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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강천석 칼럼] 대통령, 한반도 사태 直視하는 모범 보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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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駐韓美軍 철수론… 정책 실패가 부른 人災

국민 집단 공포·자신감… 상실로 무너지는 사태 걱정

조선일보

강천석 논설고문


한 번 일어났던 일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의 하나는 되풀이해서는 안 될 역사의 반복을 막기 위해서다. 우리는 100년 전 지도에서 사라졌던 나라의 국민이다. 광복절은 나라를 잃고 떠돌던 망국(亡國)의 백성이 나라를 되찾고 어엿한 나라의 국민으로 재출발한 것을 기념하는 행사다. 나라는 스스로 무너지고 나서 남에게 빼앗기는 법이다. 이런 이치를 깨닫는다면 우리는 광복절에 감개무량(感慨無量)할 수만 없다. 통절(痛切)한 자기반성이 함께해야 한다. 광복절에 고난절(苦難節)의 의미가 더해졌을 때 광복의 의미도 깊어진다. 나라 안팎 사정이 수상하게 흘러가기에 광복절을 맞는 마음이 더 무거웠다.

한 번 일어났던 일이 다시 되풀이될 수 있다는 것은 역사법칙이 아니다. 사람의 허물, 정책의 잘못이 빚은 결과일 뿐이다. 동시다발적(同時多發的)으로 터져 나오고 있는 주한(駐韓) 미군 철수론도 그중 하나다.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은 미국 신문기자협회 연설에서 공산화를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을 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정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고 다섯 달 후 김일성 군대가 서울을 점령했다. 한국인에게 '애치슨라인'은 악몽(惡夢)이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밀어붙여 들썩들썩하던 주한 미군을 한국에 주저앉혔다.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듯한 기세로 미국을 압박해 얻어낸 결과다.

이번 주한 미군 철수론의 진원지(震源地)도 미국이다. 북핵 해결을 위한 미·중 또는 미·북 최종 담판에서 주한 미군 철수 카드를 꺼내 들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 나서 판을 키우자 주한 미군 철수론은 순식간에 미국 주요 언론의 고정(固定) 메뉴 자리를 차지했다. 엊그제 백악관 수석전략가 스티브 배넌이 북핵 동결(폐기가 아니다)과 주한 미군 철수를 중국과 맞바꾸는 외교적 거래를 언급했다. 주한 미군 철수론이 백악관에 공식 입성(入城)한 것이다. 한-미 동맹의 색(色)이 바래고 있다는 신호다. 롤러코스터를 탄 듯 왔다 갔다를 거듭한 사드 배치 논란 때부터 예견된 불길한 전조(前兆)가 현실이 됐다.

'한국 제치기'라는 뜻의 '코리아 패싱(Korea Passing)'은 우리가 가장 아파하는 역사의 급소(急所)다. 김정은이 핵과 미사일로 도발할 때마다 미·중·일 정상 간 한국 건너뛰기 전화 회담에 신경이 곤두서는 이유다. 쓰라린 역사를 먼저 떠올린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국이 일본과 맺은 시모노세키조약(1895년), 일본과 미국이 주고받은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 2차대전 종결 직전의 얄타회담(1945년) 모두가 우리 어깨 너머로 우리 운명을 결정지은 '코리아 패싱'이었다.

역사에는 '절대'가 없다. 정치 지도자라면 '절대'라는 단어를 함부로 입에 올려서는 안 된다. 1930년대 프랑스 지도자들은 '절대'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았다. 대통령과 총리는 '전쟁을 피하겠다. 평화를 지키겠다'고 할 때마다 '절대'라는 단어를 말머리에 올렸다. 장군들마저 '절대로 프랑스 국경 안에선 전투를 벌이지 않겠다'고 국민에게 다짐했다. 그럴수록 상황은 절대로 피하고 싶은 쪽으로 흘러갔다.

'절대 평화' '절대 전쟁 회피'는 당시 프랑스 전체 국민의 간절한 소망(所望)이기도 했다. 20여 년 전 1차 세계대전에서 140만 명이 목숨을 잃고 국토의 4분의 1이 폐허가 됐기 때문이다. 프랑스 분위기를 한 영국 외교관은 본국에 이렇게 보고했다. '프랑스에서 논쟁에 승리하는 방법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전쟁에 반대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프랑스 국민들은 영국에 떠밀려 독일과의 전쟁에 휘말려 든다고 불평하고 있다.'

이 분위기 속에서 프랑스 육군은 1940년 5월 7일 대(對)독일 경계를 풀고 그동안 중단했던 육군의 휴가를 다시 허용했다. 사흘 후 5월 10일 히틀러 군대는 북부 국경을 넘어 침공(侵攻)을 개시해 6월 14일 파리를 점령하고 샹젤리제 거리에서 개선(凱旋) 행진을 벌였다. '유럽의 가장 위대한 육군'이라는 평가를 받던 프랑스 육군이 사흘 만에 무너졌다. 역사가 토니 주트는 프랑스 몰락의 근본 원인은 '정치인들이 국민에게 주입(注入)시킨 집단적 공포와 자신감 상실'이라고 적었다.

국민이 많이 흔들리고 있다. 대통령은 금 간 국민의 자신감을 바로 세워야 한다. 자신감 있는 국민이 평화를 지키고, 공포를 이겨낸 국민이 전쟁을 막을 수 있다. 대통령이 사태를 직시(直視)하는 모범을 국민에게 보여줘야 한다. 주한 미군 철수론으로 북한 핵무기가 미국만을 노리고 있다는 허구(虛構)는 단번에 무너졌다. 한국의 갑옷을 벗기는 전략임을 이젠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대통령의 높은 지지도는 이럴 때 쓰는 것이다.

[강천석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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