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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지하철보다 싼 기차여행? 1000원 들고 떠나는 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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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저가 기차여행 코스 동두천~백마고지역

철원 안보여행은 시티투어 버스타고 노동당사·제2땅굴 등 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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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원선 일부 구간을 달리는 통근열차. 단돈 1000원으로 동두천역에서 백마고지역까지 1시간 여 기차여행을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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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면(830원)은 살 수 있어도 신라면컵라면(1150원)을 사기엔 부족하다. 서울 시내 마을버스(900원)는 겨우 탄다 쳐도 지하철(1250원) 표 한 장도 살 수 없다. 우리 돈 1000원은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게 더 많아, 때로는 보잘것없게 느껴지는 그런 돈이다. 하지만 이 적은 돈의 가치를 충만하게 느낄 수 있는 여행이 있다.

통근열차를 타고 떠나는 기차여행이다.
통근열차는 경원선 동두천역과 백마고지역 사이를 운행하는 완행열차인데, 어른 운임이 단돈 1000원에 불과한 착한 기차다. 8월 21일 우리나라에서 가장 저렴한 기차인 통근열차를 타고 강원도 철원으로 향했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시끄러운 뉴스로 도배되는 요즘이지만, 오히려 차창 밖 최전방 접경지대는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철도 마니아의 성지 동두천에 가다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서울을 가로질러 경기도 동두천 동두천역에 닿았다. 동두천역 5, 6번 플랫폼에서 출도착하는 특별한 열차 ‘통근열차’를 타기 위해서였다. 한국 철도는 속도에 따라 고속열차(KTX·SRT), 특급열차(ITX 새마을), 급행열차(새마을호·무궁화호) 등으로 나뉘는데, 열차 등급 중 최하위 등급인 보통열차에 속한 완행열차가 바로 통근열차다. 현재는 경원선 일부 구간인 동두천역~백마고지역에만 통근열차가 다니고 있다. 국내 유일의 통근열차 노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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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11차례, 주말에는 9차례 동두천과 백마고지를 왕복하는 통근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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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에 동행한 『대한민국 기차여행의 모든 것』 박준규(43) 작가는 “통근열차가 출발하는 동두천역은 기차 마니아에겐 성지 같은 곳”이라고 소개했다. 시속 300㎞를 주파하는 고속열차가 전국을 연결하는 시대에 좀처럼 느끼기 힘든 아날로그적 감성이 가득하다는 게 이유였다. 작가의 말처럼 통근열차는 추억의 기차 여행을 상기시키는 요소가 다분했다. 온라인으로 예약할 수 없고, 현장에서만 기차표를 살 수 있는 것부터 그랬다. 동두천역 역무원에게 “어른 1장이요”를 외치고 백마고지역행 표를 샀다.

시한부 기차를 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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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폐지된 통일호를 떠올리게 만드는 통근열차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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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릿느릿 흘러가는 차장 밖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완행열차 여행의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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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에 내려가니 출발 시간보다 앞서 통근열차가 미리 정차해 있었다. 차량이 5량밖에 되지 않아 기차는 더욱 앙증맞아 보였다. 기차 내부는 완행열차의 정서가 가득했다. 붉은색 쿠션으로 덮인 통근열차 좌석은 지금은 폐지된 ‘통일호’ ‘비둘기호’ 등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등받이를 움직여 좌석의 순방향과 역방향을 조절하고, 창문도 열렸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승객의 대다수를 차지했지만 기차 구석구석을 열심히 사진으로 기록하는 젊은 여행객도 종종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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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근열차가 전방에 가까워지면 창밖으로 한국전쟁 때 끊긴 철로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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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통근열차의 가격. 한번 탑승하는 데 어른 운임은 단돈 1000원이고, 노인과 어린이는 500원으로 깎아준다. 동두천역부터 백마고지역까지 43㎞를 1시간 동안 달리는 기차를 지하철 요금보다 적은 돈으로 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박 작가는 “통근열차는 지하철이 연결되지 않는 근교 주민의 편의를 위해 코레일이 적자를 감수하면서 제공하는 열차 서비스”라고 일러줬다. 2019년 통근열차 노선의 중간 지점인 연천역까지 지하철 1호선이 연장되면, 통근열차는 언제 폐지돼도 이상할 것이 없단다.

통근열차가 출발 시간을 정확히 맞춰 출발했다. ‘시한부’ 운명을 가진 열차지만, 가능한 오래도록 이 정감 어린 열차를 볼 수 있길 바랐다.

분단의 현장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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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북단 역, 백마고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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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천천히 북녘을 향해 내달리며 창밖 풍경이 변했다. 고층 빌딩이 사라지고 곡식이 여무는 평야가 드러났다. 사이사이 군부대도 보였다. 전방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게 실감났다.

동두천역을 출발한 통근열차는 55분 후에 강원도 철원 백마고지역에 닿았다. 백마고지역은 역무원도 근무하지 않는 작은 역으로 대한민국 최북단역이자 철도중단점이다. 통근열차가 다니는 경원선은 원래 백마고지역을 지나 철원역, 월정리역 그리고 지금은 북한 땅에 속한 강원도 원산까지 이어지는 철로였지만, 분단과 함께 중간에 뚝 끊긴 불완전한 신세가 됐다. 백마고지역 한편에 서 있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고 쓰인 철도중단점 푯말을 보니 남과 북이 갈라진 땅에 살고 있다는 게 와 닿았다. 머리로는 알지만 서울에서는 쉽게 느낄 수 없는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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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철도중단점을 알리는 푯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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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철원까지 왔으니 시티투어(어른 1만4000원, 어린이 9000원)를 해보기로 했다. 백마고지역에서는 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시티투어 버스가 출발한다. 남북이 첨예하게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요즘이지만, 시티투어는 예정대로 운영됐고 40인승 버스에 절반가량 자리가 찼다. 백마고지역에서 만난 철원 주민도, 백마고지역 앞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철원군 대마리 부녀회 회원들도 하나같이 “철원은 평소 때와 다름없이 안전하고 평화롭다”고 입을 모았다.

긴장감 도는 안보 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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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역 앞에서 출발하는 철원 시티투어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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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보병사단장이 발급한 통행증을 붙인 차량만 민간인통제선 안쪽으로 접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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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역 앞에 철원군 대마리 부녀회에서 운영하는 식당이 있다. 강원도 특산음식 수수부꾸미(5000원)를 튀겨서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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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투어 버스에 탑승한 철원군 문화해설사 안재권(64)씨는 ‘안보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투어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철원 사람은 이곳을 ‘전방’이라고 부릅니다. 철원 외 지역은 ‘후방’으로 치지요. 후방에서 오신 분들에게는 최전방의 풍경이 이색적일 겁니다. 아직 대한민국은 휴전 상태라는 증거를 눈앞에서 볼 수 있거든요. ”

안 해설사의 말마따나 철원 시티투어는 긴장감이 돌았다. 민간인통제선 안쪽으로 버스가 진입할 때는 무장한 군인이 차량에 탑승해 인원을 일일이 체크했고, 군부대 주변에 ‘지뢰’라고 쓰인 경고 팻말도 여럿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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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측이 지은 건물로는 유일하게 현존해 있는 노동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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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사 내부는 현재 들어가볼 수 없다. 고문실이 있었던 노동당사 지하에서 유골이 다수 발견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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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투어 버스는 뼈대만 남아있는 앙상한 건물 앞에서 속도를 줄였다. 노동당사였다. 근대문화유산 22호로도 지정된 노동당사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히트곡 ‘발해를 꿈꾸며’ 뮤직비디오가 촬영된 장소이기도 하다. 안 해설사는 “일제강점기에서 해방 된 이후 북한은 발 빠르게 철원 땅을 지배하려는 야욕을 부렸다”면서 “한국전쟁 중 철원 이북으로 북한 세력을 밀어낸 연합군이 탱크로 노동당사를 올라간 흔적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철원 땅에서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지, 콘크리트로 단단하게 지은 노동당사 표면에 포탄 자국이 형형했다.

서늘한 남침용 땅굴이 하이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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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모를 착용하고 입장해야 하는 제2땅굴. 지금은 내부에서 사진촬영을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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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땅굴 내부.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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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땅굴 앞 편의점에서 살 수 있는 건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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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 안보관광의 핵심 여행지라 할 수 있는 땅굴도 들렀다. 우리나라에는 북한의 남침용 땅굴이 모두 4개 있는데, 발견된 순서대로 이름을 붙였다. 1975년 존재가 알려진 제2땅굴은 현재 일반인도 구경이 가능하지만 사진 촬영은 철저히 금지해 놨다. 안전모를 쓰고 지하 50m 아래로 들어서자 동굴 피서를 온 기분이었다. 땅굴 기온이 연중 15도로 유지되는 까닭에 공기가 서늘했다. 땅굴을 수색하면서 북이 설치해 놓은 폭탄 때문에 국군 7명이 전사했다는 얘기를 들을 때는 오싹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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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푯말이 세워진 월정리역 선로 위를 여행객이 거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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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럽게 재연해 놓은 월정리역. 경원선의 간이역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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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리역을 지나 휴전선을 통과한 기차가 언제쯤이면 북녘 땅에 닿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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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투어 버스는 북녘 땅을 바라볼 수 있는 평화전망대를 거쳐 월정리역에 닿았다. 민통선 이북에 있는 월정리역은 지금은 영업을 멈춘 폐역으로 한국전쟁의 상처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장소다. 철원군은 원래 월정리역이 있던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관광용’ 월정리역 역사를 새로 짓고 잿더미가 된 기차를 갖다 놨다. 어찌 보면 지구 상 유일한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에서만 만들 수 있는 ‘테마파크’같기도 하다. 하지만 기차가 달리지 않는 폐역의 쓸쓸함만은 ‘리얼’했다. 통근열차를 타고 백마고지역·월정리역을 차례로 지나 생전 밟아보지 못한 땅에 닿는 상상을 했다.

철원=글·사진 양보라 기자 bor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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