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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이슈플러스] 되풀이되는‘기부금 비리’… 얼어붙는 온정의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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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체계 강화 등 제도적 안전망 정비 목소리 / 100억대 횡령 ‘새희망씨앗’ 여파 “꺼림칙해… 직접 이체 고려” 동요 / 모금회 “도매금 평가절하 우려”/ 서류만 있으면 단체 설립 가능 / 1명이 수백곳 맡아 관리 어려워 / “투명성 높일 전담 조직화 필요”

세계일보

매달 한 자선단체에 5만원씩 후원하고 있는 직장인 윤모(31)씨는 후원 중단을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유명 비영리단체 새희망씨앗이 후원금 128억원을 횡령했다는 언론 보도를 접하고 나서다. ‘어려운 학생들을 돕겠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해당 단체는 2억1000만원만 아동 후원금으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간부들의 아파트 구매, 골프 여행 등 호화생활에 쓴 것으로 드러났다.

윤씨는 “기부를 더 하고 싶어도 꺼림칙한 느낌이 든다”라며 “소규모 장애인 시설 등에 직접 이체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100억원대 기부금 비리가 불거지면서 국민들의 기부심리가 얼어붙고 있다. 기부단체들의 투명성 문제가 잇따라 제기되면서 국가 차원에서 국민들이 ‘마음 놓고’ 기부할 수 있는 제도적 안전망을 정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

기부금 비리가 특히 문제인 것은 이제서야 조금씩 확산하고 있는 기부문화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어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나타나는 ‘부의 불평등’을 민간에서 일정 부분 완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미국·유럽 등 선진국에서 ‘기부의 일상화’가 문화로 자리잡은 데 반해, 우리나라는 기부금 규모나 여건이 경제규모에 한참 뒤쳐져 있는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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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손 아동 후원금으로 요트 파티를 하고 있는 새희망씨앗 관계자들. 128억원을 후원받아 126억원을 이런 식으로 흥청망청 써버렸다. 사진=서울경찰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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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국민들의 기부 참여율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발표되는 세계기부지수(WGI)를 보면, 우리나라의 순위는 2013년 43위였던 것이 지난해 75위로 떨어지는 등 매년 낮아지고 있다.

주부 김모(51)씨는 “여유가 생길 때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이 크지만 기껏 기부를 하더라도 엉뚱한 사람들 뱃속으로 들어갈까 하는 우려가 크다”며 “이런 우려만 없어져도 사회 전체적으로 기부가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비영리단체들은 이번 사태로 전전긍긍하고 있다. 지난해 불거진 ‘최순실 게이트’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뇌물수수 창구로 미르·K스포츠 재단 등 비영리단체를 이용한 것이 드러나 싸늘한 눈초리를 받은 것이 불과 얼마 전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 단체 관계자는 “벌써부터 기부 흐름이 얼어붙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고 전했다.

투명성 문제를 까다롭게 다뤄온 단체들은 답답하다는 입장이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관계자는 “시민위원회 운영, 기부금 사용내역 공시 등 내외부 감시 체계 강화로 투명성을 높이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벌여왔다”면서도 “이번 일로 제대로 된 단체들까지 도매금으로 평가절하될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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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금 비리’ 왜 자꾸 불거지나

기부문화에 찬물을 끼얹는 비영리단체들의 기부금 비리는 일종의 구조적 비리에 가깝다는 분석이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2008년 1384곳이었던 ‘지정기부금단체’는 올해 6월 기준 3480곳으로 2배 이상 늘어났다. 지정 신청에 사업계획서와 정관 등 몇몇 서류만 구비하면 기부금을 모집할 수 있는 지정기부금단체로 지정될 수 있기 때문에 단체 수가 폭증하고, 결국 감시망이 역시 헐거워지고 있다는 얘기다.

또 기부금 단체의 지정 및 취소는 기재부에서, 관리감독은 관할 주무부처가, 결산 내역 공시 및 감시 등은 국세청이 맡고 있는 ‘3원화’된 구조도 일탈을 예방하고 가려내기 어려운 이유로 지목된다. 세 기관의 공조 절차가 복잡한 데다, 단체마다 주무부처가 다른 탓에 운영 기준 등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주무부처의 경우 1∼2명의 공무원이 많게는 600곳 이상의 단체를 살펴야하는 구조라서 제대로 된 감시가 힘들다는 점도 한몫한다. 올해만 봐도 주무부처가 서울시인 기부금단체가 605곳, 보건복지부가 229곳, 외교부가 225곳에 달한다. 이번 ‘새희망씨앗’처럼 계획서나 집행예산 등 서류를 ‘마음 먹고’ 조작하면 이를 쉽사리 알아채기 어려운 상황이란 것이다.

올해 초 한국가이드스타가 공익법인에 대한 평가를 최초로 공개했을 때, 고유목적사업비와 관리 및 모금비용이 0원이거나 직원 수가 0명인 등 엉터리 법인이 1665곳에 달했다는 점도 기부단체 신청 및 감독을 강화해야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전문가들 “관련 법, 전담 행정부처 시급”

전문가들은 기부 선진국처럼 기부단체를 총괄해 투명성을 높일 전담 조직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한국NPO공동회의 이일하 이사장은 “호주의 경우 자선 사업을 총괄하는 자선·비영리위원회(ACNC)가 주기적인 모니터링과 자금 추적으로 ‘불량 단체’들을 가려내 법인을 취소하거나 세제 혜택을 박탈한다”며 “기부법이나 비영리법 등 이를 총괄하는 법 제정과 관리감독할 행정기관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연세대 강철희 교수(사회복지학)는 “기부자들이 ‘스마트 도너(smart donor)’로서 자신이 기부한 돈이 어떻게 쓰이는 지를 깐깐하게 살피는 태도가 중요하다”며 “정부와 민간에서도 기금을 모으는 조직들에 대한 평가·감시하는 활동이 더욱 강화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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