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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여행]“나라가 망했는데 99칸 기와집이 무슨 소용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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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 독립운동의 성지/ 석주 선생 우레와 같은 탄식 울리는 듯

세계일보

이상룡 선생의 생가 임청각 사당엔 위패가 없다. 이상룡 선생이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날 때 조상 위패를 어딘가에 묻었는데, 지금은 아는 이가 없다. 임청각은 석주를 비롯한 독립운동가 9명을 배출한 고성 이씨 가문의 종택이다.


음력 1월,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넌다. 갓난아기는 품에 안고, 예닐곱살 아이는 종종걸음으로, 배가 부른 만삭 여성은 부축을 받은 채 영하 30∼40도까지 떨어지는 강추위 속, 살을 에는 칼바람을 맞으며 북방으로 간다. 우리 옛땅 만주로 넘어가기 위해서다. 그곳이라면 빼앗긴 조국을 찾기 위해 좀 더 활발히 독립운동을 벌일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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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 임청각. 임청각은 석주를 비롯한 독립운동가 9명을 배출한 고성 이씨 가문의 종택이다.


200여명의 인원은 간도 유하현 삼원포에 자리를 잡고 황무지를 개간한다. 몸은 힘들지만, 나라를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하루하루를 버텼다. 이들은 한인 자치기구인 경학사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로 키운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은 향후 홍범도의 대한의용군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등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 독립운동의 토대를 만든 인물이 석주 이상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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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 이상룡 선생이 만주로 떠날 때 남긴 시.


남성뿐 아니다. 당시 영남 유림을 대표하던 시아버지는 국권이 박탈되자 이에 대한 책임으로 자결을 선택한다. 큰오빠 김대락과 큰형부 석주 이상룡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난다. 남편마저 독립운동을 하다 먼저 세상을 뜬다. 이뿐 아니다. 맏사위는 노름판에 뛰어들어 집안살림을 거의 다 말아먹어 문중에서 내쫓긴다. 이는 일제 감시를 피해 군자금을 조성하기 위해서다. 안동 최고의 파락호였던 김용환이 바로 그다. 두 아들 역시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에 붙잡힌다. 단순히 집안 남성들의 풍파만 치른 것이 아니다. 본인 역시 57세 나이로 3·1 만세운동에 나서 일제에 붙잡혀 고문을 받는다. 일제는 고문 끝에 그의 두 눈을 멀게 한다. 그에 대한 기록은 일제가 남긴 ‘고등경찰요사’에 ‘이중업의 처는 1919년 만세 당시 수비대에 끌려가 취조를 받다가 실명하였다’는 내용뿐이다.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다. 이중업의 처 김락은 죽은 후 합장묘 비석에 ‘기암 진성 이공’의 처 ‘의성 김씨’로만 기록돼 있다.

한반도에서 일제에 가장 타협하지 않았던 지역을 꼽으라면 경북 안동이다. 고리타분하게 느껴지는 선비들이 모여 있는 곳이지만 백척간두에 처한 나라를 위해 누구보다 앞장선 것이 그들이다. 가장 보수적인 지역으로 꼽히는 안동의 선비들은 목숨, 재산을 바치며 진짜 보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국가, 국민보다 자기 안위만을 챙기면서 보수인 척 떠드는 무리와는 결을 달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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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 임청각.석주 이상룡 선생은 일가를 이끌고 만주로 이주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으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대표적인 곳이 석주 이상룡의 생가 임청각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광복절 기념사에서 언급한 그곳이다. 임청각은 석주를 비롯한 독립운동가 9명을 배출한 고성 이씨 가문의 종택이다. 석주는 국내에서 의병투쟁 등을 했지만 큰 성과가 없자 전답 등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떠난다. 이에 임청각 사당엔 위패가 없다. 석주가 떠날 때 조상 위패를 어딘가에 묻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아는 이가 없다.

석주는 1926년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國務領)이 되는 등 독립운동을 하다 해방을 보지 못하고 만주에서 눈을 감는다.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던 석주는 광복이 훌쩍 지난 1990년 현충원에서 안치됐다. 석주의 증손은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 고아원 생활을 할 정도로 어려운 삶을 이어갔다.

특히 임청각은 집앞에 바로 중앙선 철로가 놓여 있다. 철로가 없었다면 낙동강이 펼쳐지는 풍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제가 석주 가문의 정기를 끊겠다며 임청각의 행랑채와 부속채를 철거하고 철로를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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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유림을 대표한 이만도 선생이 자정순국한 향산고택. 이만도 선생의 며느리 김락 선생은 3·1 만세운동에 나서 일제에 고문을 받다가 실명했다.


김락과 관련한 직접적인 발자취는 많지 않다. 시댁과 친정이 쟁쟁한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보니 김락이 부각되지 못했다. 국권 박탈에 자결한 시아버지 향산 이만도가 머물던 향산고택과 친정 백하구려가 그나마 남은 흔적일 듯싶다. 향산고택은 원래 도산면 토계동에 있었는데 안동댐 공사로 수몰되자 1976년 현재의 위치인 안동시 안막동으로 이건했다. 앞을 보지 못한 채 남편의 죽음을 맞이하고, 아들이 일제에 붙잡혔을 때 슬픔을 오롯이 감내했을 그의 흔적은 영원히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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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벌 호랑이’로 불린 일송 김동삼 선생 생가터.


안동의 독립운동사를 알려면 내앞마을은 필수코스다. 독립유공자로 이름을 올린 내앞마을 사람만 25명이나 된다.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난 사람이 100여가구, 약 1000명에 이른다. 안동 독립운동의 요람인 이곳에 경북독립운동기념관이 있다. 이상률과 같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김락의 오빠인 김대락의 고택 ‘백하구려’, ‘만주벌 호랑이’로 불린 일송 김동삼 생가, 해방 직후 남북연석회의 임시의장을 맡았던 김형식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 무엇보다 독립운동기념관에선 안동과 경북뿐 아니라 구한말 독립운동 전반에 대한 해설을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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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문학관에서는 광야, 청포도 등 시인의 생애를 볼 수 있다. 이육사 선생은 단순히 저항시만을 쓴 것이 아니라 의열단 활동 등을 하며 맹렬히 독립운동을 했다.


독립운동기념관에서 눈길을 끄는 건 철관이다. 1926년 6월 10일 순종 장례식을 기해 일어난 6·10 독립만세운동을 기획한 권오설은 일제에 붙잡힌 뒤 1930년 4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고향인 안동으로 옮기기 위해 시신은 운반이 용이한 철관에 임시로 수습됐다. 시신이 도착한 후 유족들은 시신을 나무관에 옮기려 했지만 일제 경찰이 이를 막아섰다. 결국 철관 채로 땅에 묻혔다. 이는 독립운동가들이 죽은 후 그 ‘혼’마저 가두려 한 일제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이 철관은 2008년 후손들이 권오설과 부인의 유해를 합장하려고 무덤을 열었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기념관의 철관은 당시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안동 독립운동가 중 이육사를 빼놓을 순 없다. 도산서원을 지나 있는 이육사 문학관에서는 광야, 청포도 등을 쓴 시인의 생애를 볼 수 있다. 단순히 저항시만을 쓴 것이 아니라 의열단 활동 등을 하며 맹렬히 독립운동을 한 그의 삶을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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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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