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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연중기획 - 지구의 미래] "나 다시 돌아갈래" 반달곰의 외침 들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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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과 인간의 공존’ 종복원사업 시즌2 시대로

세계일보

“형은 그냥 무난한 성격이었어요. 특별히 겁이 많지도, 공격적이지도 않고 평범했죠. 눈에 띄는 영재도 아니었어요. 원래 우리 곰들이 좀 똑똑하잖아요. 그런데 그 형이 90㎞를 걸어서 수도산까지 갔다고요? 그것도 두 번이나? 헐… 대박.” 지리산에서 수도산으로 두 번이나 모험을 떠나 스타가 된 반달가슴곰 KM-53에게는 쌍둥이 형제 KM-54가 있다. KM-54는 지리산에 머물고 있는데, 만일 KM-53의 소식을 들었다면 이렇게 말했을지 모른다. 25일이면 KM-53이 수도산에서 두번째로 포획돼 지리산 자연적응훈련장에 갇힌 지 꼬박 한 달이 된다. 정부는 아직도 KM-53의 거취를 정하지 못한 상태다.

◆1800평 울타리 안에서 보낸 한달

지난 21일 곰이 머물고 있는 국립공원관리공단 종복원기술원(이하 기술원)을 찾았다. 기술원은 지리산 남쪽 끝자락인 전남 구례에 있다.

먼발치에서라도 KM-53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안고 찾아갔지만 곰 그림자는커녕 울타리도 볼 수 없었다. 곰은 기술원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자연적응훈련장에서 대인기피훈련을 받고 있는데 오직 직원 두 명만 교대로 접근할 수 있다고 했다. KM-53의 훈련장 체류기간이 길어지면서 야생성이 줄어들 것을 우려해 사람과의 접촉을 최대한 제한하려는 조치다.

기술원장이 아니라 그 할아버지가 와도 훈련장에는 갈 수 없는 상황이어서 직원들을 통해 KM-53의 근황을 전해들었다.

KM-53이 머물고 있는 훈련장은 해발고도 700∼800m 위치에 마련된 5888㎡(약 1780평) 공간으로 2.5m 높이의 전기 울타리가 둘러싸고 있다. 동물원에 비하면 훨씬 좋은 환경이지만 야생에서 1마리당 차지하는 영역(500만㎡)에 비하면 0.1%에 불과한 좁은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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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가슴곰 KM-53은 2015년 1월 국립공원관리공단 종복원기술원 자연적응훈련장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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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10월 위치추적기를 달고 방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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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14일 김천 수도산에서 산길 보수작업 중이던 인부들의 초코과자를 뜯어먹다 걸린 KM-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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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산에서 지리산으로 회수된 뒤 방사됐지만 또 수도산을 찾아갔다.


KM-53은 이곳에서 지금까지 10회 정도 대인기피훈련을 받았다.

등산객 차림을 한 기술원 직원이 피리나 금속소리(종소리 등)를 내며 접근하고 이때 곰이 피하지 않으면 물리적 충격을 주거나 위협적인 행동을 해서 쫓아내는 훈련이다. ‘사람한테 다가가면 안 좋은 일이 생긴다’고 각인시키기 위해서다.

훈련장 안에는 전기선이 둘러쳐진 양봉시설도 있는데, 이 역시 꿀을 좋아하는 곰이 양봉농장을 습격하지 않도록 양봉시설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을 심어주는 장치다.

열흘에 한번씩 도토리, 밤 같은 먹이도 배급받는다. 이때도 사람이 먹이를 두고 갔다는 걸 알아채지 못하도록 한쪽에서 곰을 위협하며 관심을 끄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 몰래 먹이를 두고 간다.

아직까지는 KM-53이 야생성을 잃은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만일 KM-53이 재방사되지 못하거나 오랜 훈련장 생활에 적응해 버리면 기술원 뒤편에 있는 생태학습장에서 여생을 보내야 한다. 생태학습장에는 자연적응에 실패해 회수된 곰 9마리를 포함해 총 13마리가 살고 있다. 이들의 생활환경은 동물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 안에 있다 반나절씩 교대로 방사장에 나와 기술원을 찾아오는 탐방객에게 모습을 보여주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KM-53의 엄마(CF-37)와 아빠(CM-39)도 생태학습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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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카메라에 찍힌 km-53.


◆똑똑한 곰? 평범한 곰!

KM-53은 6월14일 수도산에서 포획돼 기술원에 격리돼 있다 20일 만에 재방사됐다. 하지만 또다시 수도산을 찾아갔고 이번에도 포획돼 아직까지 기술원에 머물고 있다. 곰이 수도산을 두 번이나 찾아갔다는 사실은 지리산 반달곰 복원사업에 한 획을 그을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곰의 특성을 안다면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기술원 관계자는 “이전에도 방사된 곰이 서식지에서 민가를 어슬렁거린다든가 하는 문제 행동을 보이면 다른 곳으로 서식지 이전을 하곤 했다”며 “그럴 때마다 원서식지로 되돌아올 때가 많았는데, 똑같은 번지수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정확히 원래 살던 지점으로 돌아오곤 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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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연구에서도 곰은 최고 430㎞ 떨어진 곳에서도 원래 살던 곳을 찾아올 만큼 회귀본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일까. KM-53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니터링하고 있는 기술원 직원들도 KM-53에게서 특별한 점을 발견하지는 못했다고 했다.

“성격도 평범하고 감탄할 만큼 똑똑한 행동을 보이지도 않았어요. (훈련장 내) 양봉시설을 만지려고 했다가 전기를 맞더니 두 번째에는 전깃줄을 지지하고 있는 폴대를 뒤로 젖히고 넘어가려는 시도를 한 적은 있어요. 전기를 맞지 않으려고 머리를 쓴 건데, 이 정도는 다른 곰도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이에요.”

짐작건대 KM-53의 수도산 개척은 유달리 똑똑한 반달곰의 돌출행동이 아니라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서식지 확대로 보인다. 장이권 이화여대 교수(에코과학)는 “먼거리에서 새 서식지를 찾는 행동은 거의 모든 포유류에서 나타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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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누구의 것인가

KM-53이 야생동물의 본능에 따라 수도산으로 영역을 넓혔다는 것은 이제 반달곰 복원사업이 ‘지리산국립공원 내 양적 확대’에서 ‘백두대간에서 곰과 인간의 공존’이라는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원사업이 시즌2로 넘어가려면 ‘산은 누구의 영역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환경과 생태를 강조하는 입장에서 보면 산은 본래 야생동물의 터전이었다. 산 정상까지 등산로가 뚫리고 맹수가 자취를 감춘 건 최근 50년 새 벌어진 일이다.

복원사업은 산의 주인이었던 야생동물에게 서식지를 돌려준다는 의의를 갖는다. 여기까지는 반대할 사람이 많지 않다.

그러나 반달곰에 의해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경우에도 복원사업을 지지할 수 있을지, 방사된 반달곰이 야생에서 손주까지 본 상황에서 어디까지가 관리대상 곰이고 어디부터 순수 야생곰으로 봐야 하는가 등에 대한 논의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당장 KM-53을 어떻게 할 것인지도 갈피를 잡지 못했다. 김천 수도산에 방사하자니 국립공원이 아니어서 서식지 관리 문제가 걸리고, 지리산에 방사하자니 혹여나 KM-53이 다시 수도산으로 가다 올무에 걸리거나 로드킬 당할까봐 걱정스러운 상황이다.

지난 17일 열린 ‘반달가슴곰과 공존 방안 모색을 위한 워크숍’에서 김천시는 “KM-53을 수도산에 방사한다면, 이에 필요한 모든 인력과 예산을 아낌없이 지원하겠다”며 적극 유세를 펼쳤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김천 방사에 대해 신중할 것을 주문한다. 곰 스스로 서식지를 찾아가는 게 자연스럽고(윤주옥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실행위원장), 인위적으로 수도산에 데려다놓으면 곰이 혼란스러울 수 있다(장이권 교수)는 지적이다.

조우 상지대 교수(관광학)는 KM-53이 지역 홍보수단으로 변질될 것을 우려했다. 조 교수는 “KM-53이 특정지역의 홍보에 활용되면 곰을 보러 관광객이 크게 늘고 곰과 사람의 접촉이 늘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환경부는 “최대한 빨리 결정을 내리겠다”면서도 “대통령 업무보고(29일) 등 현안이 많아 당분간 방사 문제를 결정할 여력이 없다”고 말했다. KM-53은 이번주 중 방사될 줄 알고 계류장으로 옮겨졌었는데 또다시 ‘붕 뜬’ 신세가 됐다.

정부가 준비 없이 시작된 종복원사업 시즌2로 우왕좌왕하는 사이 KM-53의 감금 아닌 감금 생활은 길어지고 있다.

구례=윤지로 기자 kornya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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