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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뒤늦게 상륙한 명작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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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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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마모에도 빛을 잃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 고전이다. 짧게는 사반세기, 길게는 한 세기 가까이 한국에선 만나지 못했던 명작 소설들이 잇따라 번역되어 출간되고 있다. 하나같이 미국 영국 러시아가 자랑하는 작가들의 대표작이다.

"폭스파이어에서 활동했던 건 내 나이 열셋에서 열일곱 사이였고, 그 시절 폭스파이어는 신성한 존재였다."

조이스 캐럴 오츠(79)가 1993년 발표한 22번째 장편 '폭스파이어'(자음과모음)는 남성이 휘두르는 폭력에 맞서 단결한 소녀들의 이야기를 그린 독특한 소설이다. 1950년대 뉴욕 북부 소도시의 가난한 소녀들은 폭스파이어라는 비밀 조직을 결성한다. 폭스파이어는 피로 맺어진 진정한 자매들의 모임, 충성과 헌신, 믿음과 사랑으로 똘똘 뭉친 무법의 갱단이었다. 성희롱을 일삼는 학교 수학 선생에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준 이후 이들은 거침없이 전선을 확대해간다. 폭력까지 동원하며 이들은 승리를 거두지만 내부의 한계에 봉착해 결국 붕괴한다. 소녀들은 서툴고 미숙했고, 세상은 가차 없는 곳이었다. 1964년 데뷔 이후 50편이 넘는 장편을 쓴 미국 소설의 여왕이 오랫동안 천착해온 여성, 폭력, 광기 등의 주제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크리스토퍼 이셔우드(1904~1986)의 '싱글맨'(창비)은 오랜 연인을 사고로 떠나보낸 58세의 대학교수 조지의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떤 하루를 그린 소설이다. 조지는 언제나처럼 눈뜨고, 출근하고, 강의하고, 퇴근하는 죽은 연인의 옛 여자를 병문안하고, 오랜 친구와 저녁을 먹고, 혼자 바에서 술을 마시다가 제자인 케니를 만나기도 한다. 겉으로는 아무 사건도, 아무 문제도 없지만, 문득문득 찾아오는 상실과 부재의 감각은 매번 날카롭고 아프고 생소하다. 소설 속 조지의 나이는 1962년 집필 당시의 작가의 나이와도 같지만, 독자들의 추측과 달리 자전적 소설인가라는 추측을 작가는 부인했다. 생전 영국 문학의 대표적 '퀴어' 작가로도 유명한 이셔우드가 정제된 언어로 쓴 이 소설은 가디언 선정 '100대 영문 소설'로도 꼽혔다. 2009년 톰 포드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어 베니스영화제 남우주연상도 수상했다.

이반 부닌의 '아르세니예프의 인생'(문학동네)은 1933년 러시아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이반 부닌(1870~1953)의 자전적 소설이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프랑스로 망명한 부닌의 문학은 조국을 향한 향수, 종교적 요소가 짙게 나타났다. 아르세니예프의 스무 살까지의 회고를 담은 이 소설은 어린 시절 목가적 생활에 대한 향수, 방황하는 청년 시절, 가부장적인 과거의 러시아, 중부 러시아의 아름답고 슬픈 풍경 등이 기억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묘사된다. 1930년 파리에서 첫 권을 펴낸 뒤 최종 본은 1952년 출간되는 우여곡절을 겪은 이 작품은 낯선 형식 등 여러 면에서 문제작이다. 역자인 이항재 단국대 러시아어과 교수는 "전통적 의미의 소설이라기보다는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넘나들며 삶과 사랑, 죽음과 존재에 대해 고찰하는 한 편의 철학적·미학적 에세이에 가깝다"고 해석했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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