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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소년중앙] 580년 전 세종실록 속 객성이 알려준 신성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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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천체 사진작가인 후지이 아키라가 촬영한 전갈자리 모습. 1437년 세종실록에 기록된 신성 현상은 이 별 자리의 꼬리 부분에서 발생했다. [사진=Akira Fuj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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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8월 31일, 미국 자연사박물관·영국 리버풀존무어대·폴란드과학아카데미 등이 참여한 국제 천문 연구진이 새롭게 관측한 별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사용된 자료가 특이합니다. 천문학 연구에 주로 쓰이는 망원경과 슈퍼컴퓨터가 아니라 역사서를 바탕으로 한 겁니다. 바로 세종(1418~1450)시대 31년 7개월의 역사가 담긴 '세종실록'입니다.

작년 6월 연구진은 전갈자리에 있는 한 별을 둘러싼 가스 구름을 관측했습니다. 이 가스 구름은 원래 하나의 별이었죠. 별이라 하면 딱딱한 암석을 연상하지만, 사실 수소·헬륨 등의 가스로 채워져 있어요. 별을 이루는 가스는 한 점을 중심으로 뭉치며 물리·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는데, 이때 방출되는 빛이 우리가 눈으로 보는 별빛입니다. 천문학에서는 태양처럼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을 별이라고 하죠. 시간이 지나 반응을 일으키는 가스가 다 사라지고 나면 별의 중심에 헬륨·탄소 등 무거운 물질들만 남아요. 이러한 상태의 별을 '백색 왜성(white dwarf)'이라 부르죠. 크기가 작고 청백색 빛을 내기 때문이에요. 연구진이 관찰한 가스 구름은 한 백색왜성의 짝궁인 '짝별'이에요. 짝별이란 서로 짝을 이루고 있는 둘 이상의 별을 말하죠. 하늘의 별 중엔 홀로 있는 별 외에 이렇게 짝을 이루고 있는 별이 절반 정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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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6월 칠레의 라스 캄파나스 천문대에서 촬영된 전갈자리 성운 이미지. 신성 현상으로 생긴 별의 파편이 픝어지고 있는 모습이 담겼다. [사진=K. Ilkiewicz and J. Mikolajews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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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진의 발표 내용에는 '신성(新星·nova) 현상'에 관한 것도 나옵니다. 가스 구름 별과 짝별 관계인 백색왜성이 가스 구름 별의 수소 가스를 끌어들여 폭발을 일으키는 것을 말해요. 세종실록이 힌트가 된 것은 이 부분입니다. 세종실록 76권에는 "객성이 처음에 미성의 둘째 별과 셋째 별 사이에 나타났는데, 셋째 별에 가깝기가 반 자 간격쯤 되었다. 무릇 14일 동안이나 나타났다(세종 19년, 1437년)"는 구절이 등장해요. 객성(客星·일시적으로 나타나는 별, 폭발 등으로 매우 밝게 빛나는 별을 포함)이 관측될 수 있었던 것은 신성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이죠. 즉, 현대 천문학자들은 실록 덕분에 새롭게 찾은 별에 600년 전 어떤 일이 벌어졌는 지 알아낸 겁니다. 실제로 연구진은 별이 움직인 방향과 속도를 계산해 세종실록에 기술된 별과 자신들이 찾은 별이 동일한 것임을 확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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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NASA에서 촬영한 전갈자리 이미지. 국제 연구진은 미국 하버드대의 천문 관측 기록을 통해 1934년, 1935년, 1942년에도 이 별자리에서 작은 신성 현상이 일어났음을 확인했다. [사진=N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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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역사서는 과거 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밝혀내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한국천문연구원에서 고천문학을 연구하는 양홍진 박사는 이러한 역사서를 '또 다른 망원경'이라 정의했죠. "저 먼 우주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알아내기 위해 인류는 '더 큰 망원경'을 제작해왔어요. 하지만 큰 망원경도 쉽게 보지 못하는 게 있어요. 바로 '별의 과거'죠. 신성 현상을 생각해봅시다. 망원경과 컴퓨터로 별과 별이 폭발하며 생긴 잔해물 사이의 거리를 잰 후 계산하면 폭발이 언제 발생했는지 유추할 수 있습니다. 확신할 수는 없죠. 별이 내부에 얼마 만큼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폭발의 위력이 달라지거든요. 별 주변 물질들의 밀도도 영향을 끼쳐요. 1기압의 공기가 내리누르는 지표면과 공기가 거의 없는 공중에서 동시에 풍선이 터졌을 때 풍선 잔해물이 공중에서 훨씬 멀리 날아가는 것처럼 말이죠. 이처럼 별의 폭발에는 여러 변수가 작용해요. 컴퓨터로 폭발 시기를 계산해도 그것이 추측일 뿐인 이유가 여깄죠. 하지만 실록과 같은 사료는 이번 연구에서처럼 사건의 시점을 정확하게 제시합니다. 사료가 커다란 망원경도 보지 못한 것을 발견한 거죠."

양 박사와 같은 고천문학자에게 실록 같은 우리나라 역사서들은 특히 중요한 자료라고 합니다.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하늘에서 벌어진 사건의 발생 시각과 그때 관측된 별의 밝기까지 세세히 기록한 것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자료가 유일하기 때문"이라는 게 양 박사의 설명입니다. 뿐만 아니라 옛부터 전해져 오는 이런 기록은 수천만 년 이상을 주기로 하는 별의 일생을 추적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줍니다. 양 박사는 2005년 고려사 자료를 통해 '물병자리 R-변광성'이란 별의 탄생 시기를 규명했습니다.

글=이연경 기자 lee.yeongy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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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A에서 1901년 촬영한 신성 현상. 'GK Persei'란 이름의 이 폭발은 1980년 이후 3년에 한 번꼴로 발생하고 있다. [사진=N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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