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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6 (화)

[이동준의 일본은 지금] 노인에게 놀이터 뺏긴 아이들…사회의 뒤늦은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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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령사회 일본에서는 노인들의 요구와 저출산 여파로 아이들이 크게 줄자 어린이 놀이기구를 철거하고 노인들을 배려한 ‘건강기구’ 설치를 늘려왔다.

아울러 노인들의 휴식을 보장한다는 이유로 ‘공놀이하지 말라’, ‘뛰지 말라’ 등 수십개가 넘는 주의사항을 내걸어 갈 곳 없는 아이들은 골목으로 내몰렸다.

그 결과 예상치 못한 수많은 문제가 발생했고, 이런 폐해를 뒤늦게 깨달은 사회는 정비에 나섰다.

세계일보

어린이 놀이터가 사라진 배경으로는 노인들의 항의와 요구, 안전사고에 따라 놀이기구를 위험시설로 인식한 사회의 분위기 등이 꼽힌다.

이러한 인식으로 일본은 지난 1993년 6월 도시공원법 시행령에서 어린이 놀이터에 관한 조항을 삭제하고, 이를 대신하여 공원 정비와 이용 조항을 신설했다.

개정된 조항에는 사고를 일으킬 수 있는 어린이 놀이기구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노인 세대가 이용할 수 있는 건강시설을 마련토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에 각 지방자치단체는 정비 사업을 추진했다.

그 결과 일본 국토교통성 조사에 따르면 도시공원 내 그네는 전체의 90%까지, 시소는 60%, 정글짐은 20% 줄었고, 노인들을 위한 건강 운동기구는 51.5배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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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공원에서 건강기구를 사용하는 노인들. 아이들이 놀 공간은 없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근처에서 놀면 방해가 되고 다칠 위험이 있다며 아이들에게 주의를 당부했다. 사진= 요미우리신문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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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놀이터에 아이들이 뛰놀며 발생하는 소음이 다른 이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내용의 안내문이 부착돼있다. 사진= 요미우리신문 캡처


지자체는 이러한 성과를 대대적으로 알리며 어린이들의 안전사고가 줄어들 것으로 기대했지만,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아이들은 건강기구를 놀이기구로 삼았다가 워킹머신에 다리가 끼는가 하면 어른용 철봉에 매달렸다가 균형을 잃고 넘어져 팔·다리가 부러지는 등 사고가 잇달았다.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자 지자체에서는 아이들이 건강기구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도록 지침을 내렸고, 부모와 어른들에게 교육을 당부했다. 이어 아이들의 안전과 어른들의 휴식을 보장한다는 취지로 공원에서 공놀이를 금지했다. '소리를 내면 안 된다', '낙서하지 말라'는 등의 주의사항도 놀이터에 내걸었다.

수십가지에 이르는 금지사항이 내걸린 뒤 아이들은 어른들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벤치에 앉아 게임기에 몰두했고, 이번에는 게임 중독문제가 불거졌다. 또 갈 곳을 잃은 어린이들이 공을 들고 골목길에서 놀면서 교통사고가 늘었고, 소음 발생에 따른 마찰도 끊이지 않아 주민갈등으로까지 번지며 각지에서 소송전이 일었다.

한 지역에서는 아이들이 골목에 놀면 사고 위험이 크고 시끄럽다는 이유로 아이를 키우는 주민을 상대로 집단으로 이사를 강요했고, 이에 못 이겨 이사한 육아 세대가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하는 사례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런 갈등을 두고 여론은 갈렸다. 아이들이 마음 놓고 뛰어놀 공간이 부족해 빚어진 결과라는 주장에 골목에서 아이들이 놀면 교통사고와 소음을 유발하는 만큼 이를 막아야 하는 부모의 주의가 더 필요하다는 반론이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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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아이들이 맘 놓고 뛰어놀 공간이 부족해 주민간 골목길 분쟁으로 이어졌다. 사진= TBSi 방송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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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등 좁은 곳에서 놀던 어린이들이 차도로 뛰어나와 사고를 당하는 등 일본에서는 놀이터가 사라진 뒤 새로운 사회 문제가 엄습하고 있다.


뒤늦게 교훈을 얻은 도쿄도는 ‘아이들이 뛰어놀 권리’를 보장하기로 하고, 그간 아이들로부터 발생하는 소리를 소음으로 규정해서 발생한 소송과 어른의 그릇된 인식을 바꾸기 위해 환경확보조례법 개정에 나섰다.

지금까지는 보육원 등에서 어린이로부터 발생하는 소음을 규제 대상으로 지정했지만, 그 결과 아이들의 건강한 성장을 방해했다는 여론을 수렴하여 어린이들이 일으키는 발·놀이·악기소리 등을 규제 대상에서 뺐다.

공원 놀이기구에 대해서도 노인세대에 치우치지 않고 모든 세대의 안전을 고려해 '복합 놀이기구‘ 도입을 서둘렀으며, 어린이와 노인이 함께 이용할 수 있는 '균형 맞추기가' 일본 전역으로 확산하고 있다.

공원은 모두에게 편안함과 휴식을 제공하는 공간이다. 어느 세대에 치우쳐 '부족함'이 발생하면 앞선 사례처럼 크고 작은 새로운 문제를 일으킨다. 도쿄도를 중심으로 어린이 놀이터에 대한 의식 개선과 더불어 그간의 시행착오 끝에 내려진 새 조치가 골칫거리로 전락한 공원이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장소로 거듭날 수 있도록 이끌 수 있을지 기대해본다.

이동준 기자 blondi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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