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16 (화)

고 힌츠페터 기자 부인의 특별한 서울 체험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영화 ‘택시운전사’ 실제 모델 고 힌츠페터 기자 부인, 동생과 진관사 템플스테이도

영화 개봉에 맞춰 동생과 함께 방한

진관사에서 80평생 첫 명상 체험

광장시장·인사동 들러 한국 삶 체험

“남편은 평생 광주 힘들어해”


한겨레

“구름과 해를 부르는 건 모두 내 마음의 일이지요.” 선우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명상을 시작한 브람슈테트 자매(맨 오른쪽이 고 힌츠페터 기자의 부인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김사복씨, 당신을 만날 수 있다면 당장 서울로 날아가 변화된 대한민국을 달리고 싶습니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흥행이 이어지며, 영화 속 고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의 마지막 음성편지가 관객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영화 개봉에 맞춰 고 위르겐 기자의 부인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80)가 지난 8일 동생과 한국을 찾아 열흘간의 일정을 시작했다. 브람슈테트는 남편과 여덟번 한국에 와봤는데, 곧바로 광주로 향하거나 공식 일정과 정치적 상황에 메여 여행할 여유가 없었다고 한다.

브람슈테트 자매가 마침내 첫 서울 여행에 나섰다. 김사복씨는 만날 수 없었지만, 대신 수많은 한국인들과 자유로운 거리를 누볐다. 때로는 택시로, 때로는 두 발로. 은평구 진관사에서 동대문 광장시장을 지나 인사동에서 젊은이들과의 시간까지, 3일간의 특별한 여정을 함께했다.

한겨레

진관사 사찰음식을 배우고 있는 브람슈테트 자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서울 여행, 비움과 극복의 시간

지난 금요일, 정오를 넘겨 서울 은평구 진관사에서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와 만났다. 그는 영화 <택시운전사>의 흥행으로 인터뷰와 공식 일정이 쏟아져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동생 로스비타 미트 브람슈테트도 언니를 뒤따라 들어왔다. 180㎝가 넘는 키에 묵직한 배낭을 멘 모습이 서로 닮았다.

자매는 선우 스님의 가르침대로 절하는 법을 배우고 명상을 했다. 명상할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물었더니 “생각을 하기보다 비워내는 연습을 했다. 복잡한 것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고 답했다.

작은 선방에서 선우 스님과 두 시간 동안 차담도 나눴다. 상실과 죽음의 두려움,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브람슈테트는 고인이 된 남편을 애도하며 여러번 말을 잇지 못했다. “눈의 장막을 거두는 연습을 해보세요. 모든 것은 변하고 슬픔은 지나갑니다. 오늘 이 얼마나 기적 같은 하루입니까?” 선우 스님의 말에 자매는 고개를 끄덕인다.

진관사에서는 모든 음식을 ‘약’으로 대하는 법을 가르쳤다. 자매의 밥상에는 들깻잎, 여름 애호박, 감자전, 도라지무침, 50년 묵은 간장으로 담근 고추장아찌 등이 쌀밥과 함께 올랐다.

“남편은 한국 음식과 김치를 정말 좋아했어요. 그냥 흉내가 아니라 입에 맞는다고 하더군요. 독일에서도 늘 김치, 김치, 저세상으로 가기 전까지 김치 타령을 했습니다.” 젓가락질을 멈춘 브람슈테트에게 선우 스님이 답한다. “겨우내 언 땅에서 추운 계절을 견디고, 봄이 오면 꺼내 먹는 게 한국의 김치예요. 식사하고 나서 다 같이 뒤뜰에 장독대도 구경하러 가시지요.”

한겨레

저물녘 타종 의식으로 하루를 마감한 브람슈테트.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몰래 영화를 봤습니다.” 스님의 고백

1980년 5월의 광주. 브람슈테트가 말하길, 남편은 눈감을 때까지 군홧발과 총탄에 피범벅 된 광주의 청년들 얼굴로 괴로워했다. “그는 장남으로 어렵게 컸어요. 전후 러시아령 독일에서, 아버지는 투옥되고 어머니와 형제들이, 갓난아기를 안고 군인들 총을 피해 고향을 탈출했어요. 그래서 광주의 일에 더 몰입했을 겁니다.”

브람슈테트는 사찰 내 종각에서 직접 종을 울리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빗방울이 떨어졌다. “저, 몰래 영화를 봤습니다.” 지나던 비구니 스님이 웃으며 다가왔다. 주변의 작은 스님들도 자박자박 다가와 합장했다. 눈 맑은 스님들이 고목처럼 웅크린 부인을 다독였다.

진관사에서 하룻밤을 보낸 브람슈테트 자매는 한결 편안해진 모습이었다. 더 이상 감시를 피해 쿠키 상자에 필름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시대, 내내 표현을 아끼던 동생 로스비타 미트 브람슈테트(73)가 한마디 보태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우리 자매는 동독과 서독으로 갈려 40여년을 헤어져 살다가 만났습니다. 동독의 사회주의를 견뎠던 저는 ‘자유’가 얼마나 어렵게 얻어지는 것인지 압니다. 물질적인 것만으로 행복할 수 없더군요. 한국의 젊은이들이 스스로 획득한 ‘자유’와 ‘행복’에 대해 긍지를 갖길 바랍니다.”

한겨레

“굉장히 볼 것들이 많아요, 녹두빈대떡과 사탕수수주스가 신기해요.” 브람슈테트 자매가 광장시장 구경에 나섰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너 여기 있니?” “응, 우리 여기 있지!”

주말을 지내고 월요일, 광장시장에서 다시 만난 자매는 들뜬 얼굴이었다. 그들은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오늘의 ‘미션’을 말했다. “서울의 시장 풍경을 늘 보고 싶었어요. 튼튼한 여행가방, 인삼차, 그리고 우리 둘 다 새 휴대폰 케이스를 가지고 싶어요.”

브람슈테트는 광장시장의 빈대떡 부치는 남자를 심오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재료를 여러번 되물었다. 인삼차 가격은 깐깐하게 비교하고, ‘몸이 차가운 내 친구가 인삼차 먹고 좋아졌단다’며 내게도 삼의 효능을 강조했다. 무언가 계속 먹이며 건강을 챙겨주는 모습은 한국의 여느 할머니들과 다르지 않았다. 브람슈테트는 독일에서 평생 의사로 일했다.

그는 길의 풍경이 바뀔 때마다 ‘요즘 한국 젊은이들의 생각’을 조심스레 물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문화에 대해 어떻게 보는가, 정치적 상황과 통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문제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등 조곤조곤 물었다.

한복을 갖춰 입은 어린 자매를 만나서는 처음으로 탄성을 질렀다. 자매가 갑자기 “Are you here?” “Yes, We are here!” 하며 암호 같은 노래를 여러번 흥얼거렸다. 여든 해를 견딘 브람슈테트 팔뚝에 강한 힘줄이 피어올랐다. “한국 젊은이들 교육 수준이 높다는 것을 느껴요. 강단이 있고 다들 빛이 나요. 모든 여정이 믿을 수 없어 벅차오릅니다.”

글·사진 전현주 객원기자 fingerwhale@gmail.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한겨레 금요 섹션 서울앤 [누리집] [페이스북] | [커버스토리] [자치소식] [사람&]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