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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감자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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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애 수필가

충청일보

[김영애 수필가] 햇감자 한 상자를 샀다. 단출한 식구인데도 나는 햇감자가 나오는 시기가 되면 연중행사처럼 토실토실 하게 실한 것을 골라서 들여 놓는다. 베란다 그늘진 곳에 잘 쟁여놓고 나면 양식이라도 그득하게 채워둔 양 마음이 든든해진다. 들며 날며 몇 알씩 가져다가 먹다보면 바닥이 보이곤 했다. 출신은 못 속인다더니 나는 영락없는 시골 태생이라 그런지 감자를 좋아한다. 포실포실 분이 나게 찐 감자를 먹고 있으면 감자에 얽힌 유년의 기억들이 흑백영화처럼 펼쳐진다.

춘삼월 꽃샘추위가 지날 즈음이면 헛간 구석진 곳에 땅을 파고 잘 보관해 두었던 씨감자는 환생을 꿈꾼다. 쭈글쭈글한 몸에서도 감자 눈은 세상을 향한 강렬한 눈빛으로 생명을 품고 있다. 두서너 쪽으로 자른 후에 의식처럼 재에 버무려서 한쪽씩을 심었다. 유한의 생을 유지하기위한 윤회의 깊은 잠을 다시 땅속에 묻는다.

씨감자를 하고 남은 감자로 엄마는 짜글짜글 찌개를 끓였다. 고추장을 풀어서 멸치대가리만 넣고 끓여도 맛있었던 그때의 그 맛이 두고두고 그리워서 흉내를 내보지만 영 그 맛이 아니다. 감자는 그대로인데 간사한 내 입맛이 변해서 일 것이다. 치즈가 듬뿍 얹어진 포테이토 피자에 내 입맛은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가 마당가 텃밭에 피어있던 감자 꽃이 아련하다. 자주 꽃 핀 것은 파보나마나 자주감자 하얀 꽃 핀 것은 파보나마나 하얀 감자, 동시처럼 그랬었다. 수수한 여인처럼 피었다. 분칠을 하지 않은 촌부의 아낙처럼 수더분하게 피는 꽃이다. 백주 대낮에 향기로 누구를 유혹하지 않지만 밤이면 교교하게 달빛을 유혹하는 꽃이다. 이슬 맞으며 하얀 적삼 스스로 풀어헤치는 여인 같은 꽃이다.

들여다볼수록 어여쁜 감자 꽃의 운명은 기구했다. 게으른 농사꾼 탓에 감자알이 실하지 않겠다고 서둘러 꽃과 열매를 따내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꽃과 열매가 양분을 빼앗아서 감자알이 실하게 여물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가지나 오이처럼 꽃의 생명을 다하고 그 열매 끝에 매달려서 운명을 다하지 못했다. 땅속에서 실하게 영글어갈 감자를 위해서 가차 없이 꺾여 진 감자 꽃은 밭고랑에서 비들비들 시들어갔었다. 그래서 인지 훗날 식물도감에서 본 감자 꽃말은 "당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라고 쓰여 있었다.

장마철이 시작되기 전 햇빛 쨍쨍한 날에 감자를 캤었다. 호미로 밭둑을 조금만 파도 감자알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뿌리에 올망졸망 기를 쓰고 매달려 있다. 서로 손에 손을 꼭 잡고 의지하며 살아낸 가난하지만 단란한 가족 같았다. 한 뿌리에 매달려서 같은 양분을 먹고 자랐음에도 알이 실한 눔이 있고 중간치도 있고 밥상에 오르지도 못할 비실한 것도 있다. 한 부모 아래서 나고 자란 자식도 그 크고 작음과 길고 짧음이 달라서 나름의 그릇 만큼만 쓰임 받고 살듯이 자연의 이치는 다를 바가 없는듯하다. 한쪽의 씨감자에 매달려서 봄 내내 꿈을 키워온 감자들이 밭고랑에서 축축한 몸을 햇볕에 말리고 있다. 잘 도 영글었다.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꺾여 진 감자 꽃의 희생을 감자는 알고나 있을까!

충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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