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4 (수)

<디테일추적>'구내식당 외부 손님 받지마" vs. "가성비 좋구만" 판교의 갈등

댓글 8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조선일보

판교테크노밸리 내에 걸린 현수막./문현웅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최근 판교테크노밸리 부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수막이다. 기업 구내식당 때문에 지역 상권이 파괴되고 있다는 내용이다. 회사 식당과 지역 경제 쇠락 간에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조선일보

판교테크노밸리 인근 도로에 걸린 현수막./문현웅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상인들 주장
상인들은 판교테크노밸리에 입주한 기업 중 일부가 자사(自社) 직원뿐 아니라 외부인 출입도 허가하는 통에 주변 식당이 경영난을 겪는다 주장하고 있다. 양경식 판교테크노밸리 상인연합회 부회장은 “판교테크노밸리에 입주한 상가 500여곳 중 70% 가까이가 음식점인데, 흑자 나는 곳이 거의 없는 상황이다”고 했다.
구내식당이 문을 열기 전까진 장사에 별 지장이 없었다 한다. 양 부회장은 “작년 즈음 판교테크노밸리 내 기업 입주율이 90%를 넘어간 때를 기점으로 각 회사에서 본격적으로 구내식당을 운영하기 시작했다”며 “그래도 회사 수와 비교하면 구내식당이 얼마 없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 외부인에게도 밥을 파는 식당이 많아 큰 피해를 보게 된 것”이라 했다. 지난 8일 경기도가 발표한 ‘2017년 판교테크노밸리 입주기업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6년 12월 기준 판교테크노밸리에 입주한 기업은 총 1306개며, 판교테크노밸리 상인연합회는 이 중 70여개 기업 구내식당이 외부에도 문호를 개방했다 보고 있다.

#사제밥 < 회사밥 인 이유
사실 ‘짬밥’이나 ‘급식’ 등 일괄배식이 각자 취향 따라 골라 먹을 수 있는 바깥세상 음식을 이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군인들이 괜히 공짜 밥 제쳐놓고 사제(私製) 음식에 목을 매는 게 아니며, 학생들 또한 아무 이유 없이 급식을 버리고 학교 담을 넘는 게 아니다. 그런데 왜 판교테크노밸리 지역 상인들은 회사 밥에 밀려 고사(枯死)할 지경이라 호소하는 걸까.
양 부회장은 “기본 반찬은 거의 그대로고 메인메뉴나 국 정도만 나날이 달리하는 보통 구내식당과는 달리, 판교테크노밸리 구내식당은 식단이 상당히 다채로운 편이다”며 “심지어 몇몇 기업은 매일 한·중·일·양식으로 바꿔 낼 정도로 구내식당을 크고 호화롭게 운영한다”고 했다. 실제로 최근 인터넷에서 판교테크노밸리 내 구내식당에서 제공하는 화려한 식단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조선일보

최근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던 판교테크노밸리 내 구내식당 식단 사진./인터넷 캡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게다가 구내식당 밥은 외부 식당보다 훨씬 싸다. 양 부회장은 “이런 식단을 아침 2000~3000원, 점심·저녁 4000~5000원에 파니 배겨낼 도리가 없다”며 “하다못해 일주일에 하루만 구내식당 문을 닫거나 저녁때만이라도 운영하지 말아 달라며 각 기업에 공문을 보내보기도 했지만, 부탁을 들어준 회사는 한 곳도 없었다”고 했다.
조선일보

판교테크노밸리 한 기업 건물 안에 자리잡은 구내식당. 외부인인 기자도 아무 제지 없이 들어가 식권을 구입할 수 있었다. 1장당 가격은 4000원./문현웅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런 식당 대부분은 위탁으로 운영된다. 양 부회장은 “직영도 드물게 있지만, 여기 기업 구내식당 대부분은 위탁운영이다”며 “그나마 대기업은 방문객 신분이라도 있어야 외부인도 식당 이용이 가능하지만, 코리아 벤처타운이나 미래에셋 건물 등에 자리 잡은 구내식당은 누구나 언제든 들어가서 돈만 내면 먹을 수 있다”고 했다.

#불공정 경쟁론(論)
상인들은 이처럼 회사 구내식당이 외부인에게도 싼값에 음식을 제공하는 게 불공정 경쟁이라 주장한다. 양 부회장은 “회사에 입주한 구내식당은 임대료 부담이 없기 때문에 우리보다 가격경쟁에서 훨씬 유리하다”며 “기업이 사내복지 핑계로 외부에도 밥장사를 하며 영세상인들을 말려 죽이는 꼴”이라고 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이하 식약처)도 비슷한 해석을 내렸다. 식약처 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구내식당은 지정된 특정 인원만을 대상으로 급식하는 게 그 목적이며, 소수 민원인이나 방문객에 한해서만 외부인 급식을 허용한다”며 “영리 목적으로 불특정 다수 외부인에게 식사를 팔면 영세 상인과의 상생에 지장이 올 우려가 있다”고 했다. 식약처는 이미 지난 2015년 식품위생법 제2조 12호 ‘1회 50명 이상의 특정 다수인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집단급식소는 영리 목적으로 운영돼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들어 구청, 경찰서 등 공공기관 부속 구내식당이 불특정 다수 외부인에게 급식을 제공하는 게 위법 소지가 있다는 유권해석을 내린 바 있다. 이 해석을 사기업까지 적용시킨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구내식당을 개방해 두고 있는 기업들은 외부인을 막는 게 쉽지 않다는 입장이다. 이런 기업 중 하나인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 관계자는 “여기 입주한 기업 대부분은 벤처기업이고, 그런 만큼 클라이언트나 협력사 방문도 매우 잦은데, 이렇게 찾아오는 분들 식당 방문을 일일이 통제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며 “게다가 이 부근 물가가 적잖이 비싼데, 방문하는 분들께 그런 곳에서 식사를 하라 권하시는 것도 곤란한 일”이라고 했다.
판교테크노밸리에서 근무하는 회사원들 역시 이와 같은 식약처 해석이 현실을 무시한 탁상공론일 뿐이라 말한다. 판교테크노밸리 내 벤처기업에서 일하는 이모(32)씨는 “김밥 한 줄 값이 3500~4500원으로 구내식당 밥과 맞먹고, 갈비탕 한 그릇이 1만원인 동네가 판교테크노밸리다”며 “책상머리에 앉아 원칙만 읊는 공무원 덕에 영세상인 행세하는 폭리상인만 배를 채우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판교테크노밸리 내 자리잡은 식당 중 일부의 가격표./문현웅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판교테크노밸리에서 근무하는 신입사원 박모(여·24)씨는 “대학 다닐 땐 대학가 원룸 주인들이 상생에 해가 된다는 핑계로 기숙사 건립을 막더니, 취직하고 나니 회사 주변 식당들이 상생을 들이밀며 직장인들이 싸게 밥 먹는 걸 방해하려 들고 있다”며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다를 바 없는 모양이다”고 했다.

[판교=문현웅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전체 댓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