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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ESC] 받을 때까지 전화 수십통…“데이트폭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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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5년간 데이트폭력으로 233명 사망

데이트폭력범의 특징은

강한 성별 고정관념·가부장 성향

“차별·폭력에 대한 감수성 높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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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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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그저 ‘다혈질’이려니 했다. 운전대만 잡으면 욕을 하는 남자였고, ‘콘돔 없는 섹스’에 충동적인 남자였다. 하루에 스무 통씩 전화를 걸어왔지만, 밥은 잘 먹었는지 집에는 잘 들어갔는지 ‘챙겨주는’ 전화였기에 핀잔을 주긴 힘들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양소희(28·가명·기업체 연구원)씨는 그 남자의 잦은 전화에 고마움을 느꼈다고 했다. 양씨는 그 남자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고 궁금해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절절하기까지 한 그의 고백은 수시로 이어졌다. “난 너밖에 없어, 너 아니면 안 돼.”

최초의 사건은 만난 지 1년도 되기 전에 일어났다. 회식 중이던 양씨는 전화가 방전된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전원을 켜기가 무섭게 ‘××년’이라는 욕설과 함께 양씨의 변심을 의심하는 폭언이 날아왔다. 관심이 집착으로, 애정이 폭력으로 변한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날 밤, 그는 실랑이 끝에 양씨를 밀치더니 멱살을 움켜쥐었고, 몇 주 뒤엔 양씨의 머리를 치고 뺨을 때렸다. 급기야 ‘미친 사람’ 같은 눈빛을 하고 찾아온 날에는 도망치는 양씨를 붙잡아 발길질까지 해대며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양씨의 신고로 그는 벌금 1백만원 형을 받았다. 전치 3주가 나왔지만 초범이라는 이유로, 데이트폭력 관련 법안도 아직 없고 가정폭력 범죄 처벌 특례법의 대상이 아니어서 단순폭행죄 처벌만 받았다. 양씨의 남자친구는 겉으로 보기엔 버젓한 직장인이었다. 지금도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직장에 여전히 다니고 있다.

지난 19일 서울 이촌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양씨는 “얼핏 보기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다”며 “오히려 자상하고 신사라고 보는 시선이 많았다”고 말했다. “괜찮은 직장에 멀끔한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어요. 근육이 있는 체격이었는데, 매력으로 느껴지던 신체조건이 폭력의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야 알았죠.” 일방적인 사과와 협박을 반복하던 가해자는 가까스로 “떨어져나갔으나”, 그로부터 2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피해자로서의 경험은 양씨에게 끔찍한 영향을 미친 것처럼 보였다. “글쎄요, 제 인생에 두 번 다시 연애라는 게 있을지 모르겠네요.”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 5년간 데이트폭력으로 사망한 사람은 233명에 이른다. 한때는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던 친밀한 파트너의 손에 매년 46명 정도가 살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형사정책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성인남성 10명 가운데 8명 꼴로 연인에게 폭력적인 행동을 해본 적이 있다고 한다. 형사정책연구원의 논문 ‘성인의 데이트폭력 가해요인’에 교제하는 여성에게 폭력적인 행동을 한 번이라도 해본 적이 있는 남성이 2000명 중에 1593명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때 ‘폭력적인 행동’이란 상해나 성추행, 욕설 같은 신체적·심리적 학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옷차림을 제한한다거나 누구랑 있는지를 감시하는 ‘행동통제’도 폭력의 일종이다. 그러니까 뉴스에 보도되는 ‘트럭 돌진’, ‘염산 보복’, ‘감금 폭행’, ‘흉기 위협’, ‘뇌사 판정 후 사망’ 같은 무시무시한 수식어가 따라붙어야만 데이트폭력이 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너무 신경질이 나서 방문을 세게 닫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으냐고?” “따귀쯤은 예사로 때리는 드라마 장면이 부지기순데, 물건 던지기쯤은 해도 되지 않느냐고?”라고 가해자들은 말할지도 모른다. 아니다. 하지 마시라. 안 괜찮다.

어쩌면 당신이 평소에 자주 하는 행동, 그게 바로 데이트폭력인지도 모른다. 그건 결코 사랑싸움이 아니다. <왜 그들은 우리를 파괴하는가>의 저자인 박미랑 한남대 행정·경찰학부 교수는 “최근 데이트 살인, 이별 살인, 살해 협박 정도는 돼야 데이트폭력이라고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상당히 우려스러운 부분”이라며 “한국처럼 적극적으로 대시하거나 집착하는 걸 사랑이라 잘못 인식해온 사회에서는 데이트폭력에 시달리는 당사자들조차 그 상황의 폭력성을 인지하지 못할 때가 많다”고 설명했다.

다른 범죄도 마찬가지겠지만, 데이트폭력에서 무엇보다 곤란한 점은 ‘가해자가 될 것 같은 사람’을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사기꾼이 사기꾼이라고 얼굴에 써 붙이고 다니나? 그럴 리 없다. 데이트폭력 가해자라고 해서 극악무도한 얼굴을 하고 있겠나? 당연히 아니다. 양씨의 그 남자도 멀쩡해 보였다. 그럼에도 가해자들의 공통점, 징후나 전조, 그런 것들은 없을까. 혹시나 있다면, 속는 셈 치고 파악해두면 어떨까.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봤다. 데이트폭력 가해자의 ‘충분조건’은 아닐지언정 ‘필요조건’을 정리해보니 다음과 같았다. △데이트폭력 가해자들은 성별 고정관념이나 가부장적인 성향이 강하다. △정서적 공감능력이 부족하고, 권력자에게 과도한 충성을 하는 경우가 많다. △좌절을 잘 견디지 못하고, 지나치게 위험을 추구하거나 충동성이 강한 특성을 지닌다. 즉, 자아 통제력과 자존감은 낮고, 자존심은 센 편이다. △전화하는 횟수가 지나치게 많고, 휴대전화 메시지나 통화 내역을 살펴보려 하거나 상대방의 옷차림을 자기 취향에 맞게 단속하려는 태도를 지니면 경계심을 갖고 관찰해야 한다.

한국여성의전화 송란희 사무처장은 “데이트폭력은 친밀한 사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므로 가해자들의 특성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매우 어렵다”면서도 “데이트폭력 가해자는 가정폭력 가해자와 마찬가지로 성별 고정관념이 강하고, 자존감이 낮으며, 폭력에 허용적인 태도를 지닌다”고 밝혔다. 다시 말해, “‘남자는 이래야 하고, 여자는 저래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고, ‘맞을 만한 짓을 한 사람은 맞아도 된다’고 생각하며, 지위가 낮거나 약한 사람을 장난이나 화풀이 대상으로 삼아 괴롭히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 손문숙 활동가는 “피해자를 친구들이나 가족, 직장으로부터 고립시키는 것도 데이트폭력 가해자의 중요한 특징”이라며 “폭력을 사용해서건 너를 위해서라고 구슬려서건 피해자가 사회적인 교류를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긴급한 상황이 생겼을 때 피해자를 구조해줄 만한 사람들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당연하게도 구성원들의 인식을 바꾸는 것만이 폭력적인 사회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박미랑 교수는 “미국은 데이트를 시작하는 연령이 되면 ‘폭력적인 인간관계’가 무엇인지부터 배우지만, 우리는 불편함을 호소하는 것만으로도 예민한 사람 취급을 받다 보니 기껏 문제를 제기해도 아무도 그것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며 “나의 피해뿐 아니라 타인의 피해까지 인지해서 도움을 줄 수 있게끔 교육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폭력이라는 게 무엇인지 배우는 대신, 용서하고 화해하는 방법만 죽어라 배웠다. 문제가 생기면 용서와 화해로 덮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모나지 않게, 둥글게 둥글게. 가해자가 용서를 구하면 그걸로 끝. 거기서 그만. 멈추지 않으면? ‘프로불편러’ 혹은 ‘프로예미너’ 되시겠다. 폭력을 사랑이라고 변명하는 사회에서 피해자들은 프로불편러 혹은 프로예미너가 되지 않고는 치유받기 어렵다고 손문숙 활동가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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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불편러가 돼야죠. 프로불편러가 될 수밖에 없어요. 폭력의 본질이 뭘까요? 통제 욕구예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의사에 반해 당신 마음대로 나를 어떻게 하려는 건 굉장히 폭력적인 일’이라는 걸 알게 되면 피해자들도 스스로가 가진 내면의 힘을 발견하게 돼요. 내가 이런 취급을 당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죠. 저는 우리 모두가 차별과 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고, 민감해지면 민감해질수록 좋다고 생각해요. 모두가 민감해지고 조심스러워져서, 서로 상처 주지 않고 더 주체적이고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최대한 그래야 하는 거 아닐까요?”

강나연 객원기자 naloto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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