 해 급한 불은 껐지만 임시 조치일 뿐. 신원 확인이 늦어지면 김씨는 다시 거리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중국대사관에서 그의 신원 확인 절차가 진행 중이지만 언제 답을 줄지 기약할 수 없다. 김씨는 북받치는 감정을 꾹꾹 눌러가며 물었다.

“제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글·사진=홍인택 기자 heute128@hankookilbo.com
한국일보

17년을 노숙인으로 지낸 김균씨의 잔뜩 해진 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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